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16~25⑤
어떤 관계든 더 이상 밀당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나으 솔찍헌 심정이다. 4일 중 이틀은 즐거웠고, 이틀은 몸서리쳐지도록 지루했다. 그 재미의 진폭 사이에서 나는 겨우 ‘기대하지 않는 나’의 이미지를 스스로 세뇌해 보려 했으나...
살짝 취해서 기분 좋은 상태로 진입한 바에는 감독이 있었다. 이렇게 만나는 것이 내게는 제일 마음이 편하다. 나야 여행자라 남는 게 시간이지만 이들은 여기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약속도 고맙고 좋지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항상 존재했다. 뭘 먹고 뭘 했는지 물어오는 그들에게 성의껏 답하고 취한 김에 먼저 내 MP3 연결해도 되냐고 말한 다음 가라오케 타임을 시작했다. 아직도 도쿄인에게 있어서 민폐의 기준선을 잘 모르겠는 내게는 이조차도 큰 용기다. 나는 관광객, 이들은 관광지에 사는 착한 사람들이라고 마음을 누른 후에는 오히려 더 응석부리기가 쉬워졌다. 어쩌다 삐끗해서 미움 받더라도 안 보고 살면 그만이라는 거다.
그러던 중 치쨩이 바로 들어왔다. 내가 없으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다행히 내가 있었다며 웃었다. 그런 행동에 나는 흔들린다.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사진도 없을 만큼 마셨다. 동이 터 오는 정도가 아니라 자괴감이 들 만큼, 텔레토비 동산의 햇님 만큼 해가 걸릴 때까지 마셨다. 손님들이 들어왔다가 한 잔씩 걸치고 나가는 사이 자리를 지키던 나 포함 네 사람 중 셋은 잠이 들었다. 바 주인상이랑 나만 남아서 음악을 듣는데 이 양반도 취해서 좀 지겨울 정도로 자신의 음악관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치쨩은 아침에 일 가야 하는데... 슬슬 걱정이 됐다. 자는 이들을 흔들어 깨운 후 아침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냥 동네 마츠야나 가면 될 것을 치쨩은 날 생각해서 츠키지까지 가자고 한바탕 고집을 피웠다. 다행히 감독 선에서 저지되어 우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빵냄새가 진동을 하는 오샤레한 식당에 들어가서 과도하게 오샤레한 아침을 먹었다. 일 가는 치쨩이 추워 보여 내 머플러를 벗어 둘러주고 보냈다.
겨우 집에 들어왔는데 커튼이 없는 방이라 너무 괴로웠다. 정말 거의 완벽한 방이었는데 나같은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햇빛을 피해 까무룩 잠이 든 후 일어나니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ㅋㅋㅋㅋㅋ 비가 잔뜩 내렸으니 돌아다니기도 뭐해서 그칠 때까지 기다린 후 밤 10시 쯤 이날 첫끼를 먹으러 나왔다. 시부야 돈테키에서 나는 일본인이 소식가라는 말이 구라임을 절감했다. 매번 엄청난 밥 양에 놀라곤 한다.
화요일은 늘 가는 바가 쉬는 날이라 밥먹고 잠깐 카페에서 밍기적대다가 내가 인스타 업뎃을 할 때마다 기계적으로 하트를 눌러 주는 주인상이 있는 가게로 갔다. 오토시와 레몬사와를 주문했는데 저번에 방어 사시미가 나왔던 걸 생각하면 살짝 부실했다. 항상 입을 닫고 있어서 날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요요기에 묵어? 인스타 봤어”라고 말해줘서 좀 감동을 했다. 그래서 잠깐 신이 나서 벚꽃 정보 같은 것을 묻다가 다시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어리광의 일환으로 치쨩에게 라인을 보내 두었는데 신바시에서 회식을 하고 있다고 했다. 뭐 그런갑다 했는데 또 마시자는 식으로 답장이 와서 기다리는 김에 한 잔을 더 시켰다.
치쨩이 제안한 곳은 감독이 좋아한다는 바였다. 여기서 자주들 마시는 것 같아서 나도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또 이리로 약속이 잡혔다. 그래서 나 먼저 가 있겠다고 하고 그 술집에 데뷔했다. 생각보다 조금 무서운 분위기였다. 아는 사람도 1도 없어서 바 구석탱이에 앉아서 담배나 피우고 있는데 바텐상이 일 끝나고 오셨냐며 말을 걸었다. 그래서 나 한국인이고 지금 관광 중이라고 하니까 아이고 이리로 오시라며 바 가운데 앉혀줬다. 좀 어린 애도 한 명 있었는데 젊은 여자들은 한국에 관심도 많고 한국말도 제법 해서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내 옆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나를 안다고 했다. 누구지...? 솔직히 기억 안 나는데 아는 척 할 순 없어서 언제 뵀더라...? 라고 물으니 지난 번에 내가 미치코상이랑 있을 때 포도맛 나는 술을 얻어 마셨다는 것이다. 와 그래도 전혀 모르겠고 포도맛 나는 술은 이번에 가져온 청포도에 이슬 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일단 어쩔 수 없이 굉장히 반가운 척을 했다. 나중에 치쨩이 오고 나서 옆에서 그의 이름이 들리자 생각이 났다. NHK 다니는 하쿠타상. 그래서 나가기 전에 이름 기억났다고 말한 후 여자애랑은 페친을 맺었다.
3차는 맨 처음 요요기에서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며 묵었을 때 치쨩, 감독, 키라, 카츠가 데려가 준 나나메였다. 알콜쓰레기에서 환골탈태한 나는 멀쩡했지만 치쨩은 좀 취해 보였다. 어쨌든 가자니까 오랜만에 갔는데 무려 석달이 지났음에도 주인 텟쨩상이 나를 기억해서 깜짝 놀랐다. 처음에 그 좁고 경사진 계단을 오를 때 “둘이 오랜만이네”라고 해서 흘려 들었는데 다시 나와서 저번에 오고 오랜만에 또 왔다며 반가워 하기에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제일 단 술을 주문했더니 베일리스 밀크가 나왔다. 그래 달아버리려면 이 정도는 달아야지... 텟쨩상이야말로 나의 구미를 완벽히 맞춘 바텐상이었다. 내가 이때의 맛을 잊지 못해가지고 한국에 와서 매일 베일리스로 나발을 불고 있다.
나나메에는 앗쨩과 첫날 딸기술을 사준 레스토랑 사장님이 있었다. 사장님은 오늘 생일인 듯했다. 그래서 전에 없이 취한 모습이었다. 뭐라고 말은 하는데 전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앗쨩이 말을 걸자 치쨩은 상당히 귀찮아 보였다. 쉬는 날 있냐고 묻는데 웃는 얼굴로 요즘은 없다고 그짓말을 하기에 속으로 웃었다. 바로 다음날이 치쨩 쉬는 날이라 나랑 점심밥부터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베일리스 밀크를 원샷하다시피 하고 치쨩을 집에 보냈다. 텟쨩상이랑 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