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 대한 늦은 정리
결국 2월이 되어버렸다. 2025년의 생각들과 경험을 정리하겠다고 연말부터 끄적거렸지만 미뤄둔 일은 결국 끝까지 미뤄지는구나. 더 중요한 일들을 하느라 그랬다고 정당화하는 수밖에 없겠다. 정리하고 싶은 게 꽤 많은데,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아서일까? 어쩌면 AI 때문에라도 쓰는 능력을 조금쯤은 잃어버렸을까?
이제는 봄이 오기 전까지는 정리를 해보기로 한다. 일단 무작정이라도 써보는 게 중요하겠지. AI 시대에 직접 생각하고, 손으로 직접 다 쓴 글이라니... 이런 비효율이 있나 싶지만, 대신 해줄 수 없는 게 아직은 있구나. 내 머릿속에 들어올 수는 없으니까.
2025년에는 6개월 정도 우연히 AI 교육에 스며들었다가 11월부터 천천히 빠져나오고 있다. 지금이 수요의 최고조인데 많은 기회를 걷어차는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를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연유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되짚어보자.
시작을 돌이켜보자면, 원래 인생의 많은 일들은 우연하게 시작된다. 그리고 작년 6개월간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되었던 이 생성형 AI 교육은 건 특히 더 그랬다. 연초에 AI와 관련된 몇 번의 강연을 나갔다가 우연한 기회로 기업에서의 AI 활용 실습 교육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된 것이다.
회사를 다닐 때도 종종 짧은 강연은 진행했고, 석사나 박사 때도 강연은 종종 나가곤 했다. 학위과정에 있으면 이래저래 교수님에게 들어오는 강연을 대신 나가게 되거나 추천을 받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 자리에서 발표를 잘 하게 되면 또 강연 요청이 파생되어 들어오고 다시 강연을 하고... 뭐 그렇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분들 중에서 한 분이 재작년 11월쯤 다시 강연 의뢰를 위한 이메일을 주셨다. 사실 그분께는 삼성SDS 재직 시절에도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는 회사에 강연 허가 받는 절차가 까다로워서 거절을 했던 기억이 있어서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하필 또 재작년 11월에는 좀 쉬고 있었던 상태라, 회사도 그만둔 상태였고 현업에 쓸모있는 인사이트를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고민하다 결국 고사를 했다. 그래도 경험들을 나누어 주면 많은 도움이 될 거라는 요청을 재차 주셨고 결국 간단한 발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해당 강연을 준비하면서 전자신문에서 인터뷰를 하나 진행했고 기사로 나갔는데, 이걸 계기로 전자신문과 인연이 닿아서 3월에 있을 UX 컨퍼런스에서도 비슷한 주제로 짧은 강연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전자신문에서 4월 말 정도에 AI-UX 실무 교육도 한 번 진행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6시간짜리 실무 교육은 진행한 적이 없기도 하고 준비에 시간이 많이 들 것 같아서 조금 고민을 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이때는 몰랐다 이게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
결국 진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다음과 같은 작은 모티베이션이 있었다.
안 해본 일이니까, 한 번 해보면 배울 수 있는 게 많지 않을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유엑스나 제품 관련한 업무는 앞으로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나도 스스로 일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세팅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AI 기술을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변화는 빠르고 크다. 스스로 깊이 공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후적으로 봤을 때는 이런 목표들이 모두 이뤄지긴 했으니 뭐... 목표달성이라 볼 수 있을까나.
