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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사쁨 Nov 07. 2024

남편에게 ck를 입히기로 했다.

남편은 루틴대로 양말 입구를 벌려놓은채 발바닥을 두 번 쓸며 말했다.


"자기야, 난 뭐든지 다 할거야."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각오와 다짐이다. 우리 사이에 렇게까지 결연한 표정으로 말할 필요는 없지만 이해한다. 그 마음 나도 마찬가지이니. 어린이집 체육대회는 처음이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진짜 하이라이트는 아빠 경기 아니겠나. 결국 힘과 속도를 겨루지 않겠나. 우리 남편, 빠질 수 없다.




행사가 시작 직후 적응하기 어려운 어린이집 체육대회의 이점있었다. 인원체크를 안 한다.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스포츠의 기본, 쪽수는 맞춰야 하지 않나. 그런데 단체 경기는 줄만 맞춰 서면 그만 이었고, 심지어 초등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 누나, 형아들이 아무 조건과 규정 없이 경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중고등학교라면 눈이 뒤집힐만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현장에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감이 왔다. 승부가 중요한 곳이 아니다. 승부는 나에게만 중요하다.


카드 뒤집기 게임 결과가 처참했다. 토끼팀에는 초등학생 참가자가 많았고 아이들 경기 후 체육관은 온통 파란밭이 되었다. 난 거북이팀이다. 핑크가 필요하다. 그 상태 그대로 엄마들이 투입된다. 기회다. 하이에게 보여줘야 한다. 엄마의 열정을.


마들 경기에는 한 가지 규칙이 추가됐다. 카드를 뒤집다가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춰야 한다. 춤을 잘, 아니 막 추면 상품을 준다. 첫 번째 음악이 나온 순간 온 몸을 정성 다해 털어대는 토끼팀 엄마들 사이사이 거북이팀 엄마들은 묵묵히 카드를 뒤집는다.


괜찮아.

기다려.

엄마가 보여줄게.


사실 애들은 이미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엄마들만 활활 타오른다. 전세를 역전시키고픈 마음, 내 새끼가 보고 있다는 그것이 동기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대동단결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배운 치팅 기술을 이곳에 와서 다 써먹었다. 카드 멀리 던져 놓기, 차곡차곡 모아서 가지고 다니며 한 번에 뒤집기. 뒤집힌 눈으로 카드를 뒤집으니 뵈는게 없고 창피한 줄도 모른다. 교직원 체육대회 때 어디 많이 아픈 사람처럼 저 뒤에 앉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안하던 그 여자 어디갔나. 달라도 달라도 이렇게 달라도 되나 싶었지만, 된다. 지금은 엄마다.


경기가 끝났다. 핑크 카드가 많아 졌다. 현기증이 지경, 숨소리는 거칠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까지 맺혔으니 당연한 결과다.


이제 아빠들 차례다. 지금부터가 진짜 승부다. 아빠들은 아이들을 업은 채 발로 뒤집어야 했다. 그리고 음악이 나오면, 아이가 매달려 있던 그 자리에 엄마를 앉히고 팔굽혀 펴기를 해야 한다. 귀가 번쩍.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듣자마자 휴대전화 던져 놓고 외투 벗고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끝냈다.


기다리던 음악이 나온다. 지원자는 손을 들라고 했고 한 사람씩 긴장감 넘치는 힘자랑이 시작됐다. 하나, 둘 만에 풀썩 풀썩 쓰러진다. 셋, 넷 하는데 덜덜덜덜 팔이 흔들리더니 다섯을 넘지 못하고 무너진다. 아 긴장돼. 우리 여보가 제일 잘할 것 같아서 심장이 나댄다.


"자, 다음 누구?"

"저요. 저요. 저요."


방정맞다. 남편의 탄탄한 엉덩이는 이미 봉긋 솟아있다. 그위로 코알라처럼 달라 붙어 나 또한 몸에 힘을 바짝 주었다. 내려간다. 하지만 내려가는 것이 다가 아니다. 반드시 올라와야 한다.


하나아.

두울.

세엣.

네엣.

다서엇.


숫자를 세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여서엇.

일고오옵.

여더어얿.

아호오오오옵.


귀가 찢어질 것 같다.


"여어어어어어어어얼!"


지켜보던 선생님들의 입이 벌어졌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회자는 진행 스탭에게 "여기 선물 줘. 열개."라고 했고,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진짜 열개를 주면 어떡해!" 했지만 단정히 포장된 열개의 자그마한 꾸러미는 산이 되어 품에 안겼다.


와씨.

이럴 알았지만 이럴 줄이야.




결혼 7년 만에 남편에게 다시 반했다.


축구는 다치려고 하는 운동인가 하는 의문이 항상 있었다. 오늘 부로 축구는 근력과 지구력을 동시에 키워주는 최고의 스포츠라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 남편은 이 세상 다른 어떤 남편과 비교할 수 없이 독보적이며 우월하고 특별한 존재이다. 나에게 만큼은.  


우리가 열 개라는 기록을 세운 이후 토끼팀에 건장한 아버님 한 분이 기록을 깼지만 괜찮다. 그 아버님과 우리 남편은 '아빠릴레이' 에서도 첫 주자로 맞붙었 그 분과의 몸싸움에서 남편은 밀렸다. 그런데 괜찮다. 나에게는 크고 듬직한 이 남자가 아빠들 사이에 있으니 날씬해 보인다. 이렇게 배가 없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배가 없으면서도 탄탄한 사람은 없다. 즉, 남편은 종합 우승인 셈이다. 이런거 또 알려줘야지.  


"자기야. 오늘 모인 아빠 중에 자기가 제일 멋있라."


덤덤하게 "그래?" 한 마디 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오졌을지 다 안다. 짠순이, 오늘부로 마음 먹었다.


'넌 ck야.' 


우리집 빤스맨(집에서 빤스만 입고 다닙니다) ck를 입을 자격이 충분하다.



사진출처 : 네이버 이미지 (손흥민 캘빈클라인 앰버서더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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