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부서진 이들의 만남
문밖을 나서는 수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여자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는 천천히 본사의 창문에서 멀어져 수연과의 거리를 지키며 따라왔다. 갑자기 내린 여름밤의 소나기 속에서 수연과 여자는 조용히 걸었다. 멀찍이 떨어진 채 수연만을 애처롭게 보며 따라오는 여자를 보니 또다시 진영이가 떠올랐다. 진영이가 참 자주 생각나는 요즘이다.
한참을 걷다 역 앞에서 수연은 멈춰서서 여자를 돌아봤다. 여자는 희망에 찬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며 함께 멈춰 섰다. 진영의 눈에 수연이 심어줬던 희망이 어째서 돌고 돌아 이 여자의 눈 속에도 심어진 걸까. 이번에는 그 희망을 지켜낼 수 있을까. 수연은 덜컥 겁이나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목이 막혔다. 주저앉아 끄억끄억 우는 수연에게 여자는 조용히 다가와 자신의 차가운 팔로 수연을 감싸안으며 토닥여주었다.
“내가 도움이 안 될지도 몰라요. 내가 오히려 당신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어요. 나는 너무 부족하고 무능한 사람이에요.”
소리치듯, 절규하듯 뱉어내는 수연의 외침은 빗소리를 뚫고도 선명히 전달되었다.
여자는 수연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의 부족한 한국어 실력 탓인지, 수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탓인지 몰라 그저 수연의 머리를 감싸안아 줄 뿐이었다. 제이가 어릴 적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자신에게 품을 내어줬을 때 이런 마음이었을지 묻고 싶었다. 이렇게 이유 없이 갖고 있는 모든 사랑을 내어주고 싶었냐고, 이렇게 이유 없이 당신이 아프지 않길 바랐냐고.
한참을 제이의 손길을 떠올리며 수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습니다. 어떻게 해도 고마워요.”
여자의 속삭임 같은 말은 수연의 잘못들을 씻겨 내려주었다.
이어서 들려온 여자의 울음소리에 마치 위안을 받은 듯 수연은 오랫동안 담고 살았던 죄책감과 후회를 빗소리에 담아 보내주었다. 그 둘의 울음소리가 잠잠해질 때쯤 비는 멈추었고, 그 둘은 어느새 하나가 된 듯 서로의 슬픔에 함께 엮여있었다.
쫄딱 젖은 채 눈이 퉁퉁 부은 젊은 여자와 외국인은 지하철에서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표정 없이 목적지를 향해 갔다. 세상이 규정화해 놓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이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이미 이상한 사람으로 결정되었으니 아등바등 누군가에게 자신의 정상 가치를 드러낼 필요도, 설득할 필요도 없어졌다. 남의 시선을 무력화시키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니, 그동안 헛된 시간과 에너지를 흘려보낸 게 허탈하여 웃음이 살짝 지어졌다. 수연이 고개를 돌려 조용히 자신의 곁을 지키는 외국인을 쳐다보았다.
암묵적으로 수연의 모든 결정을 따르겠다는 듯이 조금의 저항과 의문도 품지 않은 채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이 외국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에요?”
“스테파니입니다.”
왜인지 모르게 한국 이름을 예상했던 수연은 엉뚱하게 귀에 꽂힌 네 글자의 이름에 웃음이 났다. 스테파니는 어떤 게 웃긴 건지 모르겠으면서도 불이 화르륵 타듯 번진 반짝거리는 수연의 미소에 함께 웃어보았다. 스테파니는 한바탕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며 절규한 후 별것도 아닌 일에 웃음이 나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에 홀로 있는 줄 알았던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나는 웃음인 것을. 그녀와 제이가 처음 함께 웃은 순간도 분명 그러한 마음이었다.
수연과 스테파니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안고 천천히 걸었다. 몇분 후면 도착할 결전의 장소에서 사활을 건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은 듯, 평화롭게 산책하듯 걸었다. 마치 이미 한차례의 감정을 파도에 흘려보내고 난 뒤, 잔잔해진 호숫가의 물결 같았다. 수연은 인생의 가장 큰 상처를 치유한 듯한 초연하고 본질적인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스테파니의 사연을 자세히 듣지 못했기에, 그녀가 원하는 도움이 어떤 도움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쉴 새 없이 작전회의를 해도 모자란 시간에 그 두 사람은 그저 서로의 진심을 신뢰하듯 말없이 걸었다.
