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극 끝에 찾은 네모난 희망
제이가 죽은 그 순간부터 스테파니의 세상은 빈껍데기가 되었다. 평온한 햇살은 소름 끼치게 무서웠고 자신의 살갗은 애석하게도 질겼다. 제이의 시신을 한국으로 운송시켜 장례를 치를 때까지 스테파니는 밤낮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어두운 방에서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지아는 경찰들의 손에 커뮤니티 케어 서비스에 맡겨졌고, 스테파니의 상태를 점검하러 온 직원들의 판단으로 지아는 며칠 지나지 않아 제이의 부모의 곁인 대한민국으로 이동되었다.
스테파니는 그저 자신의 뜯겨나간 심장의 위치에 텅하니 비어 있는 혈흔을 느끼며 제이의 모든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제이의 수백 가지 표정들과 제이와 나눈 모든 대화들을 떠올리고 떠올릴수록 스테파니는 당장이라도 제이를 만나러 떠나고 싶었다. 여경으로 배정된 사건 담당 경찰은 수시로 스테파니를 찾아와 강제로 입에 스프를 먹였지만, 혀끝에 느껴진 감각이 너무 증오스러워 구토하곤 했다.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병원에 이송되어 영양제를 맞고 있는 순간에도 스테파니는 제이의 눈에서 생명이 떠나는 순간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렇게 멍하니 제이의 기억들 속에서 수영하며 살아가다 보니 어느덧 스테파니는 다시 음식을 씹어 삼키고 눈꺼풀을 닫은 채 잠깐의 안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먹고 자는 일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의사는 스테파니를 퇴원 조치 시켜주었다. 그렇게 돌아온 자신의 집 앞 대문에서 느껴지는 냉랭한 고요에 스테파니는 잠시 멈춰 섰다.
극한의 상황은 낯설어야만 진정한 가치를 뽐낼 수 있다. 극한의 행복감만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그 행복이 얼마나 대단하고 희소한지 잊게 된다. 극한의 불행에 늘 내던져지는 사람은 그 불행의 슬픔에 무뎌지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극한의 행복과 극한의 불행에 매번 빠져 사는 사람들은 결국엔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다. 무료한 듯 공허한 표정. 이젠 이런 문 앞의 순간들도 스테파니에겐 그저 길고 뾰족한 바늘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졸린 듯했고, 하품까지 나올 것 같이 멍했을 뿐이다. 맥아리 없는 손으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괜히 편안한 느낌까지 들었다. 너무 모든 일이 평범하고 순조로워서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식탁 위의 물컵이 스테파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반이 안 되게 채워져 있는 물컵. 스테파니는 천천히 그 물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운전을 가르쳐주러 떠나기 전 제이가 한 모금 마시고 남긴 저 물컵은 스테파니에게 다시는 느끼지 못할 줄 알았던 감정의 파도를 몰아쳤다. 평소에 깔끔한 편이었던 제이에게 딱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었는데, 제이가 늘 마시던 음료나 물컵을 바로 싱크대에 정리해 두지 않고 아무 데나 올려둔다는 점이었다.
스테파니는 눈에 보일 때마다 한마디씩 잔소리를 하며 컵들을 치우곤 했는데, 어느 날 제이는 스테파니에게 물었다.
“스테파니, 혹시 내 주스 봤어?”
주스는 냉장고에 있다고 말하려던 찰나, 스테파니는 제이가 마시다 남긴 주스 컵을 설거지통에 넣어둔 걸 기억했다.
“아, 다 마신 건 줄 알고 버렸어. 다시 따라줄까?”
제이는 의아하다는 듯이 갸우뚱거리며 스테파니에게 말했다.
“나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왜 자꾸 내가 마시고 있던 음료를 가져다 버리는 거야? 나는 정말 내 컵에 발이 달린 줄 알고 한참을 찾아다녔어.”
그렇게 서로를 의아해하던 둘의 입가에 퍼진 미소는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번졌다. 그 후로 제이는 다 음료를 다 마신 컵은 스스로 바로 정리했고, 스테파니는 음료가 남겨진 제이의 컵은 그대로 자리에 둬 주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약속을 지키고자 남겨뒀던 물컵이 스테파니에게 남겨진 제이의 마지막 조각이 되었다. 그가 에스프레소 빛의 눈동자로, 따스하게 반달눈으로 웃으며 주방 테이블을 짚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제이가 돌아와서 마시려던 물은 이제 먼지가 가득했지만 마치 그 물컵은 제이가 스테파니에게 남기고 간 위로 같았다. 자신도 정말 떠날 줄 몰랐다는, 자신도 정말 떠나고 싶지 않았다는 위로.
그 순간 스테파니는 생과 사의 경계가 이 물컵만큼이나 가깝다고 느꼈다. 죽음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복잡한 우주의 확률 속 변수일 뿐이라는 사실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주었다.