어쨌든 이렇게 실무 교육을 진행하기로 하고 준비를 차근히 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한 통의 기업교육 문의 메일을 받게 되었다. 어느 기업 교육 컨설팅 회사의 문의였다. 나는 그때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자기 PR을 딱히 하는 사람도 아니고 특히나 강연이나 교육에 대해서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홍보채널도 없었는데... 궁금해졌다. 일단 미팅을 수락하고, 나가서 이야기를 듣고 물어봐야겠다! 싶어서 덥썩 사무실에 방문했다. 그리고 도대체 나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물어보니 대표님이 전자신문 기사를 보셨다고. 그리고 나에게 연락한 선임님이 구글링을 열심히 하셔서 내가 강연을 다니며 발표했던 자료들과 연락처를 찾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기업 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 회사와 담당자 분들의 소탈하고 솔직한 분위기에 느낌이 좋아서, 뭐 한 번 해보자! 이런 느낌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여러 교육을 진행하면서 생각보다 내가 강사로서 꽤 괜찮은 역량과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어쨌든 나는 트랙레코드가 꽤 좋은 편이다. 서울대 학석박이라는 것만으로도 왠지 믿음직스러우며, 대기업, 스타트업, 해외경험까지... 뭔가 그럴듯해보이는(?) 이력 덕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박사 1만명 시대라는데 그런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이 강의와 교육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저런 이력이 신뢰감은 주지만, 왠지 모르게 재미 없을 것 같고, 심각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다. 박사님이라니 듣기만 해도 좀 지루하잖아? 하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나는 스토리텔링에 굉장한 강점이 있고, 재미를 중요하게 여긴다. 말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전달을 잘 하기도 하고... 그리고 난 사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을 하기 때문에 신선하고 재밌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최소 인터넷 망령... 밈잘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UX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일종의 교육생의 사용자 경험(?)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모든 강의의 실습 내용을 하나하나 스크린샷을 찍고, 어떤 버튼을 클릭하고, 어떤 입력을 해야하는지를 한땀한땀 노션 웹사이트로 만들어서 배포를 했다. 모든 교육에 각기 다른 사이트를 만들어서 그 수업에만 맞게 제공을 했는데...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굉장한 노가다였다. 하지만 한 번 하고 나니까 대부분 만족하기도 하고, 나도 진행이 원활하다고 생각되어서 결국 어느 교육에나 이렇게 하게 되었고, 그것도 또 만족도를 높인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몇 번 교육을 진행했을 뿐인데, 그 사람이 다른 곳에 나를 추천하고, 그 추천이 또 추천을 불러오고... 나는 명함도 없이, 소속도 없이, 랜딩페이지 하나 안 만들고, 영업도 없이, 인바운드(?)로 계속 쏟아지는 교육을 다녔다. 작년 중순부터 폭발한 AI 교육의 수요가 그칠 줄을 몰랐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물살에 휩쓸려 6개월 정도를 지냈다. 난 늘 그렇듯 최선을 다했고, 항상 좋은 평가를 받았다. 경제적 보상도 좋았고, 나를 찾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다. 실제로 기업교육 같은 건 시리즈로 계속되기 때문에 한 번 잘하면 다음번에 다시 의뢰가 들어오고, 나와 함께 긴밀하게 일하던 파트너사들에서도 끊임없이 교육 기회를 제안 받았다.
9월에 정말정말 바빴는데, 그러면서 조금씩 정리의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나는 왜 이 교육을 하고 있을까? 앞으로 계속 할 것도 아니면서. 사실 나 스스로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한 번도 본업이나 천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면서. 그냥 하니까, 하고 있었던 거다. 언젠가 그만둘 생각을 가지고. 아마 본격적으로 교육 분야로 나아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이렇게 미온적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살 길을 찾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 때문에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일을 유지했을까? 애초에 왜 시작했을까? 돌고 돌아보니 결국 재미였다. 처음에는 재미가 있었다. 가르치는 일 자체가 안 해본 일이었다는 점이 새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남을 가르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지식에는 차이가 있다. AI의 경우에 트렌드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나도 계속해서 새로운 걸 배웠어야 했고, 그걸 다시 지식으로 만들어서 전파하고 그런 과정 자체가 나에게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사실 일반적인 강사들과 다르게 내가 다루는 커리큘럼은 너무 범위가 넓고, 제각각이며, 모든 커리큘럼이 서로 다른 양상으로 준비되어야 했다. 생계수단으로서 ROI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사실은 거의 비슷한 걸 반복해야 직업(?)으로서의 강의가 의미가 있을 것인데, 전혀 그런 게 없이 매번 새로운 걸 해대니 딱히 일이 줄어들지도 않았지만...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쯤 하고나니 이제부터는 더이상 새롭게 준비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 커리큘럼이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는 거의 포화(saturated)되었다. 일반적인 기업/공개 교육에서 커버할 수 있는 범위의 주제와 내용이 있고, 이후부터는 더이상 새로운 것을 중점적으로 해나갈 수가 없었고 반복 확산이 되는 구간이 왔다. 여기부터가 사실 직업적으로는 안정기에 들어가는 구간이겠지만... 그때부터 이제 나에게 교육은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일을 나의 본업이나 정체성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11월부터 차츰 페이드아웃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미의 여지(?)는 남아있고 배우는 점도 많기 때문에, 완전히 그만두기보다는 원칙을 몇 가지 정해두고 한 달에 1-2건 정도를 진행하고 있다. 원칙이라는 게 별 게 아니긴하다.
어떤 새로운 점이 있는가? 대상이 새로운가? 토픽이 새로운가?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성이 큰가?
내가 소속된 커뮤니티 기여가 큰가?
12월부터는 나름대로 잘 지켜나가고 있는 상태. 향후의 계획도 착실하게 몇 가지만 픽스해두고, 기준이 맞지 않는 제안들은 고사하고 있다.