어느덧 해커의 주소지가 눈앞에 나타나자, 수연은 스테파니를 향해 몸을 휙 돌려 말했다.
“신분을 감출 수 없는 작전이니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에요.”
수연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낮고 단단했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나도 자세히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변함없이 난 당신을 도울 거예요. 저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저희 인터랙트 시스템을 수차례 해킹해서 본사에서 트래킹하고 있는 인물이에요. 인터랙트의 보안 시스템을 뚫었던 사람은 저 사람 한 명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그는 분명 당신이 원하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말할 기회를 만들어 줄게요.”
스테파니는 옅은 미소를 띠며 끄덕였다. 스테파니는 조용히 말을 읊조리는 수연을 보며 그녀에게서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수연이 가져다준 한 줄기 빛이 그저 작은 불씨로 꺼뜨려질지, 아니면 타올라 별이 될지는 곧 알게 되겠지.
해커의 집은 작은 컨테이너의 형태였다. 수연은 교과서에서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주거 공간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읽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녹슨 철 외관의 벽을 타고 자라는 붉은 덩쿨들은 마치 의도한 장식물인 듯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수연과 스테파니는 창문 하나 없는 고철 덩어리의 컨테이너를 바라보며 그 내부를 상상할 수 없음에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적막을 깨고 수연이 작은 철문을 통통 두드리며 노크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수연은 한 번 더 조금 센 힘을 가해 쿵쿵 노크했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안에서 무언가 떨어진 듯한 소리가 났다.
“최광 씨,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인터랙트 본사에서 곧 당신을 잡으러 올 거예요.”
수연은 협박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선생과 닮았다고 느끼며 후회스럽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문 안쪽에서 여러 개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철문이 덜컹 열렸다. 한 뼘도 안 되게 열린 문틈 사이로 수많은 LED 빛이 새어 나왔다. 문틈 사이를 들여다보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 뜨던 순간 일부러 수연과 스테파니를 놀라게 하려 한 듯 삐쩍 마른 남자가 문 뒤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최광은 눈가죽이 찢어질 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미세한 웃음을 지으며 수연과 스테파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개만 내밀고 자신들을 적막 속에서 쳐다보는 이 기괴한 남자의 행동에 수연은 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번만은 자신을 믿는 스테파니를 꼭 도와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되뇌며 스테파니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수연은 스테파니를 잡아끌며 철문을 밀고 성큼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이 스스로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광경에 적잖이 놀란 듯 최광은 마치 갈매기 소리와 닮은 웃음소리로 깔깔 웃어댔다.
컨테이너의 내부는 마치 다른 행성에 온 듯이 신비롭고도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그저 고철 덩어리였던 밖과 다르게 내부에는 형형색색의 LED 빛들이 수십 개의 모니터와 장치들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가장 넓은 벽면의 중앙에는 메인 화면으로 보이는 수연의 키만큼 커다란 모니터가 달려있었고, 그 주변에는 가지각색의 작은 모니터들이 수십 개 달려있었다. 인터랙트 본사에서 수연이 보던 씨씨티비 관리자 화면보다 더 많은 디스플레이들을 보며 수연은 알 수 없게 압도되었다.
모니터들 사이 사이에는 일부러 배치한 건지 그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건지 구분할 수 없는 붉은 덩쿨식물들이 자라있었다. 수연은 그 덩쿨이 컨테이너 외부에 있던 덩쿨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천천히 시선을 옮겨 공간 전체를 훑어보았다. 모니터들이 가득한 벽면을 제외하고는 벽, 바닥 그리고 천정까지 빼곡하게 찢긴 신문 기사로 덮여있었다. 수연은 실제 종이를 사용한 인쇄물을 본 적도 없었기에, 이런 광경은 마치 수백 년 전의 시대를 그린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다시 천천히 마주한 최광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기괴했다. 자신보다 한 뼘밖에 더 크지 않은 키에 가죽만 남은 듯 마른 몸, 희끗희끗거리는 푸석한 머리칼, 햇빛을 본 적이 없는듯한 허연 살갗과 퀭한 눈빛은 마치 죽어있는 듯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손님을 대접해 본 사람처럼 여유롭게 콧노래를 부르며 어디선가 찻잔을 내어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손님은 오랜만이라, 이슬차 괜찮죠?”
