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의 시대, 예술정책의 사각지대
문화예술 매거진 안티에그(ANTIEGG)에 기고한 글입니다.
얼마 전 정부가 출시한 ‘청년희망적금’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청년희망적금은 묵돈 마련이 어려운 청년들에게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적금이다. 세제 혜택을 포함하면 최대 10%의 이율이 적용된다는 입소문에 많은 청년들이 몰렸다. 선착순 가입이라는 말에 한때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문제는 지급기준이었다.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당찬 이름을 달았지만 모든 청년을 위한 적금은 아니었다. 만 34세 이하이고, 총급여액이 3,600만원 이하인 이들만 가입할 수 있었다.
출시 하루만에 ‘청년실망적금’이라는 비아냥이 나왔다. 지급기준이 모호해 많은 억울한 사례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열심히 복무한 군인은 받지 못했고 알바를 한두 번 하다가 만 ‘금수저’는 받았다. 어려움을 딛고 일자리를 구해 총급여액 기준을 넘긴 사회초년생도 받지 못했다. 분명 선의로만 가득한 정책이었지만, 어떤 청년에게는 박탈감만을 안겨준 꼴이 됐다. 정책이 목표로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이들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고민이 부족했던 탓에 지원의 사각지대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올바른 지원은 올바른 인식에서 나온다. 이는 수천년 전부터 전해져온 진리다. 마가복음에는 이런 말씀도 나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중요한 건 누가 건강한 자이며, 누가 병든 자인지 정확히 가려내는 일이다. 이 과정을 무시한다면 의원은 쓸데없는 곳에서 힘과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그만큼 의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부의 지원사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복지는 정확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복지정책들 중에서 예술 분야의 정책을 살펴보려 한다. 예술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만큼 다양한 주체들이 종사한다. 연령도, 신분도, 환경도 모두 제각각이다. 하지만 같은 예술인이라도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가 생존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정부는 누구나 평등하게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도 문제는 얼마나 정확하게 대상을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지원을 하느냐다. 예술인이자 청년, 예술인이자 장애인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리나라에는 예술인을 지원하는 정책이 있고, 청년을 지원하는 정책이 있다. 그렇다면 ‘청년예술인’들의 경우는 어떨까. 이들을 위한 정책이 따로 있을까. 만약 있다면 누가 ‘청년예술인’의 범주에 속할까. 극작가 정진세는 『숨은참조』에 실린 그의 원고¹에서 ‘서울청년예술단’이라는 이름의 사업에 자문단으로 참여했을 당시의 이야기를 전한다. 해당 사업은 서울시에서 청년예술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주관한 사업으로, 사각지대에 있는 청년예술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청년예술 정책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청년예술인들의 반발에 부딪혀 시행 3년만에 폐지됐다.
누구를 청년예술인으로 봐야 하는가. 사업을 구상할 당시 먼저 도마에 오른 문제다. 청년예술 분야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자문단은 지원대상, 곧 청년예술인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정해 공표했다. ‘단체로서 해당연도의 공공지원사업을 수혜 받지 않은 35세 이하의 예술가, 3월 기준 학부생이 아닌자, 증빙이 가능한 예술활동의 경력을 가진 자, 여타 공공지원사업의 수혜를 받지 않은 자, 예술인복지재단에 등록되지 못한 예술가.’ 이때 35세 나이를 기준으로 삼은 건 경험 축적에 따른 경쟁력의 차이가 발생하는 시기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학부생과 복지재단 등록 예술인을 제외한 건 대학이나 재단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예술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사업 설계 당시에도 청년세대와 관련된 담론은 꾸준히 나오고 있었고, 비록 일자리 정책이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청년들도 이미 정책적 범위 속으로 편입된 상태였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청년에 대한 개념 규정도 뚜렷해진 뒤였다. 하지만 청년예술의 경우에는 달랐다. 위 모집공고에서도 볼 수 있듯, 연령과 경력 등이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적으로 미숙하기에 청년예술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인가. 35세 이하와 이상을 가른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이며, 기성예술인들에 비해 미숙하다는 점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청년’과 ‘예술’ 중 어디에 방점을 찍냐에 따라 기준도 달라질 터였다. 이러한 모호함이 정책적 사각지대를 만들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과적으로 자문단의 진단은 정확하지 않았다. 자문단이 상상한 청년예술인의 이미지는 재능과 열정은 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예술계에 진입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귀결도 긴급구호성 자금을 투입해 마음껏 원하는 예술을 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정 작가도 사업이 선심성 복지정책처럼 보였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단순한 예산지원은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실익이 없었다. 청년예술인들이 바란 건 시혜성 수당이 아닌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다.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지원대상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정책실효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업이었다.
어떻게 ‘청년예술인’을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현재진행형이다. 전문가들의 오랜 고민으로도 마땅한 기준을 찾지 못한 난제다. 더 많은 담론이 쌓인다해서 뚜렷한 기준이 정립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이에 한편에서는 전문가들 역시 외부인이기에 대상을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들은 당사자, 즉 청년예술인들에게 정책 설계와 감독을 맡기자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어려움과 결핍을 가장 잘 이해하는 당사자들에게 맡겨야 정책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장애인예술원)은 장애예술인들의 예술활동을 돕기 위해 2015년 설립된 단체다. 장애인 예술활동 증진을 위한 지원사업을 벌이는데, 이때도 지원대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의하는 일이 중요한 논의점이 된다. 관련 법에 따르면 ‘장애예술인’은 ‘장애가 있는 예술인’을 말한다. 그렇다면 장애인이자 예술인, 예술인이자 장애인인 이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 때 방점은 어디에 찍어야 할까.
