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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 독자 May 13. 2024

롤러코스터 같은 발포

2월 20일 토요일, 발파라이소는 줄여서 '발포'라고 불린다.

  알렉사와 나는 버스를 타고 <발파라이소>로 향했다. 우리는 바다에 갈 생각에 약간은 들떠있었다. 옷 안에 비키니까지 챙겨 입고 가지고 있는 가장 시원한 민소매 나시에 무려 핫팬츠까지 꺼내 입었다. 내 배낭의 옷들을 카테고리로 나누었을 때 오로지 해변을 위한 옷인 해변 패션에 속할 그런 옷을 처음 꺼내 입은 거다. 바다 햇살에 대비해 챙이 큰 비치 모자도 챙겼다. 한마디로 나는 반쯤 헐벗은 상태로 한여름의 바다에 가는 패션을 하고 갔다. 우리가 머문 산티아고는 한여름이라 무척 더웠고 거리의 모두가 그런 짧은 옷들을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녔기에 발파라이소도 그런 줄 알았다. 더구나 발파라이소는 바다가 있는 곳이니까.


  그러나 도착한 발파라이소는 무슨 일인지 겁나게 추웠다. 사람들은 모두가 꽁꽁 싸매고 있었다. 보이는 복장들은 최소 가을 옷인 긴 바지에 긴팔 티, 심지어 가죽 잠바를 입은 사람도 간간이 보였다.


  아뿔싸! 그 순간 나는 오늘 하루가 순탄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 그곳에서 여름 바다로 '피서 가는 패션'을 한 사람은 나랑 알렉사뿐이었다. 그나마 알렉사는 민소매를 입었으나 금발의 긴 머리가 본인의 피부톤과 비슷해 상체가 충분히 커버되었고 비치 바지를 입었으나 얇실한 긴 바지였기에 추워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독일 사람이라 서구적인 외모의 칠레 사람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아 무리에서도 튀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나는 누가 보아도 여기서는 보기 드문 동양인에다 복장도 현지인들과는 매우 동 떨어진 복색이었다. 모두가 옷을 하나 더 걸쳐 입는 상황에 혼자 입어야 할 것들을 많이 덜어낸 그런 모양새.


  나는 당장 내 몸을 가릴 무언가를 사고 싶었다. 그러나 당장은 옷을 사 입을 만큼의 칠레 페소가 넉넉하지 않았다. 옷도 헐벗고 온데다 지갑도 가난하다니. 곧장 터미널 환전소를 찾았는데 환율이 너무 안 좋아서 20달러만 환전하고 시내로 가서 마저 환전을 더 하기로 했다. 거기서 발파라이소의 관광 안내를 받다가 알렉사는 발파라이소 시내와 관광 명소인 바다를 동시에 가는 투어를 듣기로 했고, 나는 여기 온 유일한 목적인 <파블로 네루다의 집> 방문이 우선이었기에 일정을 따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투어를 떠나는 알렉사와는 저녁 6시에 다시 여기 터미널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알렉사와 헤어진 나는 옷이 간절했다. 일단 옷을 살 칠레 페소도 더 바꿔야 했고. 환전을 위해서는 중심 광장으로 가야 했기에 재빨리 근처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터미널 안에서 구글 지도를 열어 광장으로 가는 버스 번호를 확인했지만 정류장에서는 한번 더 확인할 겸 옆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께 길을 물었다. 물론 나의 스페인어는 길을 물을 수는 있으나 길고 긴 답변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방적인 수준이었지만.