잔인할 정도로 예측불가능한 이 죽음의 변수 앞에 모두가 동등한 확률로 존재했다. 스테파니는 그동안 자신과 제이만큼은 이 확률에서 예외적으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착각했었다는 뼈 시린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생명체는 생과 사를 넘나들고 있을 거라는 사실에 이 세상은 위대하고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누구나 똑같이 예측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이 세상은 모두에게 공평했다. 그렇다, 스테파니 또한 그저 공평한 돌림판 게임에서 우연의 일치로 거듭 연패했을 뿐이었다. 신이 그녀를 저주한 것도, 그녀가 무언가를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태초부터 한정된 자유를 숙명으로 갖고 태어난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을 최대한 있는 힘껏 해야 했다. 스테파니 또한 현재의 선택에 천천히 눈을 뜬 듯 오랫동안 잠들었던 정신을 깨웠다. 지아, 지아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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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는 먼지 쌓인 캐리어를 꺼내 던졌다. 캐리어는 입을 벌리는 괴물처럼 큰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가며 열렸다. 지아가 아끼던 인형들, 누구의 것인지 구분하지도 않은 몇 벌의 옷 그리고 탁자 위에 놓여있던 제이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캐리어에 쑤셔 넣었다. 집안의 온갖 물건들을 헤집으며 여권을 찾아 너덜거리는 토트백에 넣은 뒤 곧장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짐을 싸서 나가던 스테파니는 신발장 앞에 우뚝 서서 식탁을 바라봤다.
제이의 마지막 흔적을 이대로 두고 가자니 이번엔 스테파니가 제이를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공간이 멈춘 듯 식탁을 멍하니 바라보던 스테파니는 사뿐히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과 캐리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 발짝 한 발짝 물기 가득히 일렁이는 발걸음으로 제이에게 다가가 그를 집어 들었다.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미지근한 그를 음미하며 마셨다. 그는 스테파니의 목젖을 타고 체내로 흡수되어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제이를 속에 머금고 눈을 감은 채로 작게 속삭였다.
“제이, 너와 지아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행복을 선택할게. 그것만이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변수들 속 최선이야.”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유리컵을 싱크대 통에 넣은 채, 스테파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항을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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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혼자 도착한 공항은 낯설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놓일 듯 편안했다. 각자의 시간 속에 충실하며 현재를 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온갖 물건들을 발자국처럼 떨어뜨리며 전력 질주하는 젊은 커플, 비행시간에 넉넉하게 미리 도착한 듯 여유롭게 신문을 읽으며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 마시는 중년의 남성, 문제가 있는 듯 안내 로봇과 실랑이하느라 얼굴이 빨개진 젊은 여성. 그들은 열정을 다해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서로에게는 무관심했다. 그런 시끌벅적한 무관심 속에서 스테파니는 옅은 외로움과 짙은 자유를 느꼈다.
갑작스럽게 출발하는 서울 인천행 비행기표를 구매하며 최대한 저렴한 항공편으로 가기 위해 총 2번의 경유를 통한 21시간의 비행을 시작했다. 무거운 짐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캐리어와 다르게 통통거리는 가벼운 캐리어를 끌며 스테파니는 비행기에 올랐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 뼘의 공간에서 스테파니는 오랫동안 청하지 못한 달큰한 잠을 청했다.
정신없이 본능만을 좇아 한국으로 내달리던 스테파니는 마지막 경유지를 출발하는 비행기를 탄 후에야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인지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비행기 이륙 전 급히 어떤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과 달랐다. 그 손바닥만 한 사각형의 장치는 LED 빛을 쏘아내어 홀로그램으로 사람의 형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여자는 그 빛의 굴절이 만들어낸 형상과 대화를 하는 듯했다. 스테파니는 한국어를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여자는 큰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느끼며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마치 기계 속의 사람에게 혼이 나는 듯이 점점 여자의 고개는 숙여지고 그녀는 말없이 끄덕이기만 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며 통화를 끊은 여자는 바로 자신의 전자 패드를 꺼내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비행 내내 여자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모든 식사를 거절한 채 일에 몰두했다. 몇 시간이 흐른 후 일이 점점 안 풀리는지 여자는 답답한 듯 잠겨있던 셔츠의 윗단추를 풀어헤쳤다. 그때 그녀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함께 뜯어져 나가 스테파니의 무릎 위에 튕겨져 날라왔다. 말없이 스테파니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세상에 갇혀 있는 듯했다. 자기 목걸이가 뜯어진 줄도 모른 채 여자는 계속 목 주변을 만지작거리며 불편한 기색으로 모니터에 열중할 뿐이었다. 그런 여자의 집중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스테파니는 여자가 일을 잠시 중단할 때까지 그대로 기다렸다.
스테파니 무릎 위로 날아온 목걸이는 푸른 에메랄드 보석이 큼지막하게 박힌 고급스러운 골드 체인의 목걸이였다. 비행기가 미세하게 흔들릴 때마다 에메랄드 보석의 표면은 오로라처럼 일렁였다. 그렇게 홀린 듯이 보석의 빛깔을 바라보다 보니 비행기의 안내방송은 대한민국에 착륙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옆에 앉아 있던 여자는 급하게 전자 패드를 가방에 넣고 질끈 묶어놨던 머리를 다시 풀어 헤쳤다. 스테파니는 목걸이를 건네주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여자는 작게 화들짝 놀라며 스테파니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다시 여자의 통화 장치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급히 목례를 살짝 한 후 한 손으로는 통화 장치를, 한 손으로는 서너 개의 짐을 들고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 목걸이를 전해 주지 못한 스테파니는 갑자기 뒤섞여 출구로 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당황한 채 급히 가방을 꺼내 들고 여자를 뒤쫓아 나왔다. 최종 도착지가 대한민국이었던 터라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제이의 얼굴이 아닌 한국인의 얼굴을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 스테파니는 여자의 얼굴을 잘 기억해 내기가 어려웠다. 여러 사람들을 멈춰 세우며 목걸이를 보여주어도 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피했다. 졸지에 도둑질을 한 듯한 느낌이 들어 스테파니는 마음이 영 불편했다. 손에 꼭 쥔 에메랄드 목걸이는 점점 따갑게 손에 박혀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공항 출구 게이트 앞에서 서성거리다 화장실로 향한 스테파니는 그제서야 여자를 찾을 수 있었다. 여자는 거울을 보며 차분한 모브색의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살짝 기쁜 마음이 들었다. 여자에게 다가가 목걸이를 내밀었다.
