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장난감,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오늘은 어린이날인데, 날씨가 좋지 못해 아쉽습니다. 비는 종일 이어지겠고요, 오후에 접어들면 좀 더 강해지면서 요란하게 내리겠습니다...
올해 어린이날, 어린이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큰 비가 내리며 어린이날 행사가 대거 취소됐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갈 곳 잃은 가족들은 비슷한 처지의 가족들이 붐비는 실내로 향해야 했다. 수십만 원씩 웃돈을 주고 실내 행사 자리를 구해야 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마저도 안 되면 집에서 온종일 과자와 장난감을 바치면서 아이들을 달래야 했다. 애꿎은 날씨로 인해 모두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어린이날 하면 빠질 수 없는 게 장난감이었다. 수 년 전만 해도 어린이날 전날마다 부모들의 '오픈런'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장난감의 미래는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만큼이나 어두워 보인다. 장난감을 원하는 어린이들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어린이(5~13세)는 올해 374만 3000명에서 10년 뒤 227만 8000명으로 약 150만 명이 줄어든다. 집계 이래 어린이가 가장 많았던 1970년대(약 840만 명)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그 당시 모든 어린이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늘어난 장난감 인프라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장난감의 위기는 한때 ‘아이들의 천국’이었던 종로구 창신동 문구·완구 거리에 여실히 드러난다. 목격담을 종합하면 완구 거리에 어린이는 없고, 향수를 좇아 들어온 성인들이나 궁금증에 들러본 외국인들이 전부라고 한다. 그나마 오는 방문자들도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게 더 싸다 보니 둘러만 보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경기 불황이 심화된 탓인지 아이들을 돌보는 교회나 보육원의 단체 주문도 예전만큼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장난감의 역사는 마침내 종말을 맞게 될까. 상황이 안 좋은 건 맞지만, 아직 단정은 이르다. 장난감을 찾는 새로운 부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장난감을 찾는 어른들, 이른바 ‘키덜트(키즈+어덜트)’를 겨냥한 시장은 매년 꾸준히 규모를 불려가고 있다. 특히 피규어 분야의 성장이 두드러지며, 최근엔 예술의 한 형태로 진화한 ‘아트토이’를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장난감 업체들은 다른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키덜트와의 접촉면을 늘려가고 있다. 실제 한 영화와의 콜라보로 탄생한 완구 매출의 절반이 3040으로부터 나왔다는 통계도 있다.
장난감은 위기를 딛고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까. 이번 아티클에선 장난감의 미래를 엿보기 위해 그동안 장난감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한 시대를 풍미한 장난감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차례로 살펴보려 한다. 아직 남은 페이지수를 알 수 없는, 장난감 종말일기다.
역사상 최초의 장난감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장난감은 첫 번째 아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겠지만, 당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대 이집트의 어린이들은 상아, 점토, 나무, 청동, 금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공과 팽이, 동물 인형 등 장난감을 갖고 놀았으리라 추정된다. 이 중에서도 제일 전형적인 장난감은 ‘공’이었다. 이집트 아이들은 파피루스 갈대를 묶어 만든 공이나 나무로 만든 공을 갖고 놀았다. 켈트족 등 원시부족에서는 양이나 염소의 방광을 공으로 사용했으며, 고대 일본에서는 끈을 묶어 공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장난감은 팽이였다. 나무와 돌로 만든 단순한 형태로, 손으로 돌리는 방식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채찍으로 돌리는 팽이는 고대 중국 또는 일본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물을 본 뜬 장난감도 많았다. 이동 수단으로서 말이 중요했던 딩시였던 만큼 말 장난감이 제일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단순한 모형 수준이던 말 장난감은 금세 바퀴를 달고 움직이는 형태로 진화한다. 당시 기록에서는 움직이는 턱을 가진 악어 장난감도 발견된다. 인형도 있었다. 고대에는 종교의식을 위해 사용하던 인형이 따로 있었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인형들은 대개 그런 용도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들의 무덤에서 인형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더러, 아이들이 신비에 싸인 물건을 갖고 노는 걸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형태가 잘 보존된 인형들은 점토로 만들어진 인형들이며, 납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연이 유행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같이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중국의 한 장군이 연에 몸을 묶고 하늘로 올라가 적진까지 거리를 쟀다고도 한다. 중국에는 연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장난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그림 속 아이들이 북, 목마, 꼭두각시 인형 등 장난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장난감은 소민-쇼라이(Somin-Shorai)로, 악령을 물리치기 위한 방추형 목각 인형이었다고 한다. ('신이 말하는 대로' 등 영화에도 종종 등장하는 장난감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아이들의 신체적 기량이 얼마인지 가늠하고, 그 기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장난감이 사용됐다. 군인의 형상을 한 목각·점토 인형이나, 트로이의 목마 등 전쟁용 무기를 아이들 수준에 맞게 축소한 것들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이런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군인을 동경하고, 전쟁의 전략전술을 미리 접할 수 있었다. 로마에 ‘인형의 집’이 있었다는 설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용하기 힘든, 미니어처 가구들이 발견돼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고 한다. 훌라후프도 이때부터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리스인들은 주로 청동으로, 로마인들은 철쇠로 만든 후프를 돌렸다고 한다.
