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지산밸리록 뮤직 앤 아트 페스티벌 레드핫칠리페퍼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취미를 묻는 질문에 독서, 음악 듣기, 영화 보기라는 답을 내놓곤 한다. 아주 무난한 답변이라서기도 할 테지만,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취미든 특기든, 우리가 향유하는 콘텐츠들은 거의 모두가 이 방대한 문화/예술의 영역 안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의 취미도 별 다를 바 없이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 영화’라든가, ‘인생 밴드’에 관한 화제가 나오면 늘 곤란해졌다. 보고 들은 것들은 점점 늘어났고, 그 가운데는 감상한 시간이 아까워지는 쓰레기도 있었던 반면 완벽히 나를 만족시킨 작품도 많았던 탓이다. 한 번은 블로그에 나의 인생 영화들을 정리해 보려다가 31개가 넘어가는 시점에 손을 놓았던 적도 있다.
그래도 내가 즐기는 것들 중 최고의 작품에 ‘인생○○’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싶은 욕심은 계속 있었다. 처음 이 표현을 접했던 것은 정확히 십 년 전이었다. 갓 스무살이 됐던 내게 엄청난 영향을 줬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인생 밴드로 큐어를 꼽았었다.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나의 ‘인생○○’ 찾기는 그를 향한 열등감으로 시작됐다. 지금은 이렇게 많은 음악과 영화를 듣고 봐 놓고는 그 중 최고를 선뜻 추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어 이를 그만 둘 수 없게 됐지만. 영화 글로 졸업을 하고 영화 기자까지 하고 있는 마당에, 하루에 최소 서너 시간은 음악을 듣고 매번 저장 용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제일 좋았던 게 뭐예요?”라는 물음에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게 이상하게도 내겐 컴플렉스다.
시간이 흐르고 내게도 취향과 주관이 생겼다지만 아직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 중에 얼마나 많은 보석들이 숨겨져 있을지는 미지수니까. 하지만 즉답은 못하더라도 몇 마디는 할 수 있게 됐다. 스탠리 큐브릭과 세르지오 레오네가 나를 실망시킨 적은 없다든가, 말콤 맥도웰이 나오는 영화는 믿고 본다든가. 인생 밴드에 대한 질문에는 이제 주저하지 않는다. 레드핫칠리페퍼스와 카사비안이 내 인생 밴드다.
그 중에서도 레드핫칠리페퍼스는 전주 만으로도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밴드다. 멜로디컬한 기타 리프와 그루브 충만한 드럼 비트는 물론 한 여름에도 헤드폰을 쓰고 다닐 만큼 둥둥 울리는 베이스에 집착하는 내게 레드핫칠리페퍼스 만큼의 전율을 준 밴드는 없었다. 2002년 중3이었던 나는 이들의 내한을 놓쳤다. 이걸 놓쳤다고 하기도 부끄럽게 그냥 지나갔다. 2006년 펜타포트를 시작으로 대형급 락페스티벌이 열릴 때마다 레드핫칠리페퍼스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던 이유다. 새 앨범 나왔는데 우리나라 왜 안 와. 안 내도 딴 데는 가면서 한국 왜 안 와. 그러는 동안 존 프루시안테가 밴드를 완전히 떠나기까지. 비행기표를 함부로 끊지 않은 내 자신이 매 순간 원망스러웠다. 라디오헤드가 온단들 그저 심드렁했다.
2016년 후지락페스티벌 라인업에 레드핫칠리페퍼스가 뜬 순간 나으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번만은...! 그리고 나의 하트비트에 그들은 응답했다. 14년 만의 내한. 이건 뭐 과부빚을 내서라도 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7월 22일, 날짜까지 확정된 순간 나의 휴가 날짜도 정해졌다.
한 번의 위기가 있었다. 내 휴가를 내 마음대로 쓰는데 욕을 먹었다. 그것도 남들 다 12일 꽉꽉 채워서 쓰는 와중에 나는 고작 금요일 이틀을 냈다고! 욕을 먹었다. 심지어 첫 번째 휴가 때는 아무도 안 챙긴 일정까지 챙겼는데 욕을 먹었다. 그래서 14년을 기다린 22일은 전화기를 붙잡고 무릎을 꿇어가며 얻었다. 그리고 욕을 먹었다. 더러운 세상이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욕을 먹었다.
아무튼 이날을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레드핫칠리페퍼스와 스테레오포닉스 전 4팀은 전혀 모르는 밴드였다. 이천버스터미널에서 내려도 지산리조트까지의 교통편은 도보 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는 역시나 틀렸고 올 여름 최고 폭염이 정수리로 쏟아졌다. 그럼에도 맨 앞 정 가운데 펜스를 잡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찍 갈 필요가 있었다. 서울역까지 와서 12시 셔틀을 타고 1시께 지산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다. 락앰링 등 직전 공연들을 예습하며 눈물샘 체크까지 마쳤다.