"이걸 왜.."
여자는 경계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손 위 목걸이를 보았다.
한국어로 길게 설명하기 어려웠던 스테파니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한번 목걸이를 내밀었다.
“아, 제가 떨어뜨렸었나 보네요. 고마워요.”
고마워요라는 말은 익숙했다. 제이가 자주 하던 한국말 중 하나였다.
“문제없어요.”
스테파니도 낮고 작게 내뱉은 뒤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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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표지판은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여러 언어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스테파니는 쉽게 짐을 찾아 버스를 탔다. 자신을 돌봐주던 경찰을 통해 받은 제이의 본가 주소로 향하는 내내 스테파니는 비행기에서 본 여자를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가 들고 있던 그 장치를 떠올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한 후 그 장치가 울릴 때 분명 어떤 여자아이의 목소리로 ‘엄마’라고 말하는 듯이 울렸다. 엄마를 부르는 벨 소리라니, 무언가 기괴하다고 느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공항에는 엄마를 부르는 벨 소리가 여럿 퍼져있었다.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는 가지각색으로 달랐지만 모두 급히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엄마를 찾듯 애타게 엄마를 불러댔다. 그 장치가 무엇이며, 그 장치에서 만들어낸 형상은 누구의 모습이었을까.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어두운 스크린 도어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제이의 본가를 찾아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이는 어릴 적 미국에 오기 전 그의 고향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제이의 시각으로 그려진 대한민국은 기적의 땅이었다. 오랜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겪은 작고 힘없는 나라에서 매해 최고치를 경신할 만큼의 성장 폭을 가져간 국가는 유일무이했다. 세계 최고의 교육률을 보유한 만큼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전문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 결과 의료, 기술, 경제와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육각형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제이는 스테파니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이렇게 말했었다.
“대한민국이 대단한 이유가 뭔지 알아? 성장과 정,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다는 점이야.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성장을 주도해. 그리고 타인의 성장 또한 격려해. 모두가 나아가고 싶어 하고 나아가려고 노력해. 대한민국 사람들의 성장형 인생들이 모여 대한민국이 이렇게 거듭 성장을 이뤄온 거야.”
스테파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제이의 도톰한 입술은 자랑스러운 입꼬리로 올라가며 움직였다.
“정, 정은 뭔데?”
스테파니는 처음 들어본 정이라는 단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정은 대한민국에만 있는 말이야. 비슷한 말로는 친밀감, 애정 같은 게 있지만 대한민국의 정과는 모두 조금씩 달라.“
제이는 즐거운 주제를 찾은 듯 눈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한민국의 정은 오히려 정의로움과 닮았어. 내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고, 내가 충분히 보탤 수 있는 도움이 있다면 기꺼이 돕는 것이거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말이야. 그러니 이 정이라는 게 성장과 함께 공존하기가 정말 어려운 거야. 사람은 자신의 성장에 몰두할수록 이기적이고 치사해지잖아? 그런데 대한민국 사람들의 성장은 개인플레이야. 자신의 성장 최선을 다해 이뤄가면서 타인의 성장을 해치거나 인색해지지 않는 그 태도가 대한민국을 이렇게 크게 키워준 거야.”
스테파니는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가 이토록 애정을 담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상대가 무엇이든 스테파니는 행복감을 느꼈다.
온기를 품고 있던 제이의 얼굴이 조금은 어두워졌다.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보였다.
“스테파니,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내가 없어진다면 말이야. 지아와 함께 대한민국으로 가. 그 사람들의 정이 당신과 아이를 지켜줄 거야.”
왜 그런 무서운 이야기를 하냐고 다그치며 웃어넘길 수도 있을 얘기였지만 제이와 스테파니는 둘 다 고요했다. 적막을 채운 진심을 담아 서로를 그저 꼭 끌어안고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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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처음 밟아본 대한민국, 정과 성장의 나라는 푸르고 선명했다. 여름 햇살이 비추는 골목은 으리으리한 저택들로 가득했고 스테파니가 도착한 제이의 본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지는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킨 후 대문 앞 초인종같이 생긴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벽면만큼 커다란 검은색 유리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그 너머에는 푸른 초원 같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제이가 대한민국을 사랑한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도 아주 소수의 상류층에 속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느껴졌다.
정원의 중앙에 이어져 있는 돌담길을 건너면 금색으로 칠해진 대문이 있었다. 금색으로 칠해진 건지, 실제로 금으로 만들어진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게감 있게 찬란거렸다.
아무도 스테파니를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 그저 철컥하며 열린 대문을 밀고 스스로 자신을 초대해야만 했다. 냉기 서린 집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장식들이 배열을 띄며 걸려있었다. 스테파니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탈리아에 있는 박물관 같다고 느꼈다. 여러 작품이 벽에 걸려있는 긴 복도를 지나니 큰 거실 같은 공간이 나왔다. 넓은 거실에는 여러 색의 비즈들이 꿰어져 있는 커다란 소파와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그중 가장 큰 의자에 앉아 있던 제이의 어머니는 스테파니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넌지시 말했다.
“이제야 애 찾으러 오니?”
스테파니는 울음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참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자신이 남편을 잃고 무너져있는 동안 지아도 아빠를 잃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자신이 돌보지 못해 영문도 모른 채 먼 비행을 떠나야 했던 이 아이를 다시 데려갈 자격이 없어진 것 같았다.