중세로 넘어와선 장난감뿐만 아니라 장난감 제조업자의 흔적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아이들의 필요에 맞게 장난감이 만들어진 건 아니다. 여성들의 지위마저 낮았던 중세에 어린이들의 필요는 더더욱 관심 밖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쟁이 잦았던 만큼 교육도 거칠어, 장난감은 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위험한 형태를 띄었다. 그마저도 사치품이 부족했던 시기였으므로 장난감이 많지 않았으며, 전쟁으로 불태우고 약탈하는 일이 잦아 온전한 형태로 남기도 어려웠다. 보존된 최초의 중세 시대 장난감들은 점토로 만들어진 인형들이었으며, 보통 무덤들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중세에서 새롭게 발견된 장난감은 풍차였다. 장난감들의 형태는 시대 변화에 따라 진화한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팽이, 호루라기, 단순한 형태의 구슬 등이 있었으며, 이전 시대부터 전해내려온 훌라후프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인형이 무역으로 거래됐다는 것은 중세 시대의 분명한 특징 중 하나다. 당시 유럽에서 무역이 활발해지며 행상인들은 집에서 만든 장난감을 매고 세상을 누비며 팔았다. 장난감이 유통될 수 있는 기회는 광범위해졌다.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장난감과 장난감 산업은 번창하는 무역 속에서 큰 발전을 이뤘다.
장난감은 14세기 르네상스 시기부터 눈부신 발전을 이룬다. 하지만 르네상스 정신이 어린이 놀이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건 아니기 때문에 ‘르네상스 장난감'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한다. 이 시기 장난감은 더 견고하고, 기능적이며, 교육적인 형태로 진화한다. 또 중세에는 단두대 등 잔인한 장난감에 대해 어른들의 제재가 있었지만, 이때는 그렇지 않았다.
남독일의 도시들이 새롭게 장난감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점차 장난감 제조 허브로서 뉘른베르크의 우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당시 뉘른베르크 장난감 제조업자들은 길드를 만들어 각자의 역할 분담을 명확히 했다. 가령 장난감 칠은 페인트공들만 할 수 있고, 장난감 의자는 의자 장인들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규제는 남독일의 장난감 산업을 옥죄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장난감이 비싸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을의 장인들은 값싼 다른 도시와 경쟁하기 위해 장난감의 품질을 높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퀄리티의 목각 장난감을 내면서 남독일은 ‘장난감 중심지’로서 입지를 탄탄히 다졌다. 지금도 독일의 마을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형태의 인형의 집 역시 이 시기부터 발견된다. 하지만 정확히 독일에서 왔는지 네덜란드에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초기 인형의 집은 아이들이 갖고 놀긴 어려울 만큼 웅장하고 섬세한 스케일을 자랑했다. 아이들 놀이에 사용된 최초의 인형의 집은 1558년 한 공작이 딸을 위해 만든 인형의 집이었는데, 그림은 없고 목록으로만 존재한다.
18세기에 이르며 장난감 세계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아이들의 진정한 필요와 취향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이 직접 타고 놀 수 있는 ‘흔들마’가 등장했고, 끈으로 팔다리를 조종할 수 있는 인형은 어른들도 즐겼다. 아바타 옷 입히기 게임처럼 종이로 드레스를 붙였다가 뗄 수 있는 장난감도 발명됐다. 18세기 장난감 제조업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하면 인형의 집의 완성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인형의 집들은 ‘너무 완전해서 아이들의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하지 못한다’라는 비판을 들을 정도였다. 다만 너무 비쌌기 때문에 일부 상류층만의 특권이었다고 한다.
움직이는 장난감(오토마타)도 근대를 지나며 탄생·발전한다. 장인들은 시계에 들어간 자동 장치를 활용해 오토마타 장난감을 만들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신학자들은 악마의 도구라면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장난감 기계’ 발명은 계속됐다. 오토마타와 관련해선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예를 들어 루이 14세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동료들로부터 자동 마차를 받았는데, 장난감을 시연하는 자리에서 모형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말들이 너무 현실적으로 앞으로 나아가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이 겁에 질려 도망을 갔다고 한다.