  할아버지가 내게 뭐라 뭐라 이야기해 주던 찰나, 갑자기 사람 넷을 태운 택시가 와서 자기들도 그 광장으로 간다고 나더러 함께 가자는 거였다. 그들의 친절이 반가웠으나 수중의 돈이 택시를 탈 정도로 넉넉하지 않아 거절했다. 그랬더니 "괜찮다고 자기들이 내주겠다"까지 하는 거였다? 순간 '이게 웬 재수일까?' 잠시 생각했으나 재수는 무슨.....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택시 강도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걸 타면 내 여행이 끝장나는 거다. 나는 정신을 차려 다시 한번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 택시를 보냈다. 순간 그들의 제안에 혹했던 나 스스로가 아찔해서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얼어있었다. 날씨가 추워 이미 몸이 얼어있는데, 마음까지 얼어버렸다. 사실 그들이 택시를 태워준다고 했던 그 순간에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저걸 타고 같이 가라"라고 등을 떠밀어서 '이거 진짜 괜찮은가?' 싶었다가 한번 더 정신을 차렸다. 그땐 할아버지도 그 사람들과 한패인 줄 알고 멀리 했었다. 나중에 보니 할아버지는 그냥 그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인 줄 알고 얻어타라고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은 진짜 선량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게 기다리던 버스를 탔다. 버스비는 300페소인데 가진 동전이 250페소뿐이었던 나. 버스 기사아저씨가 250페소도 오케이라며 타라고 했는데 같이 있던 할아버지가 100페소를 내주셨다. 그러더니 내게 거스름돈 50페소를 보여 주며 말했다.


"Recuérdame!"


  “기억해 줘!" 50페소를 대신 내 준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말이었다. 안 잊으려고 여기에 썼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내게 남긴 "Recuérdame!"라는 말은 훗날 유명 애니메이션 <코코>의 메인 테마 노래로 유명해졌다. 덕분에 어디선가 이 노래가 나올 때면 나는 또 발파라이소의 오늘이 생각날 거다. 참고로 50 페소면 우리 돈 백 원의 가치다. 푼돈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 순간 백 원의 동전이 없었던 나에게는 참으로 귀중한 선물이었다.


  무사히 중심 광장에 다 달았을 때, 할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서 내렸다. 얼른 돈을 더 환전하고 옷을 사 입어야지! 그런데, 아...... 중심 광장은 부두 바로 근처라 터미널보다 훨씬 더 추웠다. 분위기는 또 왜 이렇게 살벌한지...... 발파라이소의 첫인상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수백 번은 일어날 수 있을법한 두려운 모습이었다. 처음 계획으로는 이 도시에서 3박을 하려고 계획했었는데...... what the......????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명색이 중심 광장이라면서 눈에 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이 난감한 상황이라니.


  이 거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길을 찾는다면 당장이라도 소매치기들의 표적이 될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도둑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상황이 참 불편했다. 무엇보다 이 매서운 날씨에 피서 가는 듯한 내 복장이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얼른 내 몸을 덮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서 몽땅 덮고만 싶은 그런 마음뿐이었다. 이 차림새로는 도무지 어디든 갈 자신도 없고,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핸드폰을 꺼내 길을 찾는 것조차 무서워 여의치 않았다. 이 상황에 어떻게 환전소를 찾아야 할까? 고민을 하다 일단 안전한 곳을 탐색했다. 그때 큰 건물 앞에 경찰관 두 명이 보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경찰이 아니라 해군이었다.


  그렇다. 나는 해군사령부 앞에서 보초 서고 있는 군인들에게 달려가 환전을 위한 '깜비오'를 물어보았다. 해군 오빠들은 환전소가 어딘지 긴가 민가 하는 것 같았지만 정말로 진심을 다해 찾아보며 길을 가르쳐주려 애썼다. 그들은 두 명이었고, 둘 다 유부남들이어서 아저씨라고 해야 하지만 오빠의 느낌이 났다. 잘생기고 매너까지 좋았기에 회상으로나마 혼자서 오빠라 칭해본다.


  동네에 사는 현지 사람이 여행자를 위한 환전소를 알리가 만무했지만 당시에는 그만큼 절박해서 일단 물어보았다. 그러다 옷을 살만한 곳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옷을 살만한 곳도 추가로 물었다. 그만큼 나는 춥고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스페인어를 잘하지 못하고 해군 오빠들은 영어를 전혀 못했다. 다행히 구글 번역기가 작동이 되어, 번역기를 사용했다.


“아침에 바다 갈 거라고 이렇게 입고 왔는데, 정말 망했어요! 날씨가 이렇게 추울 줄 몰랐어요. 근처에 옷 살만한 곳이 있을까요?” 라고..... 