“지아 어디에 있어요?”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감추며 물었다. 지아를 되돌려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제이의 어머니는 스테파니를 힐끗 쳐다보더니 차를 한입 마시곤 숨을 내뱉었다. 스테파니가 이제라도 아이를 데리러 왔다는 사실에 슬프기도, 안도하기도 하는 듯했다.
“네 애 안 뺏어가. 넌 내 아이를 뺏어갔지만 말이야.”
그제서야 제대로 마주한 제이의 어머니는 며칠을 잘 못 이룬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았다. 늘 매끈한 피부와 고운 머릿결을 유지하던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행색을 초라하게 입고 있었다.
“지아는 지금 위층에서 낮잠 자고 있단다. 일어나면 알아서 데려가렴. 다만, 조건이 하나 있어.”
스테파니는 지아가 무사히 잠을 청하고 있다는 소식에 안도한 채 그저 끄덕였다. 어떤 조건이어도 상관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 지아를 데리고 가더라도 이 나라에서 살렴. 그래야 네가 아이를 또 못 키우게 돼도 고아원이나 길바닥이 아닌 내 집에 아이를 버리고 가겠지. 내 손주를 너처럼 고아원 신세로 만드는 건 눈 뜨고 볼 수 없다.”
스테파니는 제이 어머니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고아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실 스테파니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 한 명도 없었기에 한국에서 살아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지아가 제이의 모국인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스테파니는 제이의 엄마가 내뱉은 비난 섞인 말이 협박인지 아니면 정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아이를 버릴 만큼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면 찾아오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걸 되묻기엔 너무 지쳤던 스테파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캐리어를 그대로 둔 채 터벅터벅 위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방이 여러 개 줄지어 있었지만 지아가 자고있는듯한 방문만 살짝 열려있었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아의 몸에 딱 맞는 작은 침대에서 지아가 쿨쿨 자고 있었다. 윤기 나는 얼굴은 제이의 엄마가 지아를 잘 보살폈다는 증거였다. 깊게 열을 내며 자는 듯 몽글몽글한 땀이 이마 위의 잔머리를 적셨다. 맛있는 꿈을 꾸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며 숨을 쉬어대는 작은 아이는 그토록 보고 싶던 제이의 얼굴과 닮아있었다. 스테파니는 바닥에 앉아 지아의 자는 모습을 보며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이 작은 아이가 스테파니에게 남은 유일한 우주이자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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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자던 지아는 깨자마자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엄마를 보고는 기쁜 소리를 지르며 와락 안겼다.
“엄마가 왔어! 할머니는 거짓말쟁이야!”
스테파니는 품에 안긴 지아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머니는 걱정되셨을 뿐이야. 엄마가 왔어, 이제 다 괜찮아.”
갈 곳을 정하지 못한 며칠 동안은 제이의 본가에 신세를 지며 지냈다. 미국에 있던 집을 팔고 제이의 사망보험금을 받아 서울의 작은 빌라를 구했다. 월세방이지만 지아를 키우는 데엔 손색없는 10평짜리 원룸으로 구했다. 이삿짐이라 부르기엔 적은 짐을 들고 지아를 빌트인 책상 위에 앉힌 뒤 몇 시간을 청소했다. 집안 온 구석구석을 닦고 또 닦았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두렵지만 오히려 스테파니는 초연했다. 뒤늦게 얻은 엄마로서의 두 번째 기회였다. 이번에는 지아를 위해 다시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
킴목사가 가져다준 물건들은 살림을 시작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되었다. 새로 산듯한 이불과 베개들, 접시와 수저들, 탁상시계와 램프들, 그리고 제이의 어머님이 직접 만드신 듯한 각종 반찬이 담겨있었다. 마치 어릴 적 고아원에서 킴목사 부부의 후원을 받을 때가 떠올랐다. 킴목사 부부가 여러 후원 물품들을 차에 싣고 고아원에 방문할 때면 제이가 가장 먼저 스테파니가 좋아하는 주스와 인형을 들고 뿌듯한 미소를 띠며 달려왔었다. 제이의 어렸던 웃음이 떠오르자, 스테파니의 마음은 아려왔다.
스테파니는 곧장 일거리를 찾아 구직을 시작했다. 한국에 와서 막연히 마트 직원이나 가정부 일을 구할 생각을 했었지만, 로봇 분야가 타국가에 비해 월등히 개발되어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대부분의 단순 업무는 이미 로봇들이 꿰차고 있었다. 로봇 사용률이 전 세계 1등인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다행히도 일부 학부모들은 아이의 정서발달을 위해 인간 선생님을 선호하는 추세였고, 그 덕분에 스테파니는 방문 영어 선생님으로 작은 과외 전문업체에 취직할 수 있었다. 면접 당시에 스테파니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여러 시험성적을 들고 갔지만 그저 몇 마디 대화만 나눠본 뒤 바로 면접관은 스테파니에게 다음날부터 출근하라고 말했다. 의아해하는 스테파니에게 면접관은 그저 한국 부모들은 파란 눈과 금발 머리를 한 외국인을 선호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보탤 뿐이었다.
그 후로 스테파니는 하루에 적으면 세 타임, 많으면 여섯 타임씩 아이들의 가정에 방문하여, 한 시간씩 놀이와 체험 위주로 영어를 가르쳤다. 일을 갈 때에는 제이의 어머니에게 지아를 부탁드렸다. 목 놓아 우는 지아를 애써 못 본 척하며 제이의 어머니께 돈이 담긴 봉투를 드리며 부탁했다. 제이의 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돈을 받고 지아를 집안으로 잡아끌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렇게 자신의 아이는 내팽개쳐둔 채로 다른 가정을 방문할 때면 깊은 곳으로부터 죄책감과 억울함이 몰려왔다.