위대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이 단지 고도로 발달된 기계일 뿐이라는 그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어린 소녀의 형상을 오토마타로 만들었다. 데카르트는 모형을 완성한 이후 항해에 나섰는데, 선장이 실수로 모형을 움직이게 했고, 놀란 데카르트는 모형을 배 밖으로 던지며 악마의 발명품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인형들이 너무 독창적으로 고안되어서 누르거나 감으면 생기를 띠게 되고 원하는 대로 저절로 움직인다' '숨겨진 시계 장치로 동작을 보여주는 비싸고 기발한 인형'이란 평가가 남아있다.
하지만 오토마타는 본질적으로 왕자나 권력자를 위한 사치스러운 장난감이어서 매우 비쌌으며, 움직이는 장난감에 대한 일반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19세기엔 저렴한 완구에 대한 욕구가 점차 커졌고 이에 따라, 간단한 오토마타 장난감이 많이 나타났다. 모래를 흘려보내는 힘으로 작동하는 장난감 등이 대표적이다. 말하는 장난감이 개발되기도 했는데, 대량생산은 어려워 보통 전시만 되고 말았다고 한다.
산업 혁명 이후로는 기술 발전에 맞춰 장난감 기차들이 등장했다. 마차나 열기구 장난감도 발명됐다. 다만 건전지가 보급되고 가정용 전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지 전까진 미니 증기기관으로 구동되는 장난감이 많이 나왔는데 아이들에게 위험하다며 부모들은 금지했다고 한다. 19세기는 ‘아기 인형’이 처음 등장한 시대이기도 하다. 인형의집도 18세기의 웅장함을 내려놓고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장난감으로 변했다. 당시 사람들의 주거형태에 맞게 사이즈는 줄어들었고, 집 안에 놓이는 장식품들은 더 정교해졌다.
현대로 넘어와선 각국의 장난감 산업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무역이 줄었기 때문이다. 독일 장난감은 압도적인 품질을 자랑했지만 미국의 엄마들이 다 부쉈다고 한다. 일본의 값싼 장난감도 설자리를 잃었다. 점차 장난감 산업은 패권국인 미국으로 옮겨갔다.
뉴욕 장난감 박람회가 처음 개최된 건 1931년이다. 그전엔 미국 장난감 95%가 집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전쟁 기간 늘어난 공장을 중심으로 장난감들이 대량 보급이 되기 시작했고, 모든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동안 아이들은 어른들이 임의로 만든 장난감을 바탕으로 창의성과 인내심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었으나, 장난감이 과잉 보급되기 시작하며 어른들은 진정으로 아이들이 어떤 장난감을 원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전 세계에 퍼진 뒤로는 장난감의 교육적인 측면이 강조됐다.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놀이도구를 갖고 놀며 감각을 발달시키고 정신 발달을 이뤄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다. 시소, 갈고리, 무게 추 등 기존 장난감들과는 다른 형태의 장난감들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자 했다. 또한 장난감들의 화려함보다는 내구성과 나이에 맞는 특성이 강조됐다. 이로써 장난감을 바라보는 시각은 둘로 나뉘게 됐다. 아이의 발달을 돕는 교육 장치로서 장난감을 이용해야 한다는 입장과 장난감은 상업적인 물건일 뿐이며, 굳이 건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 이 두 진영이 맞물리며 오늘의 장난감 시장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아이들의 관심은 서부 세계, 현대 군인, 우주 등으로 번져나갔다. 이후로 장난감의 다양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해 어떤 특징을 정의 내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장난감들 중 일부를 살펴보며 장난감의 발전사를 엿보는 수밖에 없다.
바비의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당시에도 장난감은 있었지만 대부분 남자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었고, 여자아이들은 옷이 그려진 판자 조각을 잘라 아바타 위에 붙이며 노는 게 전부였다. 이마저도 모든 여자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인형이 있긴 했다. 아기 모양의 인형들이었는데, 문제는 이런 장난감을 갖고 놀 때 여자아이들의 역할은 엄마, 해봐야 보모 역할에 한정됐다는 점이었다. 여자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형은 없을까 고민하던 핸들러 부부(‘마텔’ 창업자)는 가족여행차 방문한 스위스에서 퇴폐 여성을 모티프로 한 성인용 장난감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바비의 초기 모델을 개발한다.