수연은 되려 즐거워보이는 듯한 최광의 모습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당신 얼마 전에 인터랙트 본사 내부망을 뚫어 정보를 빼냈죠? 본사에서는 이미 최광 씨의 신상과 주소지까지 추적을 완료했어요. 조만간 제 팀에서 당신을 잡으러 올 거라고요. 겁도 없이 이렇게 큰 기업을 상대로 장난을 치다니, 당신은 분명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수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차를 내리던 최광은 수연의 한마디에 시선을 돌려세웠다.
"당신의 팀이라고 했나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말문이 막힌 수연에게 최광은 곧바로 이어 물었다.
“당신, 인터랙트 본사에서 일해요?”
갑작스럽게 치솟은 진지한 집중력에 수연은 잠시 숨을 참았다. 분명 수연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인터랙트 본사에서 잡으러 올 거라 수차례 얘기했는데 한 박자 늦은 최광의 반응이 왜인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그가 반응한 내용이 자신의 협박이 아닌 자신의 출처임을 얼핏 느낀 수연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되물었다.
“왜 당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내용보다 제가 인터랙트 본사에서 일한다는 사실에 더 놀라시는 거죠?”
약 몇초 사이에 웃음기가 사라진 최광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고요한 표정으로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수연은 그를 보며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있는 사람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살고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던진 꽤 수상한 이 질문에 답을 해야한다는 생각조차 없는, 그저 자신의 깊고 검은 호수 속에서 헤매는 사람 같다고 느껴졌다.
최광은 아무런 말 없이 천천히 반 정도 차 있는 찻잔을 플라스틱 쟁반 위에 정갈히 올려 우두커니 서 있는 수연과 스테파니를 향해 가져왔다. 느리게 걷는 그의 몸짓과 대비되는 그의 손은 핏줄이 설만큼 플라스틱 쟁반을 꾹 쥐고 있었다. 수십 년 전 환경오염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던 플라스틱의 완벽한 대체재가 개발되며 플라스틱은 생산 중단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 물건으로 보이는 그의 플라스틱 쟁반은 이곳저곳 긁히고 금이 간 고물 덩어리였다. 마치 시대가 남기고 간 흔적 같은 그를 보며 수연은 자신에게 폴더폰 속 동생 사진을 보여주던 진영이를 떠올렸다.
컴퓨터 의자와 쇳덩이 스툴밖에 없는 그의 공간은 손님이 찾아온 지 오래인 듯했다. 최광은 한 잔씩 차를 내어준 뒤 마치 졸린 사람처럼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이슬차는 풀잎 자체에서 단맛이 나오는 게 꼭 신의 선물 같아요. 인생이 너무 쓰다 싶을 때 한줄기씩 따다가 우려내 마시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거 원, 병 주고 약 주는 게 아주 화딱지가 나서 죽겠어요.”
스테파니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비는 듯이 최광의 표정과 몸짓을 세밀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수연은 스테파니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은 소박한 차림새와 상반되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맑고 투명한 피부와 가닥가닥 생명이 있는 듯이 뻗어있는 긴 속눈썹, 그리고 빛을 담은 듯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에는 가지각색의 푸른빛이 가득했다.
그녀의 눈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감정들이 담겨있는 듯했다. 한국어가 서툰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해보지 못했지만 분명 그 눈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눈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눈이 공존해 있었다. 수연은 그 눈을 보며 자신과 닮은 감정들을 담고 있음에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이 지키려 했지만 잃었던 진영이가 떠올랐다. 문득 자신이 책임 범위를 한참 벗어나서 이렇게까지 스테파니를 도우려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루지 못한 지난날의 후회와 상처를 이렇게나마 스테파니를 통해 고해성사하듯 씻어내고 싶었던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한 선행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최광의 태도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은 마치 자신과 스테파니의 간절함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연이 기대했던 최광의 모습은 이렇게 사회에서 도태된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자신을 구원해 줄 능력자이자 조력자일 거라 굳게 믿고 그를 존경하는 마음과 동시에 두려워하며 찾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속을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이슬차를 쫍쫍거리며 평온히 마시는 최광이었다. 거의 평온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 수연의 심장은 분노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귓볼에서 뜨거운 맥박이 둥둥 울리는 게 느껴졌다. 증오와 분노가 서서히 수연의 정수리에서 발끝으로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당신은 이게 지금 장난으로 보여?”