스테파니가 방문하는 가정들은 모두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평온하고 따스한 가정이었다. 거실 한켠에는 벽면을 가득 채우는 책장들이 있었고, 윤기 나는 털을 가진 애완동물들도 여럿 키웠다. 이렇게 엄마와 아빠, 애완동물까지 모두 다 있는 어린아이는 지아에겐 유일한 스테파니마저 뺏어갈 수 있었다. 모든 걸 다 가진 아이와 모든 걸 다 뺏긴 아이를 보며 스테파니는 막연한 무력함을 느꼈다.
과외를 하다 보면 아이의 어머니는 참외, 수박, 딸기 등의 건강하고 귀한 과일들을 내어주었다. 종종 쉬는 시간이나 화장실을 사용하려 거실로 나가보면 부모들은 대개 작은 장치를 이용하여 열띤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과외가 끝나고 집을 나가기 전 현관문에서 스테파니가 한 아이의 엄마에게 물었다.
“아까 전화하던 기계 뭔가요? 엄마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아이와 닮았어요. 홀로그램도 아이와 닮았어요.”
아이의 엄마는 놀란 듯 작게 탄성을 외치더니 이어서 꺄르르 웃었다.
“아! 이건 인터랙트예요! 미국엔 아직 없나 보죠?”
아이의 엄마는 주머니에서 작은 검은색 장치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장치를 여니 아이와 똑 닮은 모습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아이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건 일종의 뭐랄까, 엄마 같은 거예요.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존재요. 아이를 잘 키울 방법을 다 알려주는 마법 상자 같은 거랄까요?”
아이의 엄마는 자신의 재치 있고 명료한 설명에 만족한 듯이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스테파니는 웃음기 없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 장치를 가리켰다.
“어디서 살 수 있어요?”
“아, 인터랙트요? 이거 인터랙트에서 구매한 후 구청 가서 받으면 될 텐데, 아마 시민권자여야 구매할 수 있을 거예요. 여권처럼요.”
아이의 엄마는 난처하다는 듯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미소를 지었다. 스테파니는 설명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후 문밖을 나와 다음 수업이 있는 집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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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하는 내내 스테파니의 머릿속에는 인터랙트밖에 없었다. 벨 소리 대신 엄마를 외치는 이 요상한 기계가 아이를 키우는 방법을 모두 알려준다니, 알 수 없는 욕심이 들었다. 이 물건을 꼭 가지고 싶다. 이 물건을 꼭 지아에게 선물해 주고 싶다. 되뇔수록 현실에 가까워지길 바라며 수없이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스테파니의 파도 같은 두근거림을 가로막는 것은 시민권이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화의 일환으로 시민권을 취득하는 일은 정말 쉬웠었다. 그 결과 한 명의 사람이 손쉽게 서너 개의 시민권은 기본으로 가져가는 시민권 남용 현상이 판을 쳤다.
그로 인해 국제 정치, 무역, 범죄 그리고 세금과 같은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골칫거리가 되었고, 이는 세계화를 넘어서서 전 세계를 하나의 국가처럼 작용하게 하는 단일화의 우려를 낳았다. 이에 각 국가의 정부들은 시민권 보호법을 개정하여 시민권 취득에 대한 기준을 거의 이루지 못할 정도로 높게 올려버렸다. 극단적으로 높아진 시민권 취득 허들로 인해 전 세계가 혼란을 겪었고, 이는 개인뿐만이 아닌 기업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세계로 뻗어나가던 기업에는 치명타였다.
이렇게 각 개인과 기업을 출생 국가에 제한하여 묶어두며 생긴 사회적 파장을 “플로어 체인” 현상이라 불렀다. 플로어 체인으로 인해 현재로썬 대한민국 시민권을 얻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질수록 스테파니는 아이들의 집에서 엄마를 외치며 울려대는 인터랙트 기기를 볼 때마다 자신의 아이는 엄마를 부를 목소리조차 뺏긴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스테파니가 영어 선생으로 일한 지 석 달이 넘어갈 때쯤에 회사에서는 새로운 영어 수업 커리큘럼을 출시할 예정이라고 했다.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 수업인데, 생활 회화가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이다 보니 책상 앞에서 수업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일상적인 활동들을 함께 하며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우는 취지의 수업이었다. 활동들은 수업 내용에 따라 달라지는데, 함께 식사하기, 조깅하기, 쇼핑하기 등 다양한 활동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과외 수업만으로는 벌이가 부족했던 터라 스테파니는 흔쾌히 수락했고 하루에 두타임씩 추가로 활동형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 몇 번은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남는 수업들이었다. 스테파니에게 배정된 활동 수업의 학생들은 전부 남자였고, 그들은 모두 영어 공부보다는 스테파니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있는 듯이 행동했다. 서로 어깨 안마를 해주는 활동을 하자는 남성도 있었고, 자신이 영어로 쓴 글을 소리 내 읽어달라는 남성도 있었다. 그 글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는 듯했는데, 스테파니는 모르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있는 듯이 특정 부분을 읽을 때면 남성은 갑자기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거나 킥킥 웃었다. 방문 과외보다 소요되는 시간이나 에너지가 크다 보니 급여가 두 배가 넘게 높았기에 어느 정도 참아가며 쭉 수업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스테파니는 방문 과외 수업을 세 타임 진행한 후 녹초가 되어 활동형 수업을 하기 위해 한강공원으로 갔다. 함께 자전거를 타는 일정이었기에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캐나다에서 자주 자전거를 타고 약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 오곤 했는데, 그 시간이 꽤나 온전한 평화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살랑이는 바람결과 미적지근한 햇살이 떠오르자, 스테파니의 마음은 오랜만에 살짝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해가 쨍쨍하게 떠 있는 나른한 오후라 흰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이 청아하게 예뻤다. 스테파니는 어릴 적부터 솜뭉치같이 생긴 뭉게구름을 좋아했는데, 그날따라 하늘에 둥실거리는 구름이 보드라워 보였다. 살짝 들뜬 마음을 누르며 만남 장소에서 기다렸다. 