마텔의 남자 직원들은 바비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아이들이 왜 이런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는 인형을 좋아할지, 과연 미국의 엄마들이 이걸 허락할지 회의적이었다. 마텔은 1959년 정식으로 바비를 출시하고, 뉴욕 장난감 박람회에 출품했다. 하지만 심사위원 등 박람회 관계자들도 대부분 남자였고, 마찬가지로 바비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박람회 실패 후 도산 위기에 처한 마텔. 이때 한 정신과 의사가 구원투수로 등판해 마텔의 홍보 전략을 통째로 바꿨다. 단순히 역할극을 하며 갖고 노는 장난감을 넘어, 여자아이들이 동경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전략이었다.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한편 엄마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당시 엄마들이 두려워하던 지점, 즉 자신의 딸이 좋은 신랑감을 얻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을 공략했다. 딸이 바비 인형을 갖고 놀며 보다 완벽한 숙녀로 성장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전략을 바꾼 이후 바비 인형은 대성공을 거둔다. 마텔은 ‘완벽한 숙녀’의 이미지를 더욱 교묘하게 주입해 나간다. 바비 인형 소품으로 50kg에 바늘이 고정된 미니어처 체중계와 몸무게를 줄이는 법 관련 미니어처 책자 등을 집어넣어 판매했다. 자신도 바비처럼 매력적인 여성이 되고 싶다는 여자아이들의 환상을 보며 엄마들도 만족했다. 1961년에는 ‘바비에게도 남자친구가 필요하다’는 요청에 붉은 수영복 바지를 입은 켄(바비와 켄은 모두 핸들러 부부 자녀들의 이름에서 따왔다)이 출시됐다. 또한 1960년대부터 우주비행사, 간호사, 테니스 선수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버전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직업이 제한적이던 당시 바비는 ‘너희들도 모든 걸 이룰 수 있어’라는 새로운 꿈을 불어넣는 매개체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바비의 외형은 시대의 유행에 맞춰 변화를 거듭했다. 1970년대 ‘말리부 바비’와 ‘슈퍼스타 바비’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80년대 ‘록스타 바비’와 1990년대 ‘긴 머리 바비’가 대히트를 쳤다. 중간에 대표가 해임되는 위기를 맞고, 여성에 대한 편견(바비가 "난 수학을 못해요"라고 말하는 광고 카피)을 드러냈다는 등의 논란도 터지고, 경쟁자들의 도전도 받았지만 마텔의 바비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바비의 마지막 대격변은 2016년 ‘바비는 우리처럼 생겨야 한다’는 모토 아래 만들어진 ‘패셔니스타 바비’로, 키와 몸무게, 인종을 제각각으로 만든 새로운 바비들이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는 중이다.
물론 시중에 장난감이 범람하게 된 오늘, 바비 인형을 찾는 아이는 많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마텔의 바비는 한 시대를 풍미하며, 모든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상상력을 불어넣고, 굳어있던 사회의 틀을 깨는 데 일조했다. 어쩌면 모든 장난감 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장난감이 아닐까 생각하는 이유다.
전 세계 모든 아이들이 한 번쯤은 갖고 놀았을 블록 장난감 ‘레고’는 건축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덴마크의 빌룬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유래했다. 마을 농장에서 집을 짓는 일을 하던 한 목수는 경제 대공황으로 건축 사업이 망하자, 작은 가구와 목재 장난감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장난감 쪽 매출이 전체 매출을 책임질 정도가 되자 1934년 장난감 사업으로 완전히 전향하기로 한다. '빌룬 목재 공장'이라는 상호명을 버리고 ‘잘 논다’는 뜻의 덴마크어 ‘레그 고트(LEG GODT)’에서 글자를 따와서 레고를 만들었다. 이름의 의미에 따라 ‘아이들이 잘 놀게 돕는다’는 모토를 회사의 목표로 정했다.
독일산 장난감이 판치던 당시 덴마크에서 레고는 국산 제품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또 철제 장난감들 속에서 몇 안 되는 목재 제품이라는 점도 매력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1940년대 들어 수요를 감당할 만큼의 목재가 공급되지 않았고, 설상가상 공장이 불 타 없어지면서 레고는 큰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레고는 위기를 계기로 플라스틱이라는 재료를 발견하고, 1949년 우리가 잘 아는 형태의 레고 출시한다. 물론 최초로 자동 결합 블록을 만든 건 레고가 아니었다. 영국에서 만든 '키디크래프트'가 있긴 했다. 하지만 레고는 몬드리안 등의 작품을 참고해 형형색색 레고를 만들어 칙칙한 영국 블록 장난감과 차별화를 이뤄냈다.
