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에 소질이 없는 우리 부부는 산책을 좋아한다. 나이 들면서 일찍 관절이 부실해진우리 부부에게 더할 나위 없이좋은 운동이다.
산책길엔 남편과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다. 회사이야기, 건강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지인에 대한 근황도 전한다. 요즘은 노후나 퇴직, 그 이후에 삶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매번 했던 이야기도 늘 새로운 이야기처럼 주절주절 말하곤 한다.
산책을 하면서 꼭 잡은 두 손으로 서로의 체온을 전하고, 두런두런 나눈 이야기로 마음을 전하고, 소화도 시키고, 바람도 쐬고. 아마도 산책은 부부의 끈끈함을 단련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 시간이 참 편안하다. 오래된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은 어느 것과도 바꾸기 힘들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함께 걷고 싶다.
그런데...
집을 샀었다. 산책 때문에.
때는 바야흐로 2020년 8월쯤.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던 바로 그때였다. 남편과 아내는 우리 도시의 명소인 호수공원에 산책을 나갔다. 우리 집에서 천변길을 따라 걸으면 약 10km 정도 되는 거리다.
문제는 거리였다. 허리와 골반이 성치 못한 남편에게 10km는 무리였다. 물론 나도 힘든 거리였다. 차를 타고 가서 공원주차장에 세우고, 호수공원만 돌면 5km 정도다. 주말산책으로 딱 좋은 거리.
사건의 시작은 부부의 투머치토크였다.
- 나이 들어도 이렇게 걸어야 해.
- 호수공원이 정말 걷기 좋은 최고의 장소지?
- 근데, 우리 집에서 좀 멀지 않아?
- 아침, 저녁 아무 때나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
- 여기, 아파트 앞이 공원인데... 이런 집에서 살면 집 밖으로 나가면 산책이겠다.
- 여기 살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지 않겠어?
- 나중에 우리 둘이 살면 뭐가 문제겠어? 애들도 다 컸을 테고.공원만 옆에 있으면 되지! 그거면 충분해.
그래서... 이런 의식의 흐름에 따라, 집의 필요성을 합리화하고, 호수공원을 앞마당으로 두고 있는 대체불가입지의 그 아파트를 사게 됐다.
인간의 사고는 뭔가 꽂히면, 세상의 모든 논리가 그것에 맞게 조작된다. 당장 살 집도 아니면서,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못 살 것처럼 불안해 상투 전 어깨쯤에서 집을 샀다. 이미 지금 집값은 허리정도로 다시 내려갔지만.
다른 부부는 시골에 땅을 사 집을 짓기도 하고, 교외 단독주택에 텃밭을 일구며 살려고도 하지만, 우리에겐 저 호수공원만 있으면 되었다. 베란다 문만 열면, 호수공원 전체가 부부의 정원이 된다.가만히 두어도 사계절 스스로 옷을 갈아입는 자연은 어느 것으로도 대체불가능한 아름다움과 신비감을 보여준다.
탁 트인 넓고 아름다운 호수공원, 관리는 시에서 다 해준다. 지역명소인 호수공원 경관 및 시설 향상을 위해 알아서 나무도 관리하고, 정자도 놓고, 그네도 설치해 준다. 정원관리에 신경 쓸게 없다.
호수를 바라보는 우측엔 국립도서관이 있고, 좌측엔 도시 최대 중앙공원이, 그 옆엔 국립수목원이 있다. 즉, 산책하다가 도서관에서 들러 책도 보고, 몸이 찌뿌둥한 날엔 공원 게이트볼장에서 공도 칠 수 있다. 호수공원이 지루해지면 사계절 따라 바뀌는 수목원 산책도 가고, 아파트 북쪽엔 조그만 산도 있어 등산도 할 수 있다. 도심 속에서도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아파트다.풋. 자기 합리화의 세계는 이렇게나 자기 편향적이다.
하지만,
지금 집 값은떨어졌고, 늘어난 이자에 대출금이 줄지 않고, 전세가가 떨어져 추가 대출을 받았다. 당장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 집이 두 채면 승진이 안 되는 반시장적, 반자본주의적 회사방침에 따라 집을 팔아야 되지 않느냐는 선배님의 따뜻한 조언을 들었다.
'전 생각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이 차장 힘든 건 2~3년이지만, 도전하지 않았던 후회는 평생가~' 하신다.
그렇다. 훅 들어오는 강력한 메시지다.
나의 평정심에 물살을 일으키셨다. 그렇다고 당장 생각이 바뀔 건 아니지만, 확실한 사실은노후 준비를 쓸데없이 일찍 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정말 눈에 무언가 씐 게 아닐까...
아무리나이를 먹어도, 그렇게 한 치 앞을 모르고 산다.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다 아는 듯 계획하고 행동하고. 오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