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16~3.25⑥
짧게 끝날 줄 알았는데 점점 말이 길어지는 것을 느낀다. 어쨌든 이제 도쿄를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전날 치쨩과 약속한대로 3시에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기 때문에 한 시 반쯤 일어나 느릿느릿 준비를 했다. 어제 나나메에서 만난 아저씨가 사장으로 있고, 카츠상이 알바하는 가게다. 처음에 발음을 ‘딧슈’라고 해서 뭔 말일까 했는데 ‘dish’였다. 당연히 치쨩이 늦을 걸 알았기 때문에 설렁설렁 나갔다. 어김없이 늦어서 먼저 주문을 해 두었다. 라자냐는 양이 정말 심하게 많았다. 견디지 못하고 거의 1/3은 남긴 듯하다. 맥주를 곁들여서 먹고 치쨩의 안내로 4시부터 연다는 바를 찾아갔다.
나나메 만큼이나 숨겨져 있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목소리가 멋있는 주인 보보상이 “너네들 대체 몇 시부터 마실 셈이야”라고 장난을 걸었다. 나랑 초면인데 굉장히 본 적 있는 사람처럼 대하기에 왜 그런고 했더니 이미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본인들 소문 무섭다... 회사 때려쳤을 때 이 동네 사람 다 알고 있던 것처럼... 나에 대해 뭔 얘기를 했는지 궁금했지만 뭐 해봤자 80년대 음악 빠삭한 한국 여자애 정도로 얘기했을 것 같아서 물어 보진 않았다.
이날은 정말 나 자신 칭찬해... 리액션의 수준이 이미 일본인의 그것을 넘어섰다. 뭐 하여튼 내놓기만 하면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만족감인 것처럼 개호들갑을 떨게 됐다. 도쿄에서 좀 있다 보니 그렇게 돼 버렸다. 솔직해지는 것보다 앞 옆 사람이 만족하는게 더 행복하지 않은가.
별 생각 없었는데 또 감독하고 카츠상을 불렀나보다. 피곤해 보이는 아저씨들이 들어와서 좀 놀다가 뭔가 야끼를 먹이고 싶었는지 이동하게 됐다. 자기들끼리 얘기 끝내지 말고 나도 좀 껴서 의논 좀 같이 했으면 좋겠건만... 몬자야끼냐 오코노미야끼냐 고민하다가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사사즈카에 있는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끼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카츠상과 감독이 히로시마 출신이라 또 부심을 잔뜩 부리는데 참 구여운 아저씨들이라고 생각했다.
여행 기간을 잘못 잡았나 싶을 정도로 도쿄는 개추웠다. 진심으로 1월이 훨씬 따뜻했던 기억이다. 오들오들 떨면서 도착한 오코노미야키집. 감독은 이미 딱 봐도 취했는데 안 취했다고 미친듯이 우겼다. 어느 순간부턴가 감독과 나는 마치 같이 살 만큼 산 노부부 혹은 초딩 짝꿍 같은 느낌이 돼 있었다. 서로 뭘 봐 임마? 밖으로 따라 나와 이러고 놀곤 하는데 언제부터,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히로시마인들이 자만하는 오코노미야키에도 엄청난 리액션을 퍼부었지만 맛은 마아마아...
벚꽃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도쿄에서 꽃 핀 곳을 봤는데 야스쿠니였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처음에는 한국인이라면 절대 가지 않을 곳이라기에 어딘데? 물으니 야스쿠니라고 했다. 나는 “야스쿠니는 인간으로서 안 가고, 메이지는 한국인으로서 안 간다”고 답했다. 늬들 설마 거기 가서 참배하니? 라고까지 물었다. 뭐 잠깐 숙연해지긴 했다. 감독이 역사 관련해서 또 반성하는 듯한 얘기를 꺼내기에 “너네가 전쟁 일으켰어? 나도 전쟁의 직접적 피해자는 아냐. 그러니까 지금의 일본인을 미워할 이유는 없어. 다만 역사적으로 잘못한 것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반성해야 한다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감독은 감동한 듯 손 닦은 물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이 얘기를 하면서도 감독이 “미안해, 좀 진지한 말인데”라고 해서 참 일본인들이란 무슨 대화를 하며 사는 건지 궁금해졌던 부분이다.
오코노미야키로 성찬을 하고 난 후 또 예의 그 바로 향했다. 이날은 그 가게가 치쨩이 일하는 바인 사바스와 콜라보 영업을 하는 날이었다. 카츠상은 먼저 집에 가고 1시쯤 택시를 타고 사바스로 가는데 택시비가 이렇게 비싼데도 참 잘 탄다 싶었다. 걸으려면 걸을 수 있는 거린데... 히데상 부부가 시킨 물담배를 나눠 피우면서 치쨩이랑 감독이 머리 끝까지 취한 꼴을 봤다. 나도 꽤 졸음이 와서 한 5분 정도 눈을 붙이고야 말았다. 그러다가 셋이 집에 가자며 나오는데 주인상들이 못 가게 계산을 안 해 줬다. 그렇게 조금 더 개기던 중 감독이랑 나는 방향이 같아서 택시를 나눠 타자고 하다가 갑자기 치쨩까지 함께 4차를 가게 됐다. 아니다... 5찬가? 6찬가?
어제 2차로 갔던 그 바다.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셋이 옹기종기 앉아서 야한 얘기를 실컷 했다. 감독은 중년 답게 “뭐 재밌는 일 없나?”를 반복했다. 난 중년이 아닌데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이때부터는 치쨩이 조금 의식됐다. 뭔가 치쨩이랑은 화제다운 화제가 잘 나오지 않는데 감독이랑은 얘기가 잘 되니까 셋이 있을 때는 거기에 빠져서 이 애를 신경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런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싫기 때문에 나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어서라도 얘기거리를 만들곤 한다. 좀 더 솔직하고 애 같은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또 한 번 어딜 가나 나한테 사람을 사귀는 것은 재밌으면서도 힘든 일임이 느껴졌다. 5시 무렵 나를 데려다 주겠다는 감독과 치쨩을 만류하며 귀가했다. 나의 간은 이제 튼튼데쓰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