레고는 1950년대 종합세트인 ‘타운 플랜’을 발표하며 점점 인기를 끌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결합이 잘 안되고 내구성이 떨어지며, 레고 블록으로는 만들 수 없는 완제품이 많이 포함돼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1958년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래고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 중 하나인 ‘블록 튜브’ 기술을 발명하고 특허를 받는다. 원래 레고 블록은 아래쪽이 텅 비어있었는데, 위아래로 맞물리는 틀을 넣어 흔들림 없이 결합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단 몇 개의 블록으로도 9억 가지의 튼튼한 조합을 만들 수 있게 됐고, 이는 아이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부족함 없이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폭발적인 성성장을 이룬 레고는 1961년 11개 국가에 50가지 제품을 판매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레고의 마스코트인 '레고랜드'도 이때 처음 탄생했다.
문제는 미국 시장이었다. 미국 아이들은 1960년대까지 이런 장난감에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레고는 부모들을 공략했다. 당시 부모들은 전쟁을 연상케 하는 장난감(헬리콥터 등)에 큰 반감을 보였는데 레고는 ‘평화로운 장난감’이란 프레임을 앞세워 미국 시장을 점령해낸다. 그 뒤로 이어진 1970년대는 대호황기였다. 레고의 수출량이 덴마크 전체 수출량의 1%를 차지할 정도였다. 1978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 형태의 ‘미니 피규어’가 출시됐다. 지금은 40억 가지가 넘는 형태가 존재한다고 하는데, 처음 출시 당시 형태와 다르지 않다.
1970년대 레고는 역대 가장 매력적인 시리즈로 꼽히는 '레고 스페이스' '레고 캐슬' 시리즈를 잇따라 출시한다. 각각 우주와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들이었다. 그때에도 전쟁 장난감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었기에 처음엔 성벽을 노란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레고 시티' 시리즈 역시 아이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1980년대 레고의 흑자는 계속 늘어났고, 빌룬은 레고 마을로 성장했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레고의 특허권이 만료되며 위기가 찾아왔다. 전 세계가 레고를 베끼려고 달려들었다. 레고는 로봇 구동 장치와 블록을 결함해 엘리베이터 등을 구현하는 '레고 마인드스톰' 시리즈를 출시했지만, 교실에서만 사용되고 말았다. 모방꾼들은 레고와 판박이로 똑같은 장난감을 만들었다. 레고 매장 옆에는 항상 50% 낮은 가격으로 똑같이 생긴 장난감을 판매하는 매장이 생겨났다고 한다. 레고는 1998년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고, 수천 명을 정리해고했다. 빌룬 마을에는 닥친 크나큰 암흑기였다.
1990년대 후반 레고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단순히 블록 장난감만 팔다간 도태할 거란 사실을 인정했다. 과감한 시도를 하기로 했다. 1999년 스타워즈를 테마로 한 시리즈를 냈다. 기존 블록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호환성을 높였다. 영화와의 협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듯했지만 되려 레고는 큰 손해를 안게 된다. 영화가 상영될 땐 장난감을 적게 만들고, 영화가 없을 때 오히려 많이 만드는 등 수요예측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장난감은 잘 만드는데 시장 변화를 읽어낼 줄 몰랐던 것이다. 레고는 이후 다양한 시도들을 실패하며 완전한 암흑기에 접어든다. “이건 레고가 아니야!” 정체성도 잃고 매출도 잃은 2000년대에는 모든 게 끝난 듯했다.
절벽 앞에 선 레고는 ‘레고 바이오니클’을 출시했다. 이번에도 전통적인 블록 장난감은 아니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악을 무찌르는 ‘스토리’와 ‘세계관’을 추가한 게 성공 요인으로 꼽혔다. 레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계관을 토대로 책과 비디오게임,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도 레고 ‘순수주의자’들은 반기지 않았다. 블록을 활용한 ‘레고 다운 레고’로 돌아가기 위해 순수파들은 해리포터 시리즈를 출시하는 등 반전을 꾀했지만 2003년과 2004년 상반기 영화가 나오지 않으며 판매량이 곤두박질쳤다. 레고는 수요예측 실패로 파산 직전 위기에 내몰렸다. 마텔에 사람을 보내 레고를 살 생각이 있는지 물을 정도였다.
한 번 더 레고는 혁신한다. 2004년 CEO가 사퇴했고, 레고랜드를 팔았다. 해외 공장 이전해 제조원가를 줄였다. 모양과 색상을 줄이면서 생산라인과 제조라인을 단순하게 바꿨다. 진정한 가치는 과거에 묻혀 있다는 걸 알고, 다시 레고 블록에 집중했다. 실제 모습과 비슷하고, 5살짜리도 쉽게 만들 수 있는, 친근한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간단함에 집중하며 변화에 발을 맞추는 동시에, 세계관을 구축하는 작업에도 많은 품을 들인다. 레고는 서서히, 단단하게 인기를 회복해간다. 2014년 레고 영화가 전 세계 영화관에서 상영된 건 부활을 방증하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레고는 다시 세계 최대 장난감 회사로 단단히 자리매김했다.
