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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효진 Apr 12. 2017

도쿄 체질

2017.3.16~3.25③

셋째날이다. 당연히 늦게 일어났다. 정말 계획 없이 온 여행 답게 이틀은 마신 알콜처럼 휘발됐다. 이제 슬슬 연락 못했던 사람들한테 연락도 하고 여행다운 짓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먼저 지난번 도쿄에 왔을 때 처음 알게 된 고슈인을 받으러 다니는 것과 드라마 I.W.G.P. 로케지 탐방을 골자로 또 한 번 제멋대로 플랜을 짰다. 뭘 먹고 싶은 것도 없어서 곤란한 지경이었다. 시부야구에서 갈 만한 신사를 구글맵으로 찾아 보니 金王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주말이라 도쿄의 인파가 두려웠지만 그래도 영원히 집에서 개길 수는 없기에 힘든 발걸음을 뗐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사는 대충 6시 정도까진 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슬아슬한 시간에 신사에 도착해 고슈인을 받는데 갑자기 도장 찍어주시는 분이 나한테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봤다. 고슈인첩을 오른쪽으로 넘기는 걸 보고 알았다는 것이었다. 좀 당황했지만 늘 그렇듯이 여기 사는 사람 아니고 일본어 공부한 적 따로 없고 영화나 드라마 보고 대충 한다고 설명하고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오는 길에 우리나라 블로그에서 일본 여행 중 반드시 먹어야 할 것처럼 말하기에 이름을 알고 있었던 스시잔마이를 발견해서 쓱 들어갔다. 스시집의 맛은 타마고야끼에서 결정난다고 믿는 나는 타마고야끼와 참치 부위 몇 군데, 큰 맘 먹고 전복을 주문했다.



충격적으로 실망스러웠다. 전복에서는 한치 맛이 났다. 작년 11월에 시모키타자와 장어집에서 먹었던 700엔짜리 세트가 진심 열배는 맛있었다. 웬만하면 더 시켜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서 가게를 나와 바로 돈까스집으로 들어갔다. 고급진 분위기의 돈까스야는 가격도 고급졌다.


나는 스스로를 돈까스 마니아라 칭한다. 아침, 점심, 저녁 전부 돈까스로 먹을 수 있다. 한국식 돈까스부터 일본식 돈까스, 가츠동, 냉면에 말아먹는 돈까스까지 다양한 배리에이션을 경험(?)했고 돈까스 맛집이라면 내게 맡겨 수준이다. 그런데 이 돈까스란 음식에도 맛의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진심 고기가 손가락 한 마디만했는데 그냥 별 감흥이 없었다. 아카미소시루가 맛있었다는 것 밖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배만 개부른 상황이었다. 전날 다 채운 스탬프카드를 들고 카페에 가서 공짜 커피를 마시며 1월 노래방에서 큰 신세를 지고 민폐를 끼쳤던 미치코상에게 연락을 했다. 당시 그는 나에게 2월에 일본에서 공개되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DVD를 쥐어줬었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된 한국 노동자들의 이야기와 일본이 전시에 자행한 국가적 폭력에 대해 일생동안 기록해 온 하야시 에이다이라는 사람을 밀착 취재한 영상물이다. 솔직히 큰 관심은 없었는데 얼결에 DVD까지 받아 버렸으니 뭐라도 써 줘야 할 것 같아서 기사를 썼다.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마찰이 있었다. 기사에 쓸 사진을 요구했는데 미친듯이 더디게 줘서 딱 3월 1일에 나갔으면 좋았을 글이 한참 출고되지 못했고, 나한테 기사가 나가기 전 원고를 보여달라는 실례까지 범했다. 내가 진짜... 한국이었으면 이 짓으로 기사를 쓰고도 남았을 텐데 참다 못해 ‘기자가 자신이 쓴 기사가 나가기 전 자기 회사 외에 보여 주는 일은 없다’고 말하는 선에서 멈췄다. 꼴도 보기 싫어졌지만 DVD는 돌려줘야 하고 또 일본 온 거 뻔히 SNS에 올리는데 연락 안 하면 서운해 할 까 봐 라인을 했다.


인플루엔자에 걸려 막 나은 상태인 미치코상은 늘 가던 바에서 밥을 먹고 있겠다고 했다. 아! 까먹고 있던 건데 나도 여행 직전 오랜만에 지독한 감기에 걸려 있었다. 혓바늘도 개 큰거 돋았는데 9박10일 동안 잠 안 자고 술쳐먹은 탓인지 귀국 때까지 낫지 않았다. 술 마시려고 출국 전날 병원까지 가서 몸을 만들었던 나다.


아무튼 바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내가 또 딥한 이야기를 해 버렸다 ㅋㅋㅋㅋㅋ 진로 고민이랄까? 길게 일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제는 괜찮은 직장에서 오래 일하고 싶다고 하니 니년 성격 알 만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일본 회사랑은 좀 안 맞을 것 같다나 ㅋㅋㅋㅋㅋ 지난번 회사에다가 도쿄 특파원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라던 분 맞는지... 아 이 사람이랑은 끝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를 보냈다.


말 할 사람이 없어서 재미때가리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감독이랑 치쨩이 차례로 들어와서 아주 잠깐 재밌을 뻔했다. 이날 받은 고슈인을 자랑했는데 金王신사를 보고 金玉신사, 부랄신사라고 부르거나 스시잔마이 존나 맛없었다고 하니 일본인이 자주 가는 데라며 그런 말 하면 화낼수도 있다고 하거나 소소한 잡담을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또 차례로 나갔다. 누가 봐도 딴 바에서 합류할 분위기였는데 나를 끼워 주지 않았다. 무슨 느낌인지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아실 거라 생각한다. 되게 섭섭하다고 생각하면서 취한 척을 하고 한 두 시 쯤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로손에서 컵라면이랑 타마고 샌드위치를 샀는데 이날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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