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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았다. 찢어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근접할 정도로 못 살았다. 어쩌면 내가 극복해야 할 일생의 목적 혹은 목표는 가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가난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라 천만 원을 가진 사람이 보기에 1억을 가진 사람은 자신보다 덜 가난하다고 생각하겠지만 1억을 가진 사람도 100억 부자 앞에서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 아! 한 가지, 이 글에선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마음은 얼마든지 부자일 수 있어요~ 뭐 이딴 저기 저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이야기는 배제하고 있음을 밝히는 바다.
가난했던 삶은 갈증이 심하다. 모든 게 부족하니 물이 부족한 사막의 그 갈급이 모든 부분에 다 적용된다고 보면 된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우리 집에 대한 갈망이 너무 컸다. 우리 집. 작건 크건 간에 우리 가족이 그러니까 내가 어릴 때니 우리 엄마아빠가 주인인 그런 집 말이다. 학교에서 기초조사 같은 거 할 때 전세나 월세에 체크하는 그 순간이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부끄럽고 원망스러웠던지...
최근에 일이 있어 초본을 뗐는데 변경 회수가 무려 32건이었다. 물론 그중엔 통/반이 변경됐다든지 행정구역이 변동됐다든지 도로 명 주소로 바뀌었다는 등의 지극히 행정적인 사례도 있었다.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도 전출/전입 횟수만 세어 보니 13건이었다. 이사를 많이 다녔단 소리다. 이사를 많이 다녔다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부모님 직업의 지역 이동이 많았거나 내 집이 아니라서 주기적으로 월세 혹은 전세로 여기저기 떠돌았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우리는 후자였다.
그렇다고 세 들어 살았던 모든 순간이 부끄럽고 싫었던 건 아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것처럼 주인과 셋방살이하는 우리 가족이 그야말로 멀리 살고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처럼 지낸 경우도 많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정원이 딸린 1층 단독주택이 있다. 맞은편엔 정원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당시의 주택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의례 화장실이 있었다. 소위 ‘푸세식’ 화장실. 그런 주택의 오른쪽으로 담벼락을 옆으로 두고 들어가면 바로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이 있었다. 말이 좋아 집이지 주인집과 한 건물인데 방 하나의 문을 따로 내고 그 옆에 부엌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구조였다. 이런 셋방은 또 거의 대부분 부엌 위에 방에서 올라갈 수 있는 다락이 있었다.
그 집의 주인과 정말 가깝게 지냈다. 어린 시절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딸이 많은 집이었는데 당시의 나에겐 이모나 고모뻘이었다. 그래서 정말 고모라고 불렀다. 첫째 딸에겐 첫째 고모라고 불렀고 둘째 딸에겐 둘째 고모 그리고 막내딸에겐 막내 고모라고 불렀다. 글을 쓰는 지금 불현듯 첫째 고모의 얼굴이 스쳐 간다.(잘 살고 계신지...) 주인집이지만 불편함 없이 제집 드나들 듯이 언제나 가서 편하게 밥도 같이 먹고 텔레비전도 같이 보고, 심지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7살 시절에는 막내 고모가 나서서 한글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엄마아빠가 일이 급하면 나와 동생을 주인집에 맡기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또 다른 곳은 주인은 별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같이 세 들어 살던 다른 셋방 가족과 참 친하게 지냈다. 우리 집도 아들, 딸이 있었고 그 집도 아들, 딸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 집은 아들인 내가 첫째, 그 집은 딸이 첫째였다. 그 집은 전체적으로 ‘ㄷ’ 자 형태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는 공동 수돗가가 있었다. 주인이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이고 누구나 편하게 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여름이면 아무렇지 않게 등목을 할 수 있고 초겨울에 접어들면 모두가 나와 다 같이 김장을 담그는 그런 공간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는 주인집에 큰 형이 있었는데 간간히 내 진로를 진심을 담아 걱정해 주기도 했다. 그때 그 형의 말을 들어 외고를 갔다면 어쩌면 내 삶이 다소 변하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도 간간히 생각한다. 아쉽게도 그 동네는 개발에 의해 다 밀려 버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위에 번듯한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가끔 운전을 하면서 지나치다 보면 쓸쓸 혹은 씁쓸할 것까지는 없고 그저 꿈같았던 없어져서 더 꿈같은 시절을 돌이켜 보곤 한다.