정상에 오른 레고의 최우선 가치는 처음 회사가 설립했을 때로부터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더 잘 놀 수 있게 돕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미래를 상상하고 그려나갈 수 있게 돕는다는 목표였다.
미국 장난감 기업 ‘반다이 아메리카’가 만들던 건 색분필이었다. 직원은 30명도 되지 않았다. 이런 기업이 어떻게 20세기 장난감 역사를 뒤바꾼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시작은 일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워레인저가 탄생하기 전인 1970년대, 일본에선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TV프로그램이 이미 난립하고 있었다. 고질라 등 다양한 괴물을 특수효과로 넣은 특수촬영(토쿠사츠) 영상물이 인기였다. 괴물에 대항하기 위한 슈퍼히어로들도 잇따라 탄생했다. 최초의 변신 영웅인 가면라이더도 이때 나왔다.
토에이 스튜디오(가면라이더 제작사)는 TV프로그램 성공 직후 장난감 회사를 찾아간다. 50년대부터 장난감을 만들던 ‘반다이 재팬’이었는데, 반다이 재팬은 이전부터 품질 좋은 거대 로봇 장난감을 만들고 있었다. 반다이와 토에이는 최강의 짝을 이룬다. 특히 버튼을 누르면 빛을 내며 돌아가는 ‘가면라이더 변신 벨트’로 대히트를 친다. 가면라이더의 성공을 본 토에이는 팀이 필요하다고 판단, 5~6명의 영웅들이 팀을 이루는 ‘센타이(전대)’를 만들었다. 형형색색 수트와 가면이란 형태는 파워레인저와 비슷했지만, 당시만 해도 파워레인저의 상징인 ‘거대 로봇’은 없었다. 1970년대 후반 반다이와 토에이는 고민 끝에 거대 로봇을 출시했다. 시도된 적 없는 과감한 도전이었지만, 다행히 일본 아이들은 멋지다고 생각했다.
반다이와 토에이는 이어서 ‘슈퍼전대’ 시리즈를 탄생시킨다. 슈퍼전대 시리즈 역시 가면라이더 시리즈와 같은 하나의 세계관으로, 보다 어린아이들을 타겟으로 제작됐다. 마블은 일본의 슈퍼전대 시리즈 중 하나인 '태양전대 선발칸'을 각색해 미국 아이들에게 선보이려 했지만, 미국의 아이들이 일본의 못생긴 괴물을 좋아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시리즈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생각한 직원들은 의기투합해 알아서 더빙을 하고 방송 견본을 만들어 방송사로 올렸다. 임원들은 “바보 같고, 폭력적이고, 싸구려 같다”면서 이들을 쫓아냈다.
한편 이 시기 일본 반다이도 실적 악화로 새 시장 루트를 뚫기 위해 고심 중이었다. 반다이 아메리카를 만들고 장난감을 미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한다. 반다이 아메리카는 1982년 일본에서 역대 히트를 친 브랜드를 하나로 묶은 ‘고다이킨’ 장난감을 내놓았다. 80년대 슈퍼전대 시리즈로 나온 장난감들도 다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당시 미국 아이들이 접했던 친근한 로봇들과는 모양이 너무 달랐다는 점이었다. 관련 TV프로그램이 없었고 값도 70달러로 매우 비싼 편이라 잘 팔리지 않았다. 당분간은 분필을 만들어서 팔 수밖에 없었다.
방송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지만, 슈퍼전대 시리즈물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또 있었다. 파워레인저의 주제가를 만들기도 한 유대인 ‘하임 사반’은 1984년 토에이로부터 슈퍼전대 시리즈 판권을 따낸 뒤 미국 방송사들을 돌아다니며 영업을 했다. 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으니 일본에서 찍은 영상에 미국에서 찍은 영상만 덧붙여 시리즈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8년간 퇴짜만 당했고, 이번에도 무산이 되는 듯했다.
사반은 1992년 폭스 어린이 방송 쪽에 컨택을 했는데 마침 마블에서 슈퍼전대를 수입하려 했던 직원이 이쪽을 담당하고 있었다. 폭스 직원은 ‘안 먹히면 해고’라는 조건으로 겨우 견본 영상 제작비를 받아냈다. 이들은 우선 토에이의 가장 최신의 슈퍼전대 시리즈인 ‘주레인저’ 영상을 받아왔다. 제작 과정에서부터 온갖 무시를 받는 등 난항을 겪자, 결국 깐깐하기로 소문난 비평가들인 ‘어린이’들에게 보여주며 정면 승부를 건다. 결과는 대히트. TV프로그램의 성공을 확신한 폭스는 반다이 아메리카에 장난감을 의뢰했다.