시간을 딱 맞춰서 도착한 수강생은 검은색 모자를 쓴 젊은 남자였다. 매우 큰 키를 가진 학생의 옆에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녹슨 자전거가 서 있었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학생은 급히 온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티셔츠는 땀으로 젖어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자전거를 가져온 상태였기에, 스테파니만 추가로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게 그녀를 대여소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타고 달리는 자전거는 상쾌하고 즐거웠다. 수강생은 한강공원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지점까지 안내하겠다며 스테파니보다 앞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스테파니는 그저 주변을 만끽하며 그를 따라 달렸다. 거리가 꽤 멀었던 탓에 영어로 대화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자전거를 탄 후 수강생이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면 간단히 자전거를 탄 소감이나 그 장소에 대한 설명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한강 물결은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새들은 스테파니의 곁을 따라 자유로이 날아다녔고, 스테파니의 긴 머리카락은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자전거 도로 옆 산책로에는 손을 잡고 다정히 걷는 연인들과 정신없이 킁킁거리는 강아지들이 산책하고 있었다. 조금씩 마음이 놓인 채로 스테파니는 사색에 잠겨 하늘을 바라보며 페달을 밟았다. 허벅지에 느껴지는 힘과 조금은 불편한 자전거 시트 모두 오랫동안 잊고 살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한참을 따라 달리던 중 스테파니는 언뜻 자신의 주변이 풀숲으로 둘러싸여져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어느 순간부터 콘크리트였던 길은 좁은 흙길로 바뀐 지 오래였다. 많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끝이 안 보이는 숲길에는 스테파니와 수강생밖에 없었다. 갑자기 느껴진 변화들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수강생은 말없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스테파니는 수강생의 뒤통수를 향해 그의 이름을 여러 번 불렀다. 그는 못 알아들은 듯 고개를 잠깐 뒤로 돌려 스테파니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가기만 했다.
그의 뒷모습은 어딘가 급해 보였다. 빠른 페달 질로 인해 뻐근해진 스테파니의 다리와는 달리 수강생의 다리는 쉼 없이 빠르게 페달을 밟았다. 잠깐 뒤돌아보았을 때 스테파니가 보았던 수강생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는 게 취미인 사람은 저런 표정으로 달리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멈추고 되돌아가는 게 맞을지 여러 번 고민하며 페달을 밟다 보니 수강생은 어느덧 장소에 도착했다며 자전거에서 내렸다. 스테파니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숨기려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배수구가 돌출되어 있는 풀숲이었다. 풀숲 바닥에는 미리 깔아둔 듯한 담요가 돗자리마냥 깔려있었다.
그 담요를 본 순간 스테파니는 척추부터 소름이 돋았다. 이 담요를 깔아두기 위해 수강생은 미리 이곳까지 왔다가 온 것인가? 그제서야 처음 학생을 보았을 때 학생의 목에 흐르던 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스테파니와 학생의 주변에는 빽빽한 나무들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즉, 아무도 자신 또한 볼 수 없었다. 학생은 이제 대화를 좀 해보자며 모자를 벗고 담요 위에 털썩 앉았다. 그의 얼굴은 회갈색의 죽은 자 같은 낯빛을 띠었다.
직감적으로 도망가야 한다고 느꼈다. 스테파니는 몸이 굳는 걸 애써 깨어낸 후 자전거를 타고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이미 담요 위에 누워있듯 앉아 있던 남자는 크게 욕을 내뱉으며 스테파니를 향해 달려왔다.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남자가 따라오기 쉬울 것 같아 일부러 더 깊고 울창한 풀숲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무언가 위협적인 말들을 소리치며 뛰어오다 어느 순간 스테파니를 놓친 듯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정신없이 멈추지 않고 달렸다. 커다란 나뭇가지에 걸려 자전거가 뒤집어지고 넘어지자 그대로 자전거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드디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한강공원의 한 들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스테파니의 땀이 눈물과 섞여 온몸을 찐득거리게 덮었다. 적당히 소매로 얼굴을 닦은 채 들판의 한구석에서 서성거리며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봤다.
들판에는 지아 또래의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뛰놀고 있었다. 모두 예쁘게 가꾸어진 아이들이었다. 반질거리는 머릿결과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아이들은 자신보다 갖추어진 어른의 면모를 하고있었다. 흰 천으로 덮인 커다란 테이블들이 줄지어있는 한켠에는 아이들의 부모로 보이는 어른들이 둥글게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 여유로운 표정과 몸짓으로 서로의 고급스러움을 뽐내려는 듯 하하호호 웃고 있었다. 멋진 손목시계와 구두를 신은 남자들과 커다란 주얼리와 고풍스러운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은 스테파니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스테파니는 방금 자신이 경험한 한강공원과 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한강공원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우주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멍하니 그들을 선망하며, 또는 원망하며 바라보던 중 그 부모들의 짐이 쌓여있는 선반을 보았다. 거기에서는 엄마를 외치는 인터랙트의 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울리는 인터랙트 기기를 응시하다, 그 어른들을 보았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만의 우주에 빠진 듯 주변의 것들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스테파니는 다시 천천히 엄마를 애타게 찾는 인터랙트를 응시했다.