성대에 힘을 꽉 주고 비명 섞인 소리를 내질렀다. 최광은 갑작스럽게 터져버린 데시벨 레벨에 깜짝 놀라 깬 듯 차를 마시던 동작을 멈추고 수연을 쳐다봤다. 그는 이제서야 꿈을 꾸다 깨어난 듯했다. 이제서야 그의 시선 끝에 수연이라는 초점이 잡혔다.
“당신을 잡으러 온다는데 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당신은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사람이야?"
수연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힘으로 누르며 차오르는 눈물을 무시한 채 소리쳤다. 커다란 막대기가 가로로 목에 턱 막혀있는 듯 수연의 숨과 목을 졸랐다. 자신도 어째서 미쳐버린 듯한 이 남자에게 걱정과 비난이 섞인 울분을 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감정의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잠시 놀라 벙쪄있는 채로 멈췄던 최광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낮게 읊조렸다.
“네, 저는 없어요. 잃을 것도, 지킬 것도”
그는 찻잔을 천천히 다시 입가에 가져다 대며 벽에 가득한 신문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천 번은 봤을 자신의 공간의 한 벽면을 바삐 훑어보던 최광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였다. 수연은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최광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벽에는 이삼십 년 전의 신문 기사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중 한 기사 사진에는 인터랙트의 초창기 창립자인 백대호 대표가 환하게 웃으며 누군가와 악수하고 있었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힘을 주어 바라보니 백 대표 옆의 사람은 다름 아닌 젊은 시절의 최광이었다. 기사 제목에는 백대호 대표와 최광을 공동설립자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수연은 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물었다.
“거기 쓰여 있는 그대로예요. 인터랙트의 초기 설립자죠.”
최광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의 목소리엔 두터운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인터랙트 취업 면접을 준비하며 샅샅이 조사했을 땐 당신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어요. 입사 후에 받은 신입생 교육 때에도 외울 정도로 인터랙트의 역사와 조직에 대해 공부했지만, 당신은 그 어디에도 없었어요. 거짓말 그만하고 진실을 말해주세요.”
수연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토대가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날카롭고 긴 바늘이 찌르는듯한 불쾌한 감정이었다.
“미시감, 그런 걸 미시감이라고 해요.”
최광은 수연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그의 말에 수연은 휙 돌아 최광의 얼굴을 노려보는 듯 응시했다.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던 내 세상이 어느 순간 갑자기 낯설게 뒤틀려 보이는 감정이요. 그 미시감이라는 감정은 정말이지 울렁이고 역겹지 않나요?”
최광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수연의 옆에 섰다. 그는 벽면의 아래쪽에 붙어있는 하나의 신문 기사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아이가 죽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인터랙트가 죽였죠. 말도 안 되는 사실이 뭔지 알아요? 나는 인터랙트를 최초로 개발한 개발 디렉터이자 공동 설립자라는 거예요. 내가 만든 이 시스템이 나에게 하나뿐인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았어요. 미시감은 딱 이럴 때 느끼는 감정이에요. 내가 매일 일하던 회사와 내가 매일 구축하던 이 서비스가 처음 보는 것같이 낯설고 뒤틀릴 때요.”
그가 가리킨 신문 기사에는 15년 전 성북구의 어느 저택에서 고작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기사의 메인 사진에는 으리으리한 저택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한눈에 보아도 기자는 죽은 아이의 원인을 부모의 방치로 지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수연을 향해 최광은 몸을 돌려 말을 이어갔다.
“분명 이 인터랙트 시스템에는 끔찍한 오류가 있어요. 나는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들을 내려주는 알고리즘을 개발하려 했어요. 그 알고리즘이 안내하는 대로 아이를 키워나갔죠. 근데 그 끝이 아이의 죽음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내가 실수한 거예요. 이 서비스를 없애버려야 해요. 즉시 중단시켜야 해요. 지금도 매일매일 인터랙트의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사례들이 끊이질 않고 있어요. 인터랙트로 인해 희생되는 아이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어요. 나는, 나는 경찰서에 갈게요. 나를 지금 체포해 주세요! 나를 사형시키세요! 나를 불구덩이에 떨어뜨려 주세요! 나를 심판해 주세요!”
