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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의뭉 Apr 05. 2018

<셰이프 오브 워터>와 미투 운동의 공통적인 암시

누구에게나 정의로운 권위 따위는 없다.

  

영화 <The shape of water> 포스터


  샐리 호킨스가 연기한 일라이자는 실험실에 갇혀 몸부림치는 양서류 인간(더그 존스)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는 이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지 않은가. 일라이자는 실험실에서 양서류 인간의 도주를 지휘하여 도주에 성공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로맨스 영화다. 아름다운 여성이 괴생명체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개구리 왕자』, 『미녀와 야수』 같은 설화나, <킹콩> 같은 영화의 모티브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개구리 왕자도 지금 보니 아찔...ㅎ


  그럼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세 사람의 소수자가 연대하여 더 약한 존재인 양서류 인간을 구해내는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여성, 농아, 고아, 저임금 근로자인 일라이자와 노인, 동성애자, 가난한 예술가인 자일스(리처드 젱킨스) 그리고 남편을 먹여 살리는 여성, 흑인, 저임금 근로자인 젤다(옥타비아 스펜서) 이 세 사람이 가지는 속성을 그저 ‘소수자’라는 이름 아래 뭉뚱그려 동등하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로 대변되는 폭력적 세계 안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도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미세하게 제시한다.


  힘의 차이는 태초에 물리적 힘과 같이 생득적 권력의 차이로 불평등하게 결정된다. 물리학에서 뉴턴 제1 법칙은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물체는 같은 방향으로 운동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마치 100km로 내리쏘는 자동차가 갑자기 뒤로 갈 일이 없듯이 태초에 힘을 가진 자는 힘을 잃을 일이 없다. 적어도 자동차는 연료를 잃으면 그 자리에 멈추기라도 하지만 인간은 별수를 다 써서라도 죽을 때까지 운동을 계속한다. 이때 지위, 계급 등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같은 방향으로 속도를 더한다.


  더 먼저 체제를 구축한 ‘힘’은 일정한 방향으로 운동을 가속한다. 어느 세계든 세계에서 익숙한 방식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잘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낯선 운동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 세계는 역사만큼 가해진 속도의 무게를 견디고 저항해야 하는 곳이다. 이런 우주에서 더 강한 사람은 체제의 익숙한 방식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이다.


  강한 자를 결정하는 기준은 ‘이 세계에서 더 잘 적응할 수 있는지’이다. 영화는 조심스러우나 보다 직접 소수자성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차별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백인 남성인 자일스는 흑인 탄압에 분노하지 않고 끔찍하다며 채널을 돌리자고, 대신 ‘young and beautiful’ 한 여성 댄서를 보자고 한다. 동성인 식당 종업원에게 사랑을 외면당하고 상처받지만 동시에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부가 식당에서 내쫓기는 장면을 방관하기도 한다. 또 흑인 남성인 젤다의 남편은 백인 남성인 스트릭랜드에게 굴복하지만, 너무 쉽게 젤다를 착취한다.


  스트릭랜드의 세계는 물리적 힘을 가진 자가 지배하는 곳이다. 그는 주먹이 세고, 잔인하고, 물리적 힘을 보조해줄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스트릭랜드에 비해 일라이자, 자일스, 젤다, 젤다의 남편 그리고 양서류 인간은 약한 존재다. 그가 힘을 휘두르는 세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스트릭랜드에 대항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무너뜨리는 이는 그의 방식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이들이다. 자일스가 두꺼운 나무 막대로 그를 내려쳐 타격을 입히고, 양서류 인간이 손가락을 자르거나 목을 할퀴어 스트릭랜드를 죽인 것처럼 말이다. 반면 일라이자, 젤다는 물리적 힘의 세계에서 그 방식으로는 복수하지 못했다. 그의 방식을 흉내도 낼 수 없었다. 소수자라는 이름 아래 함께 대항했던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구분된다.


There's no place like utopia for everyone!

 

   내가 자유를 꿈꾸며 기다리는 세계는 어떤 이에게 여전히 거친 곳일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세계가 여성, 장애인, 노인에게 거칠고, 음성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의 세계가 일라이자에게 거칠고, 물 밖의 인간 세계가 양서류 인간에게 거칠고, 양서류 인간의 세계는 다시 작은 고양이에게 거칠듯이 말이다. 야생의 섭리가 원래 약육강식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약자일 때도 야생의 섭리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종의 본능이 그렇다 할지라도 발전도 없이 언제까지고 그 본능을 따를 수는 없다.


  한 세계는 누구에게나 익숙하거나 완벽히 평등할 수 없다. 자유를 위해 뭉쳤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나면 또 다른 권력 관계가 발견된다. 상대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자신감은 사람을 그렇게 만드나 보다. 백인종 이외 인종들의 탄압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 안에서 또다시 차별이 일어나고, 계급으로부터 억압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 안에서도 차별이 일어나듯이 말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런 의미에서 이율배반적이다.


물 밖의 낯선 세계에서는 심해의 신도 한없이 무기력했다.

  

  미투 운동이 활발하다. 전통적인 권위를 타파하기 위해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낸다던 사람들은 자신이 권력자가 되자 더 약한 이를 짓밟았다. 힘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힘을 갖자 자신이 그렇게 비난하던 괴물이 되었다. 안희정도 이명박도 운동권이었다. 어떤 권위든 누구에게나 정의로울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정의롭다면 그것은 권위가 아닐 것이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 양서류 인간은 전지전능한 물속의 신이다. 하지만 물 밖의 낯선 세계에서는 심해의 신도 한없이 무기력했다. 한 세계에서 낯선 운동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본질적인 완결성과 관계없이 무기력할 뿐이다.

김의뭉 소속수오지심을아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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