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안티에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우주 Feb 14. 2021

무엇이 예술인가

BOUNDARY OF ART


문화예술 매거진 안티에그(ANTIEGG)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antiegg.kr/9659/



BOUNDARY OF ART :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



5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고등학생이 자신의 안경을 작품인 척 바닥에 벗어두고 관람객들의 반응을 실험했는데, 모두가 속아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관람객들은 안경을 보며 심오한 작품이라는 듯 머리를 끄덕였고, 바닥에 엎드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종종 회자되곤 하는 이 ‘웃픈’ 해프닝은 현대미술에 대한 회의를 넘어, ‘예술과 비예술을 나누는 경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반세기 전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기자인 오케 악셀손(Åke Axelsson)은 동물원의 침팬지에게 붓과 물감을 주고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괜찮은 그림들을 모아 ‘피에르 브라소(Pierre Brassau)’라는 가상의 화가를 내세워 ‘침팬지 개인전’를 열었습니다. 당시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을 초대했는데, 아무도 침팬지가 그린 그림이라는 걸 눈치 못 챘을뿐더러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극찬을 했다고 합니다. 평론가들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겠지만, 그 전에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한 번 맞춰보길 바랍니다. 아래 두 그림 중 과연 무엇이 인간의 그림이고 무엇이 침팬지의 그림일까요?



정답은, 둘 다 아닙니다. 놀랍게도 두 그림 모두 피에르의 작품입니다. 어떤가요? 이 정도면 침팬지의 그림도 예술로 인정해줄 만 하지 않은가요? 이처럼 현대 미술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도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중요했습니다. 아니, 이 질문은 예술사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대마다 예술가들이 답을 제시했습니다만, 시대가 달라지며 정답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문도 꾸준히 발전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경계선을 긋는 건 오직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몫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원주의와 예술의 난해함이 극한으로 치달은 오늘날엔 어떨까요? 보편적인 답을 내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젠 예술을 소비하는 여러분이 직접 답을 내릴 차례입니다.


Pierre Brassau


아래는 예술에 갓 입문한 에디터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짚어가는 과정입니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수준이지만 너그럽게 봐주었으면 합니다. 이 글에선 오래 전 비슷한 고민을 했던 예술사상가들의 입을 빌려 예술의 경계를 살펴볼 것입니다.



I. 평가적 의미에서의 예술



예술 :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먼저 국어사전의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전은 대중의 보편적인 상식과 가장 근접한 설명을 제시하기 때문이죠. 사전의 정의대로라면 예술은 ‘특별하고’, ‘아름다운’ 무엇입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만 친절한 설명은 아닙니다. 따라서 다음 질문은 자연스레 ‘특별하다는 건 무엇이고, 아름답다는 건 무엇인가’여야 할 것입니다. 이 질문의 답을 안다면 우리는 사전적 의미에서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할 수 있게 될 테죠. 국어사전을 펼쳐 가볍게 논의를 시작했지만, 이렇게 작품의 성질을 바탕으로 예술을 분류하려는 시도는 다음 논의를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일단 사전을 더 뒤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하다 : 보통과 구별되게 다르다.


특별하다는 건 보통의 것과 구별되는 특성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작품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르셸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을 아실 겁니다. 뒤샹이 전시한 이 변기는 당대의 수많은 변기와 무엇이 다르길래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는 걸까요? 이 변기엔 예술적 전통을 근본부터 거부하고자 한 뒤샹만의 독창적인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변기는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된 것이죠. 다른 예를 살펴봅시다. 도화지에 붓으로 한 획 그었을 뿐인 이우환 화백의 <조응>은 어떻게 17억 원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 한 획을 긋기 위해 이 화백이 기나긴 인고와 번뇌의 시간을 견뎠음을 모두가 알기 때문 아닐까요? 이처럼 예술가의 철학과 시간이 녹아든 작품은 특별한 지위를 얻습니다. 이 지위는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한 자격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특별함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얼마만큼 철학을 담고, 얼마만큼 시간을 들여야 예술 작품이 될까요? 특별함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Marcel Huchamp(1887-1968). Fountain. 1917. | 이우환(1936-). 照應(조응). oil on canvas. 130X161. 1994


아름답다 :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아름다움의 정의에서 강조되는 건 ‘균형과 조화’ 그리고 ‘즐거움과 만족’입니다. 이 둘이 인과관계로 이어질 때 우리는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두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가령 균형과 조화를 이뤘지만 따분한 작품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클래식을 듣다 잠에 들어버립니다. 정교한 화음을 갖춘 작품인데도 말이죠. 또 반대로 조화롭진 않아도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작품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도화지에 물감을 대충 휘갈긴 듯한 잭슨 폴록의 <Number 1>을 보며 전율을 느낍니다. 클래식과 폴록의 그림. 여러분은 이 두 작품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약 아니라면 예술이라 할 수 없는 걸까요? 아름다움도 주관적이어서 이를 토대로 모두가 만족할 만한 정의를 내리긴 어려워 보입니다. 예술의 범주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Jackson Pollock(1912-1956). Number 1A. ail and enamel paint in canvas. 172.7X264.2. 1948


정리하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규정짓는 특성은 ‘특별함’과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함과 아름다움의 척도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수긍할 만한 범주를 정할 수 없었습니다. ‘평가’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범주를 정하려는 시도가 좌절되고 만 것입니다. 미국의 분석철학자 조지 디키(G.Dickie)의 고민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는 평가적 의미(Evaluative Sense)에서 예술을 규정하는 일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며 예술을 규정할 다른 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II. 분류적 의미에서의 예술