  그 번역을 본 해군 오빠 2가 잠시 기다리라 했다. 칠레의 경찰이나 해군들은 매우 절도 있고 여유가 있어서 소위 말하는 간지가 철철 넘친다. 절대 서루르는 법이 없다. 더군다나 허리춤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총을 차고 있어서 말을 안 들으면 큰 일이 날 것 같아 시키는 대로 잠시 기다려보았다.


  그랬더니 잠시 뒤 자신의 사복 후드티를 가져와주는 것이었다. 나보고 입으라고! 그래서 나는 그걸 입고 발파라이소 여행을 시작한다. 염치불고. 체면 없다. 뼛속까지 시려오는 얼어 죽을 위기에서 해군 오빠 2의 후드티가 나를 구했다. 옷을 갈아입으라고 해군 건물 안의 화장실까지 친절하게 안내도 해 주셨다. 매너까지 최고였다. 옷을 갈아입은 나는 "나중에 이 옷을 돌려드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거기에 챙겨왔던 넓은 챙의 비치 모자를 자진해서 담보로 맡겼다. 오늘 이 도시에서는 이 모자를 쓸 일이 없으리라는 강한 확신과 함께.




  그렇게 해군사령부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해군 오빠 2의 옷을 빌려 입고 발파라이소 여행이 시작되었다. 사진 속 오른쪽 선글라스 쓴 분. 내가 처음 만난 모르는 이의 옷을 덥석 입게 될 줄일이야. 그것도 칠레 해군에게 빌린 옷이라니!


  그렇게 옷을 얻어 입고난 뒤, 나는 곧장 파블로 네루다의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옷을 사기 위한 환전이 필요 없어졌기에 환전소를 찾는 대신, 처음의 계획대로 발파라이소에서의 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처음 만난 낯선 이, 해군 오빠한테 후드티를 빌려 입은 게 스스로도 너무 웃겨서 버스에서 거울에 비친 나를 사진에 담아보기도 했다. 기분이 좋았다. 헐벗은 추위에 망연자실했던 아까와는 반대로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이 옷을 입기 전까지는 그냥 얼어 죽는 줄 알았는데, 살았다! 그때부터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오늘 강력히 느낀 바로, 사람은 추우면 모든게 얼어버린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함께 얼어버린다. 빌려 입은 해군 오빠의 후드티는 약한 기모 처리까지 되어 있었다. 그 덕에 어찌나 따스하던지. 멋이라곤 전혀 찾아보기 힘든 그냥 기본 후드티였는데, 괜히 현지인의 느낌이 물씬 나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우연히 얻어 입은 복색이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몸도 마음도 포근한 상태로 버스를 타고 플라자 이탈리아에 내렸다. 네루다의 집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광장이었다. 플라자 이탈리아, 즉 이탈리아 광장. 여전히 왜인지 모르게 으스스했지만 아까 중심 광장에서 보단 한결 나았다. 후드티 덕분에 여유를 찾은 탓이겠지.


  여기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피켓을 들고는 어떤 시위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핸드폰을 편하게 꺼내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방에 폭 넣은 핸드폰을 슬쩍슬쩍 체크하며 구글 맵으로 길을 보며 파블로 네루다의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걸음이 자꾸만 지도와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왜일까?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이쪽으로 가도 좀 가다보면 다시 반대로 가라고 뜨고, 그걸 따라 다시 반대로 가면 좀 이따 또 다른 쪽으로 가라고 뜨는 거였다. 이렇게 헤매기보다 얼른 길을 제대로 찾아야겠다 싶었다. 코너의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시기에 그에게 방향을 물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저, 파블로 네루다의 집을 찾고 있어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나요?"

  그랬더니 할머니는 여기서 버스를 타라고 하셨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머니도 그쪽 방향으로 가신다는 모양이었다. 멀지 않은 것 같아 걸어가려고 했는데, 버스가 있다면 타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할머니와 함께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할머니는 파블로 네루다의 집으로 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주셨다. 당연하게도 난 태반은 못 알아 들었다.