논문²의 저자는 예술정책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복지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으로 인해 복지정책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은 정책이 본래의 목적을 잃고 ‘장애극복’이라는 기존 복지정책의 서사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는다. ‘장애인을 비장애인 수준으로 성장시켰다’는 수준의 성과는 장애예술 정책이 목표로 하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복지적인 요소를 버리고 예술정책적인 면을 살려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그렇지도 않다. 그럴수록 기존 예술정책과의 차별점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애당초 예술인과 장애인을 위한 법이 각각 존재하는 상황에서 틈새를 메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장애예술인만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가 이유다.
법에서 말하는 ‘예술인’이란 통상 예술을 전공한 전문가들을 일컫는다. 따라서 ‘장애예술인’이라 함은, 전문적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장애인을 뜻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현행 장애예술인 지원사업은 장애인들의 작품활동 지원뿐만 아니라, 장애인 예술 접근권 등 비전문적인 예술활동을 보장하는 정책을 동시에 담고 있다. 목적이 전혀 다른 두 정책이 혼재하기에 정책의 방향이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지원사업이 ‘장애인에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식의 질적 저하를 용인하는 순간, 장애인예술인을 폄하하는 사인이 됨과 동시에 일개 복지정책으로 전락할 우려도 존재한다.
한편 장애예술과 장애인예술은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도, 이들이 혼용되고 있다는 점 역시 문제다. 장애인예술은 장애인이 창작 주체가 되는 예술로, 장애예술은 ‘장애’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 주제의식을 담은 예술로 볼 수 있는데, 정책적인 차원에서 둘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장애예술과 관련된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는 이유를 ‘장애인이 하는 예술’이 바로 장애인예술이고, 이것이 곧 장애예술이라고 보는 막연한 인식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이제는 장애인을 비장애인의 눈으로 타자화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장애예술인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만의 서사를 써내려갈 수 있도록 정책을 재편해야 한다고, 장애인예술을 넘어 ‘장애예술’의 성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답은 ‘당사자성’에 있는 듯하다.
대상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어떻게 정책의 방향을 흐리고, 지원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내는지를 살폈다. 청년과 예술, 장애와 예술의 교집합은 중복수혜의 영역이 아닌 오히려 당사자들을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영역으로 기능했다. 앞으로 더 많은 사회적 담론들로 메워져야 할 틈새들이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다. 틈새와 틈새 사이 또다른 틈새가 있다. 세 가지 특성을 모두 공유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바로 ‘장애청년예술인’들의 이야기다. (이번 장에서 레퍼런스로 쓴 논문은 앞선 논문들에 비해 다소 오래된 논문이므로 업데이트가 덜 된 부분이 나올 수 있다)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은 2014년 진행한 공모연구³에서 장애인예술정책과 청년예술정책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장애예술인정책은 복지의 측면에서 예술을 향유하도록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청년예술정책은 문화예술창작자로 성장하도록 돕는 인큐베이팅 사업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청년들은 위의 두 예술정책 중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한다고 ‘짓’은 말한다. 구체적으로 장애청년예술인들이 밀려나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청년예술 정책은 장애를 가진 청년예술인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는다. ‘짓’에 따르면 청년예술인을 위해 제공되는 교육에 장애인들은 참여하기 어려웠다. 휠체어가 전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강연 공간이 마련돼 있기도 했다. 소수 중에서도 소수에 속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묻히기 십상이다. 반면에 장애예술 정책에서 이들은 ‘규모가 크고 재정적, 사회적 자본을 비교적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기존의 장애인단체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기 쉽다. 경험적으로도 기성 장애예술인들이 앞서기에 어떻게든 가시적인 성과를 내보여야 하는 지원사업의 특성은 기성예술인들에게 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청년예술 정책에 ‘장애’에 대한 고민이 부재했듯, 장애예술 정책 속 청년은 없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짓’은 틈새를 메우는 정책의 개발을 주문한다. 요지는 어느 쪽에도 포함돼지 못한 이들에 대한 특수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청년을 위할 때 장애인을, 장애인을 위할 때 청년을 기억해달라는 부탁이다. 앞서 언급한 ‘당사자성’이 다시 떠오르는 대목이다. 위의 연구 역시 예술업에 종사하는 장애청년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논의를 발전한 연구다. 이들이 문제를 파악하는 수단을 넘어, 정책을 만들고 감독하는 주체로 거듭난다면 더 빨리, 더 많은 틈새가 메워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정부의 지원사업들은 더 다양한 주체가 예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려면 단순히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단계에서 다양한 주체의 참여를 허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더 완전한 복지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수년 전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다양한 주체들을 따뜻한 복지의 볕 속으로 끌어내고 있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귀들도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에게 가닿는 완벽한 복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각지대는 늘 만들어지고, 다만 그 그늘의 넓이를 줄이는 일이 과제로 남겨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지정책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배제된 이들은 그런 정책이 아예 없던 시대보다 더욱 좁고 어두운 고통 속으로 내몰린다. 압도적 소수가 돼버린 탓에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도, 함께 목소리를 낼 동료조차 떠났기 때문이다. 틈새가 더 좁고 깊어질수록 담론의 필요성은 커진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며 정책의 빈틈도 촘촘히 옭아매는 사람, 어두운 곳을 비추는 조명이 많아져야 한다. 이 글도 희미하게나마 그 밝기를 보탰길 바란다.
[참고문헌]
· 정진세, 『숨은참조』, 청년예술을 폐기하더라도,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0
· 전지영, 장애예술과 장애인예술의 개념 논의, 한국예술연구, (32), 195-215, 2021
·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 장애청년예술정책: 욕망과 표현을 위한 실천과 정책론, 청년허브, 2014
WEEKLY PUBLICATION NO.12
EDITOR TER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