모든 걸 가진 듯한 이 사람들 중 한 명쯤은 인터랙트를 뺏겨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자신의 아이에게서 아빠와 엄마를 모두 뺏어가려는 이 세상에서, 스테파니는 이정도 작은 조각은 훔쳐다가 자신의 아이에게 주어도 신이 용서해 줄 것만 같았다. 훔쳐 온 행복이라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뜨겁게 차올랐다.
스테파니는 차분하지만 빠른 동작으로 주인 모를 인터랙트를 집어 들었다. 벨 소리를 끄는 법을 알지 못했지만, 여러 버튼을 아무렇게나 누르니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검붉게 물든 소매 속에 인터랙트를 꼭 쥔 채 황급히 공원 출구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맹목적으로 출구만을 보며 걸어가던 스테파니는 한 여자와 부딪혔다. 여자는 걱정이 되는 듯 스테파니를 멈춰 세우려 했지만, 스테파니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을 남긴 채 빠르게 여자를 지나쳤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낯이 익은 듯한 이상한 감정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한 채 스테파니는 급히 한강 제6 공원이라 쓰여있는 출구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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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쿵쾅거리며 날뛰었다. 당장이라도 경찰관이 나타나서 자신을 체포해 갈 것만 같은 느낌이 늘었다. 작은 새가 날아가는 움직임에도 철렁이는 냉기가 온몸을 관통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기에 되돌릴 수도 없었다. 어느새 스테파니는 아이를 열심히 키우려던 홀어머니에서 타인의 자산을 훔친 도둑으로 변해있었다. 스테파니의 인생에는 여러 차례의 비극들이 있었지만, 자신과 아이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해 내더라도, 배고픔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새벽 내내 뜬눈으로 벌벌 떨며 지냈더라도, 한 번도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었다.
그랬던 스테파니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어둠의 세계로 발을 들인 것 같았다. 자신이 힘들지만 정의롭게 살아내던 인생이 송두리째 흠 잡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망스럽고 억울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언제나 그랬듯 스테파니의 화를 받아줄 대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할지 모르겠는 이 막연한 분노는 스테파니를 더욱 깊게 지면으로 끌어내렸다.
어릴 적 고아원에서 자신의 물건을 도둑맞은 적이 있었다. 아이를 입양하겠다며 고아원에 찾아온 중년의 부부는 이미 한 명의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 아들은 고아원 이곳저곳을 살피며 조심성 없이 모든 물건을 헤집어 놓았다. 원장님이 아끼시던 촛대를 떨어트려 휘어지게 했고, 아이들이 순서를 지키며 조심스레 치던 피아노의 건반들을 주먹으로 쿵쿵 내리쳤다.
스테파니는 가장 나이가 많은 맏언니였기에, 그 아이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안녕, 나는 스테파니라고 해. 이곳은 나와 이 아이들의 집이야. 우리의 물건들을 조금만 더 조심히 다뤄주지 않겠니?”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싶던 스테파니의 가장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부탁이었다. 아이는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스테파니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스테파니의 방을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동생들을 지켜준 영웅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기쁜 마음에 스테파니는 아이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문을 끼익 열어 자신의 작은 방을 소개하던 순간 아이는 갑자기 관심이 없어졌다는 듯이 휙 하고 돌아 나가버렸다.
그렇게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가 떠나간 후, 스테파니는 저녁 식사 정리를 도운 뒤 샤워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빗기 위해 침대 옆 간이탁자에 올려두었던 머리빗을 집어 들려던 찰나에 스테파니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머리빗이 있어야 할 자리에 머리빗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부러진 피아노 건반 한 개가 놓여있었다.
스테파니의 비명소리에 놀라서 달려온 원장님께 스테파니는 그저 벌레를 보았다고 둘러댔다. 자신이 오늘 자랑스럽게 여겼던 행동을 이렇게 망쳐버리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역시나 누군가를 지켜주거나 누군가의 영웅이 된다는 일은 스테파니에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부러진 건반을 매트리스 사이에 밀어 넣은 채 아무도 모르게 이 사건의 최종 결말을 숨겨버리고 싶었다.
그날 이후 스테파니는 머리를 빗을 수 없었다. 몇 번은 동생들에게 멋쩍게 웃으며 머리빗을 빌려서 썼지만, 고아원에서 자산을 잃어버린다는 일은 일반 가정에서의 일보다 큰 사건이었다. 개인의 물품은 쉽게 다시 구매해 줄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분실이나 도난 사고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곱게 찰랑이던 스테파니의 머리카락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엉켜버리고 푸석푸석해져갔다. 한동안 더위를 핑계로 머리를 묶고만 지냈지만, 매번 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엉켜버리는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깊은 곳에서부터 서러움이 치솟았다.
자신이 무얼 그리 잘못했길래 그 아이는 쓰지도 않을 머리빗을 훔쳐 갔을지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그 행동을 정당화할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 아이는 쉽게 장난삼아 가져갔을 수도 있는 그 머리빗 때문에 스테파니는 결국 몇 달이 지난 후 머리를 싹둑 짧게 잘라버렸다.
