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우울해서 좋아
나의 요즘 취미는 넷플릭스이다. 우리 집의 인터넷은 느리지만 넷플릭스에는 다운로드 기능이 있어서 낮은 화질로 다운로드 걸어두면 언젠간 영상들을 볼 수 있다. 넷플릭스엔 정말 많은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이 있어서 뭘 봐야 할지 고르는 게 어려운데, 꼭 보고 싶은 게 없다면 나는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들을 본다.
나는 영국 드라마들이 극이 다루는 규모를 크게 넓히지 않고, 그 제한적인 공간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비밀을 그리는 것이 좋았다. 한편으로는 거의 매일이 화창한 나라에서 지내다 보니, 영국의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그리워서 영드를 즐겨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2015년 가을과 겨울, 2016년 봄과 여름을 영국 요크셔 지방의 브래드포드라는 곳에서 보냈다. 옛날 양모산업이 한창 발전하던 시절, 이 근방에서 가장 잘 나가던 도시였고, 나라 안팎에서 대규모로 노동자 유입이 이어졌던 도시인데, 영국의 양모산업이 하락세를 기록하면서, 브래드포드는 급속도로 몰락했고, 당시 유입되었던 노동자와 이민자들은 대형슈퍼마켓의 종업원 등의 저소득 직종으로 옮겨가거나, 실직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인구수로는 영국 도시중 여섯 번째나되는, 그 큰 도시가 동력을 잃고 침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많은 문제에 직면한 브래드포드에 대해, 영국 사람들의 시선은 좋지 않았다. 브래드포드 밖에서, 심지어 브래드포드 안에서라도 브래드포드를 영국 최악의 도시 중 하나라고 부르는 말들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보내면서 불편함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최악의 도시에 산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때론 사람들이 말도 거칠고, 도시가 깨끗하거나 아주 안전한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좋은 사람들도 많고, 물가도 상대적으로 싸고, 도시가 가진 엄청난 문화적 다양성이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잘 포장된 '신사의 나라' 영국이 아닌 영국의 민낯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암튼 나는 영국을 신사나 귀족보다는 아슬아슬하고 어둡고 어딘가 우울하고 어떻게 보면 좀 검소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잘 나오는 드라마들을 좋아한다.
1. 마르첼라 (Marcella. 2016-)
나는 넷플릭스에 올라와있는 영드 중 가장 어둡고 가장 흥미로운 시리즈로 "마르첼라"를 꼽는다. 스웨덴 출신 제작자 한스 로젠펠트가 만든 마르첼라는 북유럽 느와르(Nordic Noir)의 분위기를 런던에서 그려낸 시리즈로 배경도 우중충하고 인물들의 내면도 복잡하며, 최소한의 도덕성조차 찾기 힘든 잔혹한 범죄에 대해 다룬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 마르첼라의 복잡한 캐릭터이다. 런던의 유능한 형사인 마르첼라는 어떤 살인 사건과 엮이게 되는데, 그 사건을 수사할수록 자기 자신이 수상해진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면 그는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 있고, 다른 형사물에 흔히 등장하는 형사들처럼 결벽증이 있거나 천재적이진 않지만 인간적으로 뛰어난 형사인 동시에 불안한 외줄타기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그의 편안하면서도 제멋대로인 패션도 좋고,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도 좋았다.
이 극의 긴장감을 처음부터 계속 이끌어 가는 것은 마르첼라의 블랙아웃인데, 그가 반복적으로 겪는 블랙아웃을 표현하는 방법도 인상 깊었다. 마르첼라를 연기한 안나 프리엘(Anna Friel)의 건조한 듯 격렬한 연기가 일품이다.
중간중간 무섭거나 놀랄 장면들이 있긴 한데, 몰입도는 엄청나다. 나는 혼자 밤에 불 끄고 보다가 무서워서 불을 켠 적이 있다. 시즌 2까지 나왔고, 시즌 2의 결말을 봤을 때 아마도 시즌3은 많이 다른 느낌으로 전개될 것 같다. 빨리 나오면 좋겠다.
트레일러: https://youtu.be/-3tXIxa2Jl0
2. 내 이웃의 비밀 (Safe. 2018-)
담장 속 부촌에 사는 의사 톰 딜레이니가 친구네 파티에 갔다가 남자 친구와 사라진 딸 제니를 찾는 이야기를 담은 시리즈이다. 톰은 딸을 찾아 나섰는데, 찾으면 찾을수록 어째 알게 되는 것은 이웃들의 비밀이다. 마치 '누구에게나 어두운 비밀은 있다'라고 내내 이야기하는 듯하다.