최광은 점점 차오르는 광기를 이겨내지 못하는 듯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어 내며 호흡을 가쁘게 헐떡였다. 그는 그르릉거리듯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수연은 반대편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스테파니를 보았다. 이 상처받고 온전하지 못한 인간들의 만남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 바닥을 쳐야만 끝나는 걸까.
“멈춰. 멈추세요.”
수연은 단단하게 말했다. 최광은 수연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더 크게 괴상한 소리를 내며 머리칼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허리를 숙여 머리통을 바닥에 대며 중얼중얼 울먹이며 되뇌었다. 그는 매초 살려달라, 죽여달라는 번갈아 가며 누군가에게 비는 듯했다.
“그만하라고!”
수연은 소리 지르며 최광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앙상한 두 어깨를 세차게 흔들며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정신 차려요! 당신이 이래 버리면 나는 정말 더 이상 희망이 없어요. 나와 저 여자, 스테파니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요. 제발 정신 차리세요. 제발 힘을 내주세요.”
분노와 슬픔이 섞여 수연의 눈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은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최광은 멍하니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그의 텅 빈 눈동자는 마치 죽어있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그는 시체의 표정을 쓰고 고개를 천천히 두 번 끄덕거렸다. 옆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스테파니는 최광에게 다가와 그를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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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말없이 스테파니의 품에 안겨있던 최광은 천천히 정신을 되찾은 듯했다. 그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후 다시 따뜻한 물을 끓여 새 차를 내어주었다. 최광이 내어준 이슬차는 투명하고 얇게 달큰한 맛을 띄었다. 정말 그가 말한 것처럼 신이 선물로 준듯한 자연의 단맛이었다.
최광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그의 사연은 이러했다. 최광은 고등학생 때부터 출전한 세계 해킹 대회에서 최연소 수상을 할 만큼 뛰어난 개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전 세계 보안 업체를 비롯하여 정부에서까지도 그의 특출난 해킹 실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명함을 내밀었지만, 그는 그저 덤덤히 자신의 일을 해나갈 뿐이었다. 대중들이 기대한 만큼 큰 활약 없이 대학 생활을 마친 그는 특별히 취업을 준비하지 않고 방에서 마음에 드는 오픈소스들을 들락거리며 쓸만한 커밋을 올리곤 했다.
컴퓨터밖에 모르던 그를 사랑에 빠지게 한 여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시작할 두 번째 인생을 위해 최광은 작은 기업들의 앱을 대신 개발해 준 후 수수료를 받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대학생들의 개발 과제를 대신 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서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다.
아내의 말이라면 끔뻑 죽는 최광을 보며 최광의 부모님은 그의 결혼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의 아내는 누가 봐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최광의 개발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두 시간씩 맑은 눈으로 들어주었고, 최광이 감탄할 만큼 놀라운 신선한 질문들을 던져 의견을 주고받았다. 아내는 아기를 만나기 전 임신 중에도 누구보다 아이를 끔찍이 아꼈는데, 최광은 가끔 자신보다 아기를 더욱 소중히 생각하는 것 같은 아내를 보며 토라지기도 했다.
그렇게 가족이란 울타리는 최광을 세상 속으로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겨 주었고, 최광은 드디어 컴퓨터 밖의 세상에 발을 딛고 서기 시작했다. 역시나 좋은 일이 한 번에 일어나듯 안 좋은 일 또한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인가.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무렵 최광은 첫사랑이었던 아내를 병으로 떠나보내고 다시 자신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의 부모님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빠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최광을 고쳐놓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그들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에 최광은 다시금 메타인지를 하며 자신의 남은 인생을 살아갈 방향을 설정했다.
최광의 인생 목표들을 담은 리스트의 최상단에는 아내의 웃음을 그대로 닮은 자신의 딸을 잘 키워낼 방법을 찾는 것이 쓰여있었다. 육아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던 그는 자신의 전공인 개발 실력을 살려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잘 키워나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아이의 생 유전적 정보와 후천적 영향 요소들을 모두 데이터화하여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돌려 아이의 성장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종의 멘토링을 해주는 서비스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가 그런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백대호 대표는 그 당시 최광의 친한 대학교 선배였다. 그는 최광이 개발한 이 시스템을 육아 도움 서비스로 멋지게 살을 붙여 함께 회사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 둘은 그렇게 함께 인터랙트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백대호 대표의 특기였던 사업 선구안과 운영 전략들을 토대로 인터랙트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나갔고, 안 그래도 아이들 교육열의 정점을 찍고 있던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인터랙트를 빠르게 도입했다.