장난감 제작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91년 일본에선 이미 주레인저가 방영되면서 좋은 퀄리티의 장난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운송해서 팔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만 이름이 다 일본어로 돼 있어 미국화를 위해 모든 이름을 다시 지어야 했다. 강하고 초현실적인 이름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중, 한 직원이 ‘파워레인저’를 외쳤다. ‘마이티 모핀 파워레인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장난감 문제는 해결됐지만, 아직 TV프로그램 방영이 남아있었다. 폭스 계열사들은 전과 같은 이유로 파워레인저를 방영하지 않겠다고 했고, 결국 장난감 수익의 일부를 제공하는 식으로 참여를 이끌어내야 했다. 방송 업계에선 전례 없는 계약이었다. 파워레인저는 1993년 8월 28일 아침 7시 30분 미국 전역에 송출된다. 결과는? 곧바로 히트를 치고 동시간대 프로그램을 모두 초토화시키며 1위를 차지했다. 대도시에서 거대 로봇과 영웅들이 싸운다는 설정은 애당초 아이들이 안 보곤 못 배기는 것이었다. 특히 히트를 친 건 합체에 합체를 거듭할 수 있는 ‘메가조드’ 로봇이었다. 곳곳에서 품절 대란이 빚어졌다.
마이티 모핀 파워레인저의 성공으로 반다이의 급이 상승했고, 해즈브로, 마텔 등 대형 장난감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이르렀다. 파워레인저는 어렵게 차지한 왕좌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가슴 쪽 버튼을 누르면 머리가 자동으로 변하는 장난감 ‘오토모핀 헤드 피규어’는 파워레인저 역사상 가장 판매량이 많은 장난감이 됐다. 파워레인저는 정상에서 3년간 군림하지만, 일본에서 소재가 고갈되며 위기가 찾아온다. 그린레인저, 화이트레인저를 잇따라 도입하는 등 대응했지만, 이 역시 오래갈 수는 없었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영상이 줄어들며 계속 같은 영상을 사용하는 일이 많아지자, 슈퍼 전대 시리즈로 새로운 전략을 짜기로 한다.
전략이란, 가면 형태만 달리한 파워레인저 전대를 출시하기로 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다른 전대 관련 영상은 풍부했기 때문에 영상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파워레인저는 그렇게 왕좌를 지켰고 1996년엔 전 세계 총 80개국에서 방영되기에 이른다. 그 뒤로는 또다시 암흑기에 접어든다. 자동차를 건드렸다가 트랜스포머에 혼쭐나기도 하고, 어린이를 파워레인저에 포함했다가 많은 아이들이 등을 돌리게도 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시리즈를 내며 반짝 반등하기도 했지만 파워레인저는 점점 인기를 잃어갔다. 디즈니가 2001년 폭스 패밀리를 통째로 인수해버리며 시리즈 역시 디즈니의 손에 넘어가고 만다.
한 시대를 풍미한 파워레인저는 디즈니로 넘어간 뒤 장난감 품질과 판매량이 급감하며 애물단지 신세가 되고 만다. 결국 디즈니는 입찰을 통해 파워레인저를 되팔기로 했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다시 하임 사반에게 헐값에 돌려주게 됐다. 다행히 애정을 가진 사반은 모든 걸 예전으로 되돌렸고, 수익도 서서히 돌아왔다. 이재는 시간이 지나 파워레인저를 보면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서 이들을 겨냥한 작품을 내놓고 있다.
한국에도 이런 ‘대박’ 장난감이 있다. 국산 로봇 애니메이션 중 가장 많은 장난감을 판매한 ‘변신자동차 또봇’ 시리즈다. 2000년대 일본 반다이 ‘파워레인저’를 필두로 해외 장난감 기업의 전쟁터였던 국내 시장에 ‘또 하나의 로봇’인 또봇이 출사표를 던졌다. 또봇을 만든 ‘영실업’은 당시 국내 대기업에 도움을 요청했고. 기아자동차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영실업은 기아자동차 모델을 바탕으로 변신로봇 장난감과 또봇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그렇게 2009년 ‘또봇X’가 세상에 나오게 됐다.