디키는 평가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분류적 의미(Classificatory Sense)라는 또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예술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찾으려 한 기존의 미시적인 접근법을 버리고 예술의 제도적 성격에 초점을 맞춘 것이죠. 분류적 의미에서 어떤 작품을 예술로 정의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첫 번째 조건은 ‘인공성(Artifactuality)의 획득’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예술가의 가공을 거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트레이시 에민의 <나의 침대>는 자신이 쓰던 침대를 그대로 전시한 작품입니다. 이것은 인공성을 획득한 작품으로 볼 수 있을까요? 디키는 어떤 사물을 미술 전시회 안으로 끌고 온 노력과 아이디어도 모두 인공성의 획득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침대>도, 앞서 본 마르셀 뒤샹의 <샘>도 마찬가지로 인공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디키는 예술 작품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요건만 정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느슨한 틀로는 예술의 범주가 끝도 없이 넓어지고 말테죠. 디키는 좀 더 엄격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Tracey Emin(1963-). My Bed. 1998


두 번째 조건은 ‘감상의 후보로서의 자격 수여’입니다. ‘예술계(Art Circle)’가 어떤 작품을 감상의 대상이라고 인정하면 예술이 된다는 말입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우선 예술계는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논문에 등장한 개념인데, 일단은 ‘당대 예술가들의 통념’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단토는 논문에서 “뭔가를 예술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통해 알아낼 수 없는 이상의 무엇, 즉 예술 이론의 주변 상황, 예술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며, 이것이 바로 예술계”라고 정의합니다. 즉 ‘감상의 후보로서의 자격 수여’란 예술 작품이 당대의 예술계, 곧 예술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고 예술의 본질을 어느 정도 이해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디키는 단토의 ‘예술계’를 빌려 예술 전문가들의 권위를 한층 끌어올렸습니다. 이는 현대미술이 태동하며 변두리로 밀려날 처지에 놓인 전문가들의 위기의식과 무관하지 않았을 겁니다.


분류적 의미에서 예술이 될 수 없는 건 무엇일까요? 먼저 ‘인공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예술이 될 수 없는 건 없습니다. 필요한 건 오직 작품을 전시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감상 후보로서의 자격 수여’ 문제로 넘어갔을 때 대부분의 작품이 탈락하게 됩니다. 예술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은 예술을 어느 정도 이해한 이들이 정하는 것이며, 이들에게 감상 후보 자격을 받은 작품만이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III. 윤리적 관점에서 본 예술



하지만 오늘날엔 분류적 의미에서 예술을 규정하려는 시도마저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너도 나도 예술가를 자처하며 ‘탈권위’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젊은 예술가들은 기성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각자도생으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독립 예술의 시장이 점점 커지는 것 역시 예술계가 구심점을 잃었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완전히 허물어진 걸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윤리, 즉 대중이 용인할 수 있는 상식의 범주가 예술의 경계를 결정짓는 마지노선으로 남아있습니다.


Ang Lee. (2005). Brokeback Mountain [Film] | Luca Guadagnino. (2017). Call Me by Your Name [Film]


영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영화에서의 살인은 대중에게 용인됩니다. 총으로 쏘든, 머리를 자르든, 영화 <쏘우>의 장면처럼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 죽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연출일 뿐이며, 살인을 연출해도 좋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살인은 대중 예술의 일부로서 용인됩니다. 하지만 ‘동성애’라는 금기가 풀린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동성애 행위는 물론 표현하는 행위도 금지됐던 시대가 지나고 이젠 눈치껏 동성애의 서사를 넣어야 하는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인권의식이 성장하며 상식의 범위가 달라지고, 이로써 예술의 경계가 확장된 것입니다. 


반면 대중에게 용인되지 않는, 절대로 금기시되는 주제도 존재합니다. 영화 <더 스퀘어>에선 소녀를 폭탄으로 터뜨리는 영상을 광고를 낸 광고업체가 엄청난 욕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 현실에서 이런 광고를 내보냈다간 기업이 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연출이라 해도 건드려선 안 되는 영역이 있는 것이죠. 소아성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암만 예술로 인정해달라 호소해봐야 처벌을 면치 못할 겁니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대중이 납득할 수 없는 건 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남은 경계는 이뿐입니다.


Ruben Östlund. (2017). The square [Film] | 소아성애 논란을 빚은 아이유의 '제제(Zeze )'



BOUNDARY OF ART :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



다양한 관점에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짚어봤습니다. 먼저, 예술을 특별함과 아름다움이라는 특성으로 규정짓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기준이 달랐고, 이것은 평가적 의미에서의 예술이 가진 한계였습니다. 조지 디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분류적 의미에서의 예술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습니다. 예술가의 행위로부터 ‘인공성’을 갖추고 및 예술계로부터 ‘감상 후보로서의 자격 수여’를 받은 작품을 예술의 범주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탈권위의 시대에서 예술계는 구심점을 잃었고, 분류적 의미에서 예술을 규정하는 시도 역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기존의 경계는 모두 허물어졌고, 남은 건 ‘윤리’라는 마지노선이었습니다. 결론을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요? 이미 도입에서 언급한 바, 이제 답을 내리는 건 예술을 소비하는 여러분의 몫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정답은 없습니다.


[참고문헌] 


· 배철영 (1998). 딕키의 예술제도론과 그 한계. 철학연구, 67, 149-167



WEEKLY PUBLICATION NO.1

EDITOR TERRY


https://antiegg.kr/965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