아슬아슬하게 11시 55분 정도에 버스를 탔는데, 웬걸 뒷차 기사가 당일 스케줄을 펑크내서 내 뒷사람들은 땡볕에 한 시간을 그저 서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들이 겪은 심신의 피로와 손해를 지산 측이 어떻게 보상해 줄 지 함께 분노하며 1시 10분 쯤 티켓 교환처에 도착했다. 그렇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더위를 뚫고 메인 스테이지로 향하는데!!!!!!!!!! 이미 펜스 근처로 약 6열 횡대가 밀짚모자를 쓴 채 가지런히 정렬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첫 공연도 전이었다. 나와 동행은 통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전날 노숙을 하지 않은 나의 부족한 열정을 탓하며 핫도그 하나로 주린 배를 달랬다. 직사광선이 사정 없이 내리쬐는 메인 스테이지를 바라 보며 고민을 시작했다. 야, 지금 들어가봤자 타 죽기 밖에 더 하겠냐? 두 팀만 끝나고 들어가자. 이쪽저쪽 그늘을 찾아 유랑하다가 화장실 뒤켠에 자리를 잡았다.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이소에서 산 휴대용 방석은 매우 작았다. 2000원이라 더 좋을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그늘에서도 부채질을 멈출 수 없는 더위는 우리를 타협하게 만들었다. 야, 한 팀만 더 보고 가자. 이른 저녁으로 새우버거까지 샀지만 반을 남겼다. 이제 슬슬 뭔가 뱃 속으로 넘어가지 않을 긴장이 온몸에 엄습한 것이다. 여태까지는 리플렉스 노래가 제일 괜찮았다고 생각하면서 세 번째 밴드의 무대가 끝나는 시점에 펜스(대개 닭장이라 부르는)로 향했다. 공연의 끝과 시작에 관객들의 이동이 제일 많기 때문이다.
역시 락페 관객 10년차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었다. 늦게 온 주제에 확보할 수 있는 최고의 시야를 얻었다. 로우다운30의 공연은 좋았다. 스테레오포닉스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곡 Maybe Tomorrow를 떼창하며 시간을 보냈다. 허나 체력은 이미 방전됐고 이제부터는 정신력의 영역이었다. 더 흘릴 땀도 없었고 골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7년 펜타포트 때 뮤즈를 두 시간 넘게 기다리며 CD를 부수고 싶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지금에 만족하려 애썼다.
이윽고 열시. 이쯤 되면 레드핫칠리페퍼스를 관객들과 연호하며 빨리 나오라는 압박에 동참할 법도 했지만 이 시점에서 내 몸의 기관 중 살아 있는 것은 눈과 귀 그리고 숨 쉬는 코 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대 위 불이 꺼지고 플리가 등장하자마자 그간 몸을 의탁하고 있던 펜스를 놓고 말았다.
(플리, 채드, 조쉬가 인트로잼을 하는 사이 웃통 벗은 앤서니가 등장했고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레드핫칠리페퍼스는 관객들과 방방 뛰며 시동을 걸다가 갑자기 Can't Stop의 전주를 시작했다. 애초 익숙한 패턴이었음에도 눈물은 이미 터졌고 무릎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주저앉을 뻔했다. 띠링디링디링디링디링~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가사들을 따라 부르는 동안 세포 시절 엄마 배를 걷어차던 힘까지 갑자기 솟았다. 목은 순식간에 맛이 갔지만, 이대로 한 시간 반은 버틸 수 있었다. 그렇다. 이미 나는 접신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방울만 손에 들려 주면 누군가의 복중 태아 성별 정도는 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그랬듯 곡이 끝나면 플리와 조쉬가 잼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다음 곡 전주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공연은 진행됐다. 이 드라마틱한 구성 덕에 이들의 무대는 미친 듯이 아름다웠다. 존 프루시안테는 없었지만 세계 최고의 베이시스트가 눈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벅찼다. 채드가 Dani California의 전주를 두드릴 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군중 속으로 파고 들어 있었다. 펜스고 시야고 일단 저 빛이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어떤 본능적인 본능이 작용했다고나 할까.
한 달 전 쯤 공개된 신보 뮤직비디오를 보고는 이게 레드핫칠리페퍼스인가 너무 힙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뇌를 꺼내어 흐르는 1급수에 깨끗이 씻어 장착하고 싶을 만큼 신보 퍼레이드는 존나 멋졌다. 요즘 공연 셋리스트에서 볼 수 없던 Parallel Universe에 울컥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날의 하이라이트를 Californication이라 감히 말하겠다. 그 전주가 예고 없이 튀어 나올 때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떼창이고 뭐고 통곡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나라 잃은 듯이 눈물이 나왔는데 지금 보고 있는 걸 또 볼 수 있을까 싶었던 마음도 포함돼 있었던 듯하다. 기대했던 Otherside와 Tell Me Baby는 아쉽게 하지 않았는데, 이걸 했으면 중간에 실신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경험했던 어떤 흥분보다도 고차원적이면서도 짜릿했던 순간들이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랑 원나잇 할래 레드핫칠리페퍼스 공연 맨 앞 펜스 잡고 볼래 하면 나는 고민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앵콜에 신곡을 넣은 것은 좀 아쉽기도 하고 의외였지만 Goodbye Angels도 충분히 좋은 노래였다. 그러나 이제 체력이고 정신력이고 끝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체감할 만큼 이성이 돌아왔던 순간이기도 했다. 입은 이미 기능을 상실했고 몸뚱이 만이 리듬을 타고 조건반사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한 엔딩 Give It Away 때 나는 하얗게를 넘어 까맣게 나를 불태웠다. 기부루웨이 기부루웨이 기부루웨이 나우. 나의 인생 고추들은 그렇게 무대를 떠났고, 내게 남은 건 흥분만 느껴지는 사진과 동영상 뿐... 고추 오빠들 환갑 맞으시기 전에 한 번만 비오는 날 와 주셨으면 좋겠다. 갑자기 존 프루시안테님까지 오신다면 더욱 좋겠고... 앤서니쨩의 마리오 같은 수염과 늘 탄탄했던 상반신 아무리 봐도 봉산탈춤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춤사위 그리고 플리의 무속인 혹은 각설이 같은 바지를 이렇게 크게 볼 수 있는 날이 또 올까.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 받아 울리오리다.
늬들이 오늘 수고했어.
늬들 공연 때문에 오늘 xx했어.
(바로 앞까지 온 플리를 찍으려다 저 지경의 사진이 나왔다. 토성의 고리를 연상시키는 저 빛들이 스테어웨이 투 헤븐 같지 않은가. _억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