일개 20대 남성 둘이 일구어낸 이 기업의 가치는 어느새 따라잡을 수 없게 불어나 버렸고, 그 두 사람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입지를 두텁게 잡은 대기업이 되었다. 사업이 확장될수록 최광과 백 대표 사이의 충돌 또한 점점 갈등의 씨앗을 키우고 있었다. 최광은 자신이 회사 일로 인해 너무 바쁘게 생활하고 있기에 아이의 아빠로서 충실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백 대표에게 여러 차례 논의했다. 그는 은퇴하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백 대표는 늘 그를 어르고 달랠 뿐, 진지하게 그의 사임 건을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그저 최광에게 따뜻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광, 네가 개발한 이 인터랙트 서비스는 혁명이야. 이건 그저 서비스에 불과한 게 아닌, 기적이라고. 아이들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해주는 시스템이라니, 너의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판단들보다 훨씬 좋은 방법인 걸 너도 잘 알잖아. 그러니 제발 네가 만들어낸 이 기적적인 시스템을 믿고 아이를 맡겨.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건 네가 아니라 인터랙트야. 그게 정답이라고.”
백 대표는 늘 최광이 죄책감을 느끼거나 아이와 집을 그리워할 때면 그에게 처음 인터랙트 서비스를 개발하던 그때의 마음가짐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애초에 이 서비스를 만든 이유도 네가 스스로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어서였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못 믿을 정도로 무능한 아빠였잖아 너는! 그런 너에게, 그리고 이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에게 인터랙트라는 기적이 주어졌는데, 넌 정말 이 기술보다 너 스스로를 더 믿는 거야? 너의 아빠로서의 능력이 이 서비스보다 대단하다고 자만하는 거야?”
그의 말을 들을 때면 최광의 어깨는 움츠러들었고 아빠 자격이 없는 초라한 사람이 되어갔다.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한 명의 인격체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은 인터랙트의 공동 창립자이자 메인 개발 디렉터로 존재할 때뿐이었다. 그렇게 백 대표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세월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일한 지 거의 10년이 지날 때쯤 사건이 터졌다. 그의 보물, 그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아이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아이의 소식을 들었을 순간에도 최광은 포럼에서 발표할 내용을 준비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백 대표의 사색 된 얼굴을 보며 느꼈던 불길함은 상상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왔다. 아이의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미친 사람처럼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이미 아이의 몸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병원 바닥에 엎드려 온갖 분비물을 다 뱉어내며 울었다. 최광의 옆에서 백 대표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그의 들썩이는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줄 뿐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아이를 화장하는 순간까지도 내내 최광은 상당한 혼란을 느꼈다. 지금, 이 세상이 마치 실존하지 않는 가상 세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말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저 인터랙트가 뿜어내는 빛의 굴절처럼 보였고, 자기 신체 또한 그저 하나의 모형처럼 느껴지곤 했다. 숨 쉬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 중 진짜 살아있는 존재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몇 달을 휴직하며 멍하니 지내다보니 최광의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점만이 남았다. 도대체 인터랙트로 키웠던 자신의 아이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그는 그 질문에 목숨을 걸고 매달렸다. 며칠을 밤을 새가며 자신이 설계한 이 알고리즘의 오류를 찾고자 혈안이 되어 쓰러지고 일어나길 반복했다. 최광에게 밤은 쓰러진 후의 블랙아웃밖에 없었고, 그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인터랙트의 오류를 찾아내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사건 이후 일 년이 지난 뒤 백 대표는 조심스레 최광의 집에 찾아와 과일바구니를 내밀었다. 그것은 백 대표가 중요한 클라이언트나 투자자를 만나러 갈 때 사가는 과일바구니였다. 백 대표는 이제 조금 쉬었으니 다시 최광이 회사로 복귀하길 바라는 듯한 눈치였다. 최광은 백 대표의 걱정과 달리 흔쾌히 바로 다음 날부터 사무실로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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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은 사무실로 복귀한 첫날 모든 직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수천 발의 총탄 소리처럼 느껴졌던 박수들을 뚫고 겨우 숨을 참으며 도착한 그의 연구실에서 그는 모든 사용자들의 기밀 데이터를 추출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며 아이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을 시나리오들을 찾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다. 밤 열한 시쯤 최광의 비서가 문을 똑똑 두드리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최 대표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대표님께서 휴직하신 동안 보안 규정이 강화되어 자정 이후에는 모든 시스템이 셧다운됩니다. 미리 말씀을 못 드린 것 같아 안내해 드리며, 귀가 원하실 때 호출 주시면 댁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최광은 몰두해 있던 자신의 정신을 끌어내며 비서에게 곧 정리하고 나가겠다고 이야기했다.