12월: 진화하는 UX 실무자의 역할 강연 (커뮤니티 기여)
1월: 대기업 신입사원 교육 (대상이 새로움)
1월: "AI 에이전트" 리터러시 (토픽이 중요함)
2월: 마케팅 직무 AI 활용 (토픽이 새로움)
3월: Code-First UX 엔지니어링 (업무 관련성)
교육을 하고,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서면 깨닫게 된 것도 많은데, 조만간 이것에 대해서도 쭉 써볼 요량이다. (진짜...?)
경우에 따라 과정 중에 같이 후기(?)를 공유하는 세션이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재밌었다, 유익했다, 도움이 많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어 뿌듯했다. 근데 대체로 사람들이 양이 많아서 유익하다(?)라는 게 공통된 평가인 듯하다. 덜 하는 것보다는 더 준비해서 약간 빠르게 진행하는 게 좋지 않나 싶은 나의 개인적 취향이다. 모자란 것보다는 고봉밥이 좋잖아...
그리고 사실 나는 어떤 교육을 받는 걸 선호하기보다는 혼자서 이것저것 시도해가고 삽질해가면서 배우는 편이라, 이런 교육이 실효성이 있을까 의문을 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쨌든 교육을 진행하고 수강생들이 이런 감정과 소회를 나눠줄 때면 뿌듯함도 느껴지고, 누군가에게는 어떤 도움이 될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들어서 그래도 6개월이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와 관련해서 최근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 기록해두려고 한다. 작년 8월에 전자신문 주최로 AI-UX 과정을 이틀간 진행했다. 첫날은 AI로 UX 실무 효율화하는 도구와 방법 등을 실습하고, 둘째날에는 바이브코딩을 진행했다. 그 과정은 사실 많은 분들이 굉장히 집중력있게 들어주셨어서 대체로 기억이 많이 나는데, 그날 회사에서 3명이 함께 오셨었던 분이 계셨다. 다함께 오셔서 열심히 참여하시고 질문도 많이 하시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이날 어떤 회사의 프로젝트 자문 요청도 받았다. (물론 고사했음)
그리고 4개월 후인 12월 마지막 주에 데브멘토와 전자신문 주최로 AI 시대 UX 직무의 변화라는 주제의 컨퍼런스가 있어 강연자로 참석했다. AI 시대의 UX 실무자의 진화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진행했는데, 당연히 작년 8월과 12월 사이에는 기술적으로 엄청난 갭이 있었기 때문에, UX 엔지니어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나의 워크플로우는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 등을 완전히 새롭게 구성해서 발표했었다. 40분짜리 짤막한 강연이라 꾹꾹 눌러담아서 시간 내에 잘 마무리를 하고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어떤 분이 다가와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8월에 강남에서 전자신문 교육 들었던 수강생이에요. 회사에서 3명이서 함께 가서 들었던... 그때 정말 도움 많이 받아서 회사에 가서 저희 실무에 다 세팅해서 적용하고 활용하고 있어요. 오늘 들으니까 또 새로운 인사이트가 정말 많아서...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아요. 다시 또 새롭게 배울 게 많네요. 오늘 박사님 오신다고 해서 제가 회사에 있는 사람들 더 많이 데리고 왔어요. 정말 잘 들었습니다!
뭔가 그냥 지나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반갑기도 하고... 쑥스럽지만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직접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이 분야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지혜와 경험이 많이 공유될 수 있다는 점도 뿌듯했고. 여러 모로 기분 좋은 기억이라 글로 남겨둔다.
강의를 많이 그만두었다면, 뭔가 다른 걸 하고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기도 할 터. 작년 연말부터, 혼자는 아니고 두 명이서 프로덕트를 두어개쯤 만들고 있다. 그전까지는 사이드 프로젝트로 이것저것 장난감을 만들어보던 것이었다면 연말부터는 에이전틱 코딩도 잘되고 하니... 조금 더 진지하게(?) 만들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정말 어떤 프로덕트나 서비스를 만드는 프로세스가 많이 바뀌었고, 바뀌어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직접 코드도 만지고, PR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별의별 일을 다 하고 있다. 그래도 되는 세상이고, 그래야 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AI가 평균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역이 있고, 거기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게 단순히 퀄리티의 문제는 아니고 결국 오케스트레이션의 영역인데 카파시가 오늘자 X 포스트에서 말한 에이전틱 엔지니어링의 영역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있을 듯 하다. 언제 정리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드디어 오늘, 새해의 묵은 숙제를 하나 해치워서 시원한 마음이다. 이제 다시 일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