  말을 걸 줄은 알지만 돌아오는 길고 긴 답변은 알아듣지 못하는 나의 허접한 스페인어 실력이란. 그때 정류장에 함께 서있던 어떤 도도한 청년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러더니 내게 할머니가 해주시는 말을 영어로 번역해 주는 거였다. 가뭄의 단비였다. 영어 쓰는 사람이 이렇게 반가울 일이람! 고마운 청년! 그러나 그 친절한 청년은 너무나도 도도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나와 할머니와 도도한 청년, 이렇게 셋이 번갈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할머니와 청년이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더니, 갑자기 청년이 내게 파블로 네루다의 집까지 걸어갈 수 있게 길 안내를 해 주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에게 나를 맡기며(?) 나를 잘 부탁한다고 내내 신신당부를 하며 나를 배웅해주셨다.


  아까 본 이탈리아 광장의 시위 때문인지 버스가 오래도록 오지 않고 늦어진 탓이었다. 시인의 집으로 걸어가는 내게 길잡이가 되어준 청년. 그는 첫인상부터 그저 도도함 그 자체였다. 아까부터 쭉~~ '나는 많이 바쁘지만 인심을 써서 널 도와주겠어!' 하는 느낌이 강했다. 관광객을 속이거나 기만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는 매우 바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베푸는 친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고맙다 생각되는 그의 도도한 친절에 감사한 마음만으로 우리는 함께 시인의 집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나는 늘 길을 물어볼 때 할아버지나 할머니들한테 묻게 된다. 아마 내게 제일 덜 사기 칠 것 같은 안심 때문이랄까.


  그렇게 함께 길을 가게 된 청년은 워낙 도도하고 바빠 보여서 나는 청년이 대충 저기서 이렇게 저렇게 가라고 하며, 시인의 집으로 가는 방향을 가르쳐 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밖으로 그 도도 청년은 친절하게 시인의 집까지 나를 에스코트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감동!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친절할 일이람?’ 예상하지 못한 감동이었다. 게다가 같이 가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도도한 청년은 도도하지만, 참으로 나이스한 아이였다.


  그 가파른 발파라이소의 길을 날 위해 함께 올라가 주다니...... 발포의 언덕이 얼마나 가파르냐면 부산의 산 길보다 폭이 매우 좁고 도로 상태도 말도 못 하게 안 좋은 상태다. 그냥 한마디로 험하다. 그는 그 무시무시한 언덕길을 처음 본 나를 위해 함께 올라가 주었다. 길을 오르며 자신의 도시인 이곳 발파라이소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는데 “사람의 다리를 보면 출신을 안다”고 “다리가 튼실하면 발포 사람”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해주었다. 아까 저 여리여리한 할머니가 이 언덕을 오르는 것을 상상해 보라며...... (순간 진짜 오싹했다.) 나름의 조크도 던지고. 청년은 내게 "넌 다리가 튼실해서 발파인들처럼 언덕을 잘 오를 것"이라는 칭찬도 해줬다. 한국이었으면 욕이 되었을 그 칭찬, 고맙다 도도청년.


  진실로 발파라이소의 언덕을 걸어 오르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많은 체력 소모로 힘들었기에 중간에 잠시 길에서 쉬면서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도한 청년은 디자인을 전공한다 했다. 자연스럽게 함께 예술 산업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그러다가 부익부 빈익빈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주제가 화두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시인의 집에 약 80% 가까워졌을 때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알렉사였다! 알렉사! 알렉사는 발파라이소 투어 버스로 여기까지 편하게 투어 버스를 타고 왔다. 정말 부러웠다. 물론 투어 버스는 <파블로 네루다의 집 앞>까지만 가고 정작 입장은 하지 않기에, 애초에 나는 함께할 생각이 없었지만.


  알렉사는 다시 만난 내가 처음 보는 청년과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보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놀란 눈치였다. 계속해서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 탓에 나의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내가 알렉사에게 자초지종을 요약하던 그때, 도도 청년은 우리에게 젠틀하게 인사를 하더니 "네가 친구를 만났으니 난 이제 가겠다"라고 작별인사 건넸다. 그 순간 알렉사는 곧장 다음 투어의 장소로 이동해야 했기에 우리는 아까 약속한 시간에 터미널에서 만나자는 말을 하고 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도도청년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시인의 집으로 가는 방향을 한번 더 확인했다.


