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변했습니다…
“빅토리아가 한족이죠? 차오루는 묘족이고. 이런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이쪽(빅토리아)은 다수고 차오루는 마이너리티(소수 민족)니까. 우월감은 약간 있지 않을가 하는. 천박한 민족관이긴 한데, 그런 것 있죠?”
지난 27일 방송된 MBC ‘라디오스타’에서 MC 김구라가 게스트 빅토리아에게 던진 질문이다. 말을 내뱉은 자신도 마지못해 인정했듯, 천박하기 그지 없는 발언이다. 각자의 도덕적 가치관이 복잡하게 부딪히지 않더라도, 두 말 할 것 없이 ‘틀린’ 생각이다.
김구라의 토크 패턴은 최근 매번 이랬다. 자신만 알고 있는 것 같은 정보가 있으면 일단 던진 후 이를 대화의 흐름에 억지로 욱여 넣는 식이다. 빅토리아가 중국 내 다수인 한족이고, 차오루는 소수 민족인 묘족이라는 사실을 당사자 앞에서 언급한들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래서 김구라는 은근슬쩍 ‘우월감’ 이슈를 가져다가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했다.
‘라디오스타’ MC진도 이는 김구라의 의견일 뿐이라며 선을 그을 정도였다. 그 역시도 아차 싶었는지 “천박한 민족관”이라며 애써 자신을 깎아내려 발언의 무례함을 중화시키려 했으나, 애초에 그렇게 천박한 말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셀프 디스’를 한다고 수습이 될 리 만무하다. 중국 내 소수민족 차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고 있었어도 이러한 말이 나왔을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을 때 나오는 무례다.
이날 게스트들을 향한 김구라의 오만한 태도는 어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공평(?)하게 가해졌다. 충무로 씬스틸러로 자리매김한 배우 배성우가 영화 ‘베테랑’ 촬영 당시 에피소드를 공개하며 “스태프들끼리는 재미있는 장면이었는데 영화의 완성도 때문에 편집됐다”고 밝히자, 김구라는 화자의 말을 다 자르고 “넣었어야 해”를 반복했다. ‘태양의 후예’를 집필한 김은숙 작가와 과거 ‘상속자들’에서 호흡을 맞췄다는 최진호에게는 “(김 작가가)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는데 왜 ‘태양의 후예’에 부르지 않았나. 극 중 진구가 맡은 역이 어울린다”고 말해 그를 곤란하게 했다.
그의 혀에 돋친 가시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MC들도 찔렀다. 하등 토크와 관련 없는 잡지식을 뽐내면서 이를 모르는 동료들에게 ‘무지하다’는 딱지를 붙였다. 프로그램 특성상 이 같은 발언들이 다시 김구라에게 돌아가며 그나마 통쾌한 광경을 만들어냈지만, 그렇지 않은 방송에서라면 시청자들이 되레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다.
‘라디오스타’에서 김구라의 토크 스타일을 일컬어 ‘깔때기 토크’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농이 아니다. 고급 정보라 생각되는 것들을 어떻게든 이야기에 끼워 넣으려 하고, 게스트의 에피소드를 자신의 경험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가 틀렸음을 깨달았을 때도 그는 굽히지 않는다. 우기고, 정색한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악역은 자처할 지언정, 자신의 모자람은 단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 발언이 크게 문제가 됐을 때 쓰는 사과문을 제외하고는.
김구라는 막말 토크를 ‘솔직함’이나 ‘속 시원함’으로 포장해 인기를 얻은 대표적 방송인이다. 그가 이 같은 스타일을 시종일관 고수하는 동안, 세상은 변했다. 대중은 여성을 비롯한 인권 문제에 민감해졌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감수성도 높아졌다. 막말과 독설이 김구라의 고유 캐릭터라 포기할 수 없다면, 스스로가 브레이크를 거는 지점을 찾는 것이 방송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닐까.
‘입으로 흥한 자’가 입으로 망했고, 다시 한 번 입으로 재기했다. 그럼에도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대중이 완전히 등을 돌리기 전에, 무례를 입담으로 포장하려는 행동은 이제 그만둬야 할 듯하다.
[사진] ‘라디오스타’ 방송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