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vs 가족
가은이의 치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가족은 ‘치료’만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버티고 있었고, 긴장을 풀 수 없는 전장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은이의 치료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의 연속이었다. 갑작스러운 고열과 너무나 다양한 응급 상황들, 그리고 우리들의 체력 저하. 그 모든 것을 엄마 혼자 감당하기엔 와이프가 하루하루 다르게 지쳐가고 있음을 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회사와 병원을 오가는 삶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무너질 것 같아 불안했다.
그리고 특히, 병원에서 간호사가 내게 했던 말도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보호자가 패닉이면, 아이도 패닉이에요. 신기하게 그게 치료 결과에도 그대로 반영돼요.”
과연 우리 부부는 지금 가은이에게 ‘안전한 방패’가 되어주고 있나? 아니면 그저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불안한 벽’일까? 물론, 현 상태로 어떻게든 버티면서 치료를 받게 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하게 되면 후유증이 엄청날 것 같았다. 특히 부모가 부담하여야 할 모든 후유증을, 엄마가 다 가져갈 것 같아 더 걱정되었다.
결국, 냉정히 상황을 돌아보니 내가 회사와 병간호를 병행하며 버티는 건, 차선책이지 최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월급 - 아직 집이 없는 우리 가족.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꾸준히 돈을 모아야 하는데, 오히려 치료비 지출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마이너스 통장 상환은?
진급 - 올해가 내 진급 평가 해였다. 5년 차 승진 대상자로 한 해를 준비해 온 결정적 시기인데 이 중요한 시기에 휴직이라는 말을 꺼내도 될까? 이제까지 누락 없이 해 온 회사생활에, 휴직의 이력이 생기는 순간 앞으로 진급은 불가능할 것 같은 두려움이 다가온다.
주재원 - 글로벌한 세상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싶어 세웠던 목표 ‘주재원’. 대학교에서는 교환학생, 회사에서는 주재원이 꽃이라는 생각으로 어렵게 잡은 기회인데 이걸 포기해야 하는 걸까? 불과 3개월 뒤 주재원 교육이 시작되고, 곧 발령예정인데! 우리 가족에게도 진짜 좋은 기회라며 와이프와 함께 구상한 미래가 아른거린다.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실질적인 고민들이 많았고,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 줄줄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 모든 걸 다 포기하자니 너무 무모해 보였고, 그냥 가만히 버티자니 너무 잔인했다. 휴직은 단순히 ‘회사를 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생존을 흔들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근데 혹시 선택의 순간, 선택을 하지 못할 때의 고통을 아는가?
그 선택의 고민들은 너무 복잡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한때는 방향감 있게 잘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이 중요한 순간에 우물쭈물하고 있는 내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단지 선택만 남은 문제라는 걸 알겠는데, 대체 무슨 기준으로 현명하게 선택을 해야 할까?
그때, 나를 스치는 내 인생의 키워드들. 인생을 어떻게 살까 고민하며, 내가 설정해 놓은 방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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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난 내가 살아온 흔적들에서 지혜를 얻기로 했다. 나에게는 이미 4개의 나침반이 있었고, 이제 선택만 남은 것뿐이었다. 사실 두 방향 모두 결국 우리 가족을 위한 길이다. 그래서 어느 방향이라도 괜찮다며, 우선 나에게 주어진 선택에 대한 부담을 경감시켜 주고 싶었다. 최고의 선택이 아닌, 후회하지 않을 최선을 선택을 내리면 되니까.
"그래! 복잡한 감정들 다 내려놓고 인생의 나침반으로만 선택해 보자". 더 이상, 예전의 방식으로 머뭇거리는 나를 푸시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였기게, 이제라도 압박을 내려놓고 좀 더 나답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