"아빠가 사라진 딸을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는 테이큰의 리암 니슨처럼 톰도 딸을 찾기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도 갈 것 같긴 한데, 톰은 안타깝게도 리암 니슨처럼 특수요원 출신이 아니라서 자꾸 벽에 부딪힌다. 톰 딜레이니와 이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이자 톰의 연인이자 이웃인 소피 매이슨이 극을 긴장감 있게 잘 이끈다. 시즌 1까지 나왔는데, 시즌 2가 나오기는 하는 건지, 나온다면 어떤 이야기로 전개될 것인지 벌써 궁금하다.
3. 파라노이드 (Paranoid. 2016-)
평화로운 놀이터에서 한 아이의 엄마이자 지역 보건의인 한 여성이 갑자기 살해당하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파라노이드"는 영국 체셔 지역 소도시와 독일 뒤셀도르프를 오가며 범인을 쫓는 형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니나 역은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도른의 엘라리아 샌드 역할로 등장했던 인디라 바르마(Indira Varma)가 맡았는데, 꽤 인간적인 형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드치고는 드물게 꽤 많은 러브라인이 등장하고, 이 러브라인 묘사에 꽤 많은 시간을 들여놓았다.
뒤로 갈수록 내용이 좀 산으로 가는 것 같긴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사생활에 많은 비중을 두는 만큼, 보다 보면 등장인물들에게 정이 든다. 나는 레슬리 샤프(Lesley Sharp)가 연기한 사연이 많은 루시와 크리스티아네 파울 (Christiane Paul)이 연기한 해맑은 독일 형사 린다에 정이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4. 브로드처치 (Broadchurch. 2013-)
영국 남부 해안지방 도셋(극중에서는 브로드처치라는 이름으로 불림)을 배경으로 하는 형사물이다. 아마 "닥터후" 10대 닥터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것 같지만, 나에겐 마블 제시카 존스에서 소름 끼치는 악역으로 기억나는 데이비드 테넌트 (David Tennant)와 "나이트 매니저"에서 본 적 있는 올리비아 콜맨 (Olivia Colman)이 주인공으로, 아름다운 해변과 절벽을 가지고 있어 휴가철 관광객을 기대하던 소도시 브로드처치에서 일어난 소년 살인사건을 쫓는 내용이다.
데이비드 테넌트가 연기하는 알렉 하디 경위는 외지인으로 차갑고 무례하지만 뛰어난 형사로 나오고, 그의 파트너이자 브로드처치 출신인 엘리 밀러 경사는 아주 인간적인 형사로 나온다.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의 파트너십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조화를 이루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고, 마을의 다양한 사람들(혹은 용의자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주 신경 써서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시리즈. 르완다 넷플릭스에서는 시즌 1만 볼 수 있는데, 시즌 3까지 나왔다고 한다. 한국 가면 당장에 다 봐야겠다.
5. 콜래트럴 이펙트 (Collateral. 2018-)
콜래트럴 이펙트는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4부작 미니시리즈로 캐리 물리건 (Carey Mulligan)이 형사로 이야기를 이끈다. 미니시리즈인 만큼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섬세하면서도 꽤 풍부하게 다룬다. 또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여성일 정도로 여성 서사도 아주 풍부하고 멋지다.
6. 힌터랜드 (Hinterland. 2014-)
힌터랜드는 웨일즈의 아버리스투위스 지방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형사물이다. '오지'를 뜻하는 제목처럼, 이 시리즈에서는 사건 한번 터졌다 하면 광활한 웨일스 대지를 달리고 달려야 사건 현장에 도착할 수 있고, 대부분의 사건 현장들이 주변이 휑 하다. 다시 말하면 누구 하나 죽어도 알 길이 없는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어떤 사연으로 런던에서 이 오지까지 온 톰 마티아스 형사인데, 능력은 출중하지만 삶의 의지가 별로 없고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다. 거의 극 내내 마티아스는 저 위 캡처 화면의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분명 뛰어나긴 한데, 사건을 깨끗하게 해결할 정도로는 뛰어나지 않아서 '저래도 안짤리나?'싶은 순간들이 좀 있었다. 시즌 3까지 나왔고, 장난 없게 우중충하지만, 보다 보면 좀 졸릴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