  그 때 알렉사가 투어차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된 청년은 다시 시인의 집으로 오르는 가파른 발파라이소의 언덕을 나와 함께 올라주었다. 그렇게 결국, 시인의 집 앞까지 나를 친절하게 데려다준 것이다. 아아! 발포의 그 험준한 언덕을 함께 올라주었다니. 그는 참으로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하비에르. 하비에르와는 발포의 언덕을 함께 올라가 준 감동으로 페이스북 친구도 맺었다.


  참고로 시인의 집에 가까워오니 날씨가 기적적으로 좋아지며, 햇빛이 아주 쨍쨍했다. 매! 우! 심! 하! 게! 쨍쨍했다. 게다가 발파라이소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 보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나는 아까 빌려 입은 해군 오빠의 후드티를 벗어 허리춤에 두르고 언덕을 올라야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매서운 추위에 포근했던 후드티가 간절했는데, 채 한 시간도 안되어 갑작스럽게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운 날씨로 변하다니, 이런 발포! 이곳은 날씨마저도 이토록 버라이어티 하구나.





  <시인의 집>을 방문하고 온 나는 이번엔 <시인의 언덕>에 올랐다. 칠레는 걸쭉한 시인들을 많이 배출해 낸 문학의 나라다. 시인의 언덕에는 방금 내가 집을 다녀온 <파블로 네루다>가 있었다. 반가움에 그와 악수를 하며 그의 손길을 느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와 손을 맞잡았는지 네루다는 유난히 손만 색이 바란채로 반들반들한 상태였다. 벤치에는 <비센테 우이도브로>도 앉아있었다. 그와는 첫 만남이었기에 함께 기념 셀카를 찍었다. 시인의 언덕에 있던 시인들 중에는 파블로 네루다의 스승이자 1945년에 남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도 있었다. 그의 손길 또한 느껴보려 했으나 누군가 그를 시샘이라도 한 듯 그의 손목을 끊어 손을 훔쳐간 상태였다. 아아 슬퍼라. 그렇게 시인의 언덕에는 유명한 시인들의 동상이 그 곳을 찾는 이들을 조용히 반겨주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아침의 난장판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그들은 비록 동상들이었지만 시인의 언덕은 그들의 메타포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시인의 언덕에서는 유난히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발파라이소에서 내가 찾아간 곳은 파블로 네루다의 집과 여기뿐이었다. 관광스폿으로 유명한 '역사 지구'는 다운힐 행사로 폐쇄되었기에 딱히 갈 곳도 없었다. 가고픈 마음도 없었고. 그때 내가 카우치서핑에서 캔슬해야 했던 발파라이소 집주인 카를로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칠레에 오기 전 처음의 계획으로는 산티아고 며칠을 보낸 뒤 발파라이소에 넘어와 여기서도 3박 정도를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처음 묵었던 산티아고의 판초네 집이 내 집처럼 아늑하고 좋아져 버렸다. 함께 묵고 있는 식구들도 '집 놔두고 어디를 가냐'며 숙소를 옮길 필요 없다며 쭉 같이 지내자는 제안을 했다. 덕분에 판초네에서 일주일을 묵게 되고 발파라이소의 카우치서핑은 캔슬하게 되었다. 카를로스네 집에서는 가족들과 다 함께 지낼 예정이었는데 내가 들린 오늘이 주말이라 여동생은 선약이 있어 나가고 카를로스만 잠깐 시간이 된다고 하여 내가 발포에 온 김에 잠시라도 만나자는 거였다.