2013년 크리스마스에 전통 강호 ‘레고’를 제치고 완구 매출 1위로 올라선 이후 10년 넘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또봇의 성공 비결은 앞서 본 해외 장난감들과 마찬가지로 TV프로그램 성공에 있었다. 특히 대도시에서 주인공들이 협업해 거대 악을 무찌른다는 구조는 파워레인저의 성공 공식과 닮아있다. 워낙 다양한 시리즈를 내는 탓에 장난감도 자주 바뀌며 등골 브레이커가 됐다는 건 비밀. 영실업은 또봇으로 큰 히트를 쳤지만, 단종된 장난감을 재판매하지 않아 초창기 모델을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물론 실수도 많았다. 애니메이션과 똑같은 로봇을 재현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실제로 장난감을 변신시키는 방법이 매우 복잡했다고 한다. 제작사 직원들과 로봇 공학도들도 매뉴얼을 뒤적이면서 헤멜 정도였다고. 이 밖에도 여러 우여곡절을 경험한 또봇이지만, 현재는 전 세계 58개국에 장난감을 수출하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올해 2월 원조 멤버들이 등장하는 ‘또봇: 대도시의 영웅들’을 론칭, 지난달 3차 사전 판매도 진행하는 등 순항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한 시대를 풍미한 국내외 브랜드 장난감들을 살펴봤다. 흥망의 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성공의 열쇠는 어린이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수익을 추구한 회사는 실패했고, 다시 원점부터 아이들에게 묻고,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한 게 무엇일지 고민한 회사는 성공했다. 공통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장난감 회사에는 비전이 있었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잘 놀 수 있도록 돕겠다는, 또는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겠다는 비전 등등.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를 했다는 점 역시 모든 성공한 장난감 회사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었다.
장난감의 역사를 따라가봤다. 지극히 단순한 형태였던 고대 장난감부터 첨단 로봇 기술과 결합되기도 하는 현대의 장난감들까지. 장난감에는 당시의 세태가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고, 장난감이 다가올 시대의 모습을 바꿔놓기도 했다. 중심에는 늘 어린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빅히트 장난감’의 탄생을 종종 목도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매년 장난감 시장규모는 줄어들고 있다. 장난감 기업들은 키덜트들을 향해 자세를 고쳐앉고 꾸준히 신호를 보내고 있다. 어른들의 향수와 수집욕을 자극하며 거대한 시장을 개척해가고 있다. 장난감의 부활을 점치는 이들도 많다.
정말 어른들을 공략할 수 있다면 장난감의 미래는 밝을까. 역사에 비춰봤을 때 대답은 ‘글쎄’다. 쫄쫄이를 입은 사람들이 괴물을 무찌르는 영상을 들고 8년 동안 방송사 문을 두들기는 끈기와 플라스틱 조각에 로봇을 결합시키는 혁신은, 중심에 어린이를 두지 않고 수익만 바라서는 나올 수 없었던 결과물이지 않을까.
장난감은 세계를 담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주입한 세계관은 이들이 자라면서 우리의 세계가 되고 만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난감은 그렇게 세상을 바꿀 힘을 갖고 있다. 우주비행사 바비를 갖고 놀던 아이들이 자라나 공고했던 남성 중심 사회의 틀을 깨부쉈듯이 말이다.
장난감에 관해 읽던 중 발견한 인상 깊은 글이 있다. 숙명여고 여학생이 1950년에 쓴 ‘어린이와 장난감’이라는 짧은 논문인데 뭇 아이들이 장난감을 만질 수 없던 시절에도 고민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어린이와 장난감에 관한 고민은 늘 현재 진행형으로 남을 것이다.
“어떤 장난감이든 한없이 창조의 재료로서 상상의 세계에서 아이들을 놀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싸서 쉽게 갖기 힘든 장난감, 값은 만만해도 교육적이지 않은 장난감 또는, 어린이가 흥미를 갖는 장난감. 이 평형을 어떻게 잡을 건지가 우리에게 남겨진 큰 숙제다.”
[참고문헌]
· Antonia Fraser, A history of toys, Spring Books, 1972
· Brian Volk-Weiss, The Toys That Made Us, Netflix, 2017
· 한겨레, 지친 마음 한구석에 ‘고길동’이 찾아올 때…‘어른이’는 지갑을 열어(2022-05-27)
· 한국경제, 30년째 내리막 완구산업, 캐릭터로 '부활 희망가'(2021-02-02)
· 에너지경제, 완구 부활의 원동력은 집콕족·콘텐츠 증가 덕분(2021-02-04)
· 쿠키뉴스, [나는 ‘어른이’다] “수백만원 장난감? 없어서 못구해요”(2022-09-01)
· 서울경제, 영실업, 변신 자동차 로봇 애니메이션 ‘또봇: 대도시의 영웅들’ 론칭(2023-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