이후 제이의 도움으로 머리빗을 새로 얻은 후부터 스테파니는 다시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지 않았다. 단발머리 자신의 모습도 충분히 어울렸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눈물을 삼키며 머리를 자르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물건들을 모두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녀는 도둑질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한 부모의 육아 비법을 훔치고 싶지도, 한 아이의 미래를 망가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스테파니는 그저 지아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비록 부족한 자신이 지아를 키우더라도, 지아는 부족함 없이 크길 바랐다. 이런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그 순간의 자신이 처참하게 싫었다. 그 방법을 실천에 옮긴 자기 자신이 너무 밉고 그보다 더 불쌍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잡으러 올 것 같다는 불안함도 멎은 채 한참을 멍하니 인터랙트를 쥐고 걸었다. 생각이 바람을 타고 돌고 돌다 보니 결론이 또렷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스테파니는 자신을 더럽혀서라도 지아만은 깨끗한 삶을 살게끔 할 것이다. 이 인터랙트를 발판 삼아 지아의 미래를 더욱 높이 받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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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들은 더 빠르게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만큼의 보폭으로 빠르게 가진 것들마저 잃어간다는 말을 실감하는 밤이었다. 스테파니는 안절부절못하며 겨우 훔쳐낸 이 인터랙트 기기를 제대로 만지지도 못했다. 새근새근 자는 지아를 깨우지 않으려 피신한 화장실에서 꺼둔 인터랙트 기기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 기기는 사용자가 어떤 작동을 할 수 있지 않게끔 일부러 막아둔 것 같이 아무런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없었다. 위치 추적기 기능이 있을까 봐 켜지도 못한 이 작은 장치를 어루만지며 발을 동동 구르다 보니 슬그머니 짙은 주황빛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아침이 되자마자 지아를 맡겨두고는 인터넷으로 찾은 해킹 서비스 업체를 찾아갔다. 종로의 노후화된 한 골목 속으로 깊이 걸어 들어가다 보니 간판 없는 작은 사무실이 나타났다. 왠지 안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냉랭한 공간이었지만 이미 어둠의 세계에 발들인지 오래였기에 스테파니는 지체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철로만 이루어진 의자 몇 개와 책상, 그리고 컴퓨터가 있었다. 곳곳에는 퀴퀴한 쓰레기들과 먹다 만 음식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삐딱하게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스테파니는 어눌한 한국어 실력으로 열심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고 결론적으로 이 인터랙트 유저를 자신의 아이로 바꿔 달라는 요청을 전달했다.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여러 번 한숨을 쉬더니 마지못해 인터랙트를 받아 들고는 컴퓨터에 연결했다. 그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스테파니에게 돈을 요구했고, 스테파니는 생각보다 높은 금액에 준비해 온 돈을 전부 건네주며 그에게 일부 금액을 낮춰 달라고 부탁했다.
남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돈을 채간 후 몇 분 동안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작업하는 듯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인터랙트에서 굉장히 위협적인 듯한 날카로운 알람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려댔다. 그 소리는 응급차가 출동했을 때의 소리와 매우 비슷해서 직감적으로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자는 애먹은 듯 이것저것 키보드 자판을 눌러보더니 결국 인터랙트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선을 빼버렸다.
“아가씨, 이거 안 돼요. 내가 이런 일만 한 지도 십 년이 넘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인터랙트는 해킹 자체가 잘 안돼.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못할 거야.”
그는 스테파니가 인터랙트 장치를 도로 손에 넣기도 전에 벌떡 일어서서 그녀가 나가기를 재촉했다.
“다시 돈 돌려줘요. 실패했잖아요. 다시 주세요.”
스테파니는 그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으려 버티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는 가뿐히 스테파니의 애원을 무시한 채 스테파니를 홀로 남겨두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스테파니는 혼자 빈 한 칸짜리 사무실에서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남자를 기다렸다. 초저녁에 다시 돌아온 남자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스테파니를 보더니 온갖 욕을 퍼부으며 그녀를 끌어내서 문밖으로 내팽개쳤다. 차가운 골목길 바닥에 긁힌 스테파니의 손바닥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스테파니는 이를 악물고 잠긴 사무실 문을 쾅쾅 두드렸다. 지아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이 될 때까지도 계속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가끔가다 남자의 소리치는 욕 가지만 들려올 뿐이었다. 점점 손목에 삐걱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스테파니는 조용히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울먹이며 골목을 떠났다.
그 이후 스테파니는 그저 깡통 신세가 된 이 검은색 기기를 들여다보며 넋 놓은 채 한참씩 앉아 있곤 했다. 이 한 뼘짜리 장치에 자신과 지아의 운명이 달려있는 듯했다. 손가락 끝으로 장치를 쓸어보다 보니 장치의 뒷면에 무언가 작게 울퉁불퉁하게 새겨져 있는 게 만져졌다. 아무 틈이나 정보 없이 그저 울려댈 줄만 알던 이 장치에 무언가가 새겨져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전화번호인 듯 보이는 숫자를 수없이 되뇌며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 스테파니는 직장에 병가를 제출한 뒤 서둘러 지아를 맡기러 갔다. 무언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희망에 몸이 날아오를 듯 가벼웠다. 어느덧 오전 열 시가 되어갈 무렵 스테파니는 빈집으로 돌아가 전화기를 들었다.
인터랙트 뒷면에 새겨져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자 오랜 수신음 끝에 한마디가 들렸다.
“인터랙트, 교감을 선택하세요. 인터랙트 본사 리셉션 데스크, 정수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