물론 정말 별로였던 집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 살 곳이 맞나 싶은 곳도 있었고 화가 나는 건 그딴 집을 세를 주는 주인이 인간인가 싶다가도 그런 집구석이라도 감사합니다 하고 세를 내면서 살아야 했던 우리 집의 빈곤에 더 부아가 치미는 집도 있었다. 또한 특별히 주인이 나쁘거나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냥 괜히 불편하고 마주치기 싫고 별로였던 집도 있었다. 그래도 뭐 다 지나간 일이다. 그야말로 가난을 주제로 삼았으면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겨울에 기름 값이 무서워 보일러를 켜지 않고 버티다 터진 일, 빨간딱지가 붙은 일 등등.) 가난 중에서도 집이라는 대상에 집중하는 글이기에 이 정도로 하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 집은, 내 집은, 우리 집은 가슴의 응어리이기도 했다. 재산이랄 것도 없지만 독립해 혼자 살면서 재산 비스무리 한 게 하나 생겼고 지금도 있다. 다름 아닌 바로 자동차다. 일을 하기 위해 살 수밖에 없었던 자동차. 하지만 이걸 재산으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엄청나게 비싼 차도 아니고 또 성향이라는 걸 십분 반영해 일반적인 차를 산 것도 아니어서 중고차 가격도 방어가 안 되는 차였다. 그런 자동차를 재산이라고 하자니... 영 뭐가 조금 껄쩍지근 했다. 그럼에도 재산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건강보험료 산출 목록에 떡하니 재산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재산이라고 하지만 재산세를 내는 건 아닌 이도저도 아닌 자동차가 재산 1호였던 나는 6년 전 처음으로 이름 그대로인 ‘재산세’를 생애 처음으로 냈다.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재산세였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내 거라는 소리다. ‘자! 가! 소! 유!’ 어쩌면 난 이미 벌써 일생의 가장 큰 목적이면서 목표 하나는 이룬 것이다. 결혼을 하면서 사게 된 아파트. 평생을 우리 집, 내 집이라는 단어를 써 본 적도 불러 본 적도 없는 내가 결혼을 하면서 내 집을 갖게 됐다. 물론 너무나도 당연하게 은행의 도움을 받아 대출을 해서 산 집이긴 하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어디 저기 신체포기각서 같은 거 쓰고 받은 대출도 아니고 나라가 나름 지원해 주고 넉넉한 상환기간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자로 빌려주는 돈인데 그 정도는 갚을 수 있다 하는 마음으로 빌렸고 지금까지 잘 갚고 있다. 방이 3개짜리 작은 아파트인데 아직 방 하나는 은행 거지만 조만간 그마저도 온전히 내 거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재산세를 처음 냈던 2018년, 고지서를 받아 든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와! 재산세다! 나도 이제 재산세 내는 사람이다! 아 하하하하하하, 허 참... 정말 이랬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세금을 내는데 웃다니. 평소 같으면 딱지 하나만 잘못 떼여도 아니 이것들은 일상적으로 걷어가는 세금도 모자라 조금 실수했다고 이렇게 또 뜯어 가는 거야(지 잘못은 모르고...)하고 투덜거렸을 사람이 세금고지서를 받아 들고 웃었다. 그래서 정말 기꺼이 진심을 담아 재산세를 냈던 거 같다. 물론 지금은 내기 싫다. 6년째 내고 있으니 다시 아니 이것들은 뭐 이리 많이 뜯어 가! 내 집인데 내 재산인데 뭘 자꾸 이렇게 뜯어 가는 거야 이러고 있다.
여하튼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 전의 그 순간은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