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悲歌 / 알렉산드르 푸쉬킨
퇴마록(Exorcism Chronicles: The Beginning, 2025)
숙명적으로 우리는 불행의 뒤를 쫓는다. 살아있기 위해서.
익숙한 사연, 익숙한 캐릭터, 익숙한 플롯, 하지만 어쩐지 와닿지 않는 퇴마록의 감성. 그건 비단 원작이 93년도 출판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가장 먼저 든 감상은 부족한 자본, 인력에도 불구, 선방했다. 요즘 영상 콘텐츠 트렌드인 잘 빠진 세련미는 없었지만, 없었기 때문에 성공했다. 앞뒤로 잘린 서사에도 관객 입장에서 개연성이 따라준 건 촌스럽더라도 익숙하게 다림질한 덕분일 테다. 한 편의 만족스러운 영화라기보다는 시리즈 작품의 서문을 접했다는 생각이 컸다. 내가 만약 원작의 팬이었다면 보다 영화를 즐기지 않았을까.
때로 불행은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지키지 못한, 갖지 못한, 싸잡아서 결핍을 갈망하는 과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처진다. 후진 역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예비된 끝은 관대하다. 결승점이 아니라도 마침표를 찍어줄 정도로. 그런 어른들의 '일시 정지' 상태를 턴 온하는 건 어린 준후와 승희다. 너무 오래 막다른 길목과 마주하고 있다 보면 벽이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깨달음은 아주 작은 계기면 충분하다. 영화는 에피소드지만 삶은 에피소드가 아니므로, 시리즈 영화의 백미는 여기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캐릭터들은 함께 겪은 갖은 고난 끝, 불행 너머를 꿈꾸게 된다는 것.
아노라(Anora, 2024)
가망 없는 꿈이 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열심히 살았기에.
여기 상투적인 대사가 있다. 왜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떠나갈까. 삶이 무거운 어떤 사람들은 삶을 대하는 태도를 깃털처럼 가볍게 다듬는다. 때로 그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는 '천부 인권'을 제창했고, 덕분에 대부분의 기저에는 어쨌거나 소중한 내가 깔려 있다. 애니를 포함한 아노라의 주역들은 모두 본인 스스로가 계급 사다리 하층부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인풋에는 적절한 아웃풋을 기대하기 마련. 아주 적은 확률이지만 운이 좋아 대박을 치면 감사히, 그리고 불안해하며 땡큐를 외칠 각오가 되어 있다. 애니는 불안에 젖은 채 땡큐를 외쳤다. 마음이 흔들렸고 나름의 셈법도 있었다. 하지만 단단한 내 의지와 다르게 바닥은 싸구려 목재 합판에 불과했다.
삶에는 언제나 배신이 예비되어 있다. 모두가 나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 나는 진심을 단념한다. '죽음은 꽃잎같이 가볍고 청춘은 기차처럼 무거웠다. 삶은 아름답지가 않다'는 이응준의 문장처럼 삶을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려 애쓴다. 하지만 부정否定할수록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건 어떤 모순일까. 내게 나의 진심과 타인의 진심은 둘 다 모두 멀었다. 나는 변덕이라는 이름의 운과 나의 진심을 맞바꾸는 일에 성공했지만, 그게 나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진심을 그것 하나로 가만 놓아두기란 쉽지 않다. 애니는 외롭기 때문에 운에 매달렸다. 다른 진심 모두를 경시한 채로. 결말에 다다르자 차창 너머로 얼음 섞인 칼바람이 몰아친다. 바람 따라 날개 치는 눈발은 세상 일 모두를 흐릿하게 덮는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과연 이 저울질에 추를 얹은 건 개인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