  그렇게 두시에 파블로 네루다의 집 앞에서 보기로 약속을 했었다. 파블로 네루다의 집을 구경하던 중 카를로스가 갑자기 약속 시간을 네시로 변경하자 했다. 이유는 있었겠지만 갑자기 시간 약속을 바꾸는 탓에 신뢰가 떨어지기도 했고, 하루의 짧은 여행에서 알 수 없는 기다림도 내키지 않았다. 거기에 당시의 나는 파블로 네루다의 메타포를 느끼느라 카를로스와의 만남은 만나도 그만, 못 만나도 그만이었다. 그래서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만나자'라고 약속을 취소했다. 그러나 발포에 온 김에 꼭 만나자며 네시까지는 시간을 맞추겠다는 그와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나중에 보니 카를로스는 축구 광 팬이었는데 그날 중요한 경기가 있던 모양이었다. 만나서 그의 차를 타고 관광 명소들로 이동하는데 내내 집중해서 라디오의 축구 중계를 듣던 카를로스...... 덩달아 차 안에서 몇 시간을 내리 축구 방송을 들어서 그날 스페인어에 귀가 트일 뻔했다. 그런데 막상 카를로스를 만나고 보니 이 아이,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는데? 그동안 카우치서핑을 계획하며 나눈 말들은 그의 동생이 쓴 말이었거나 번역 기였던 거다. 그래서 우리는 내내 미소로 대화했다. 중간에 되지도 않는 번역기를 쓰면서 말이다. 그렇게 말은 전혀 안 통했지만 처음 만난 사이의 어색함은 없었다. 되려 우리의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웃겼고 내내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만난 시간이 네시가 넘은 상황. 나중에 알렉사랑 다시 만나기로로 약속했던 시간이 6시여서 여유가 두 시간 남짓뿐이었다.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는 발포의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었다. 관광객들이 잘 못 가는 전망 포인트까지 나를 데리고 가줬다. 100페소짜리 푸니쿨라도 태워줬다. 푸니쿨라는 가파른 경사를 오르는 산악 철도다. 카를로스 덕분에 두 시간여만에 웬만한 관광 명소를 다 들릴 수 있었다. 그뿐이랴! 그는 매  장소마다 자상하게 "ici, ici" 하며 중요 포인트에서 나의 독사진까지 많이 찍어주었다.


  칠레는 나의 첫 남미 여행의 시작인 나라인데, 오늘 하루만 보아도 이곳의 남자들은 매너가 진심 좋다. 머물고 있는 판초네 집의 판초도 물론이고! 끈적임이 전혀 없는 정말 깔끔한 매너를 가진 매너남들만 있다. 덕분에 나는 카를로스의 "ici, ici"로 인해 이때까지 여행한 날들을 통틀어 독사진을 가장 많이 남겼다. 집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ici> 이건 불어로 <여기>라는 뜻인데 왜 카를이 가 내게 <이 씨, 이 씨>라고 한 걸까? 분명 스페인어인 'aqui'가 아니라 'ici'라고 했는데, 말이지. 카를로스 너 제2외국어가 불어인 거니?


  참! 카를로스와 만나기 전에 "혹시, 너 진짜 나올 거면 옷 하나만 가져다 달라"라고 부탁했었다. 그렇게 카를로스가 진짜 나온 덕분에 빌렸던 해군오빠 2의 후드를 무사히 해군사령부에 다시 갖다 줄 수 있었다. 이날 내 사진 속 허리춤의 초록색 옷은 카를로스가 빌려준 것이다. 카를로스와도 초면이었다는 게 포인트. 그러나 마치 몇 년은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안한 만남이었고 사진 속 그의 초록 옷 또한 내 옷 같은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말도 통하지 않았으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급만남을 끝으로 카를로스 덕에 이 미친 발파라이소에서의 마무리를 빨간 자동차를 타고 다운힐을 내려가는 것으로 즐겁게 끝낼 수 있었다. 카를로스의 차를 타고 내려가는 발포의 다운힐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가는 듯 매우 신났다. 자세히 보면 사진 속 내가 만개한 잇몸 미소를 짓고 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던 발라파이소 당일치기 여행. 중간에 시인의 집과 시인의 언덕에서 보낸 잔잔했던 메타포의 향연 또한 좋았다. 마무리 배경 음악으로는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스페인어 축구 중계도 잊지 말자. 버라이어티 한 발포. 하루동안 마치 길고 긴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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