자정이 몇분 지난 후 최광은 연구실을 나와 법인차량의 뒷좌석에 앉았다. 운전석에 있는 비서에게 물어보니 시스템 재개 시간은 오전 6시라고 했다. 집에 가서 자신의 서재에 모아둔 작업물들을 더 공부하고 두어 시간만 자고 다시 출근할 계획을 세우던 중 비서가 적막을 깨고 난감해하며 물었다.
“최 대표님, 다른 길로 돌아서 갈까요?”
최광은 질문의 요점을 파악하지 못했다. 원래도 이런 부분이 자신의 약점이긴 했지만, 그의 질문은 참으로 맥락 없이 느껴졌다.
“그걸 저에게 왜 묻죠?”
비서는 그 반응에 화들짝 놀라며 여러 번 죄송하다고 말했다. 급히 유턴 차선으로 이동하여 방향을 틀어서 운전하는 비서를 바라보며 최광은 점점 더 혼란 속으로 빠졌다.
“죄송합니다. 최 대표님. 따님 사고 나신 길로 갈 생각을 하다니, 제가 생각이 정말 짧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제서야 최광은 백 대표가 자신의 딸이 자살한 사실을 숨기고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사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육아 멘토링 서비스를 개발한 공동대표의 딸이 자살했다는 사실이 자신들의 서비스 가치를 훼손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결심한 듯 최광은 차를 돌려 백대호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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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대표는 조금은 짜증 난다는 듯 늦은 시간에 대해 궁시렁대며 최광을 집 안으로 들였다. 백 대표의 집에는 사용하지도 않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음악을 자주 듣는 편이 아니지만 그의 집 곳곳에는 최고급 스피커들이 하나의 조각품처럼 전시되어 있었고, 혼자 사는 집에는 과분할 만큼 휘황찬란한 금빛 접시와 크리스탈 잔들이 장식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함께 인터랙트를 창업할 즈음 백 대표가 머물렀던 작은 원룸에 널브러져 있던 매트리스와 퀴퀴한 냄새가 나던 수건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최광은 거의 십오 년을 함께해왔던 백대호가 완전하게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천천히 인지했다.
백 대표가 최광을 안내한 곳은 벽면 전체가 와인병들로 가득한 라운지 같은 공간이었다. 낮은 조도의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백 대표는 어차피 한잔 마시고 잠을 청하려 했다며 와인 한 병과 와인잔 두 개를 짤랑거리며 꺼내어 왔다.
가죽 소파에 널찍이 앉아 와인을 마시던 중 최광은 주먹을 꾹 쥐고 말을 꺼냈다.
“선배, 이제 인터랙트 서비스를 멈출 때가 된 것 같아요. 우리 선이 죽었을 때 진작에 멈춰야 했어. 아니, 선아 이전 첫 번째 피해 아이가 생겼을 때부터 모든 게 잘못되었던 거예요.”
백 대표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최광을 쏘아보았다. 잠깐의 정적 후 그는 금세 표정을 풀며 타이르듯 말했다.
“광, 왜 그래.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인터랙트를 접어? 그냥 몇 달, 아니 일 년 정도 더 쉬고 오는 게 어때?”
그제야 최광은 백 대표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딸 선아가 죽었을 때도 백 대표는 자신을 토닥이며 기사를 어떻게 내보내야 인터랙트의 이 끔찍한 부작용이 대중에게 새어나가지 않을지 고민하고 있었을 테지.
“내가 인터랙트를 어떤 마음으로 개발했는지 알잖아요. 내 아내 떠나보내고 밤낮 할 것 없이 울고 있는 선아를 달래지도 못하면서 발 동동 구르며 이 시스템을 설계했던 그때를 선배는 봤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배만큼은 인터랙트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야지! 우리가 그토록 수십억, 아니 수백억을 벌어도 인터랙트는 나에게 선아를 위한 서비스였어! 그런 인터랙트가 선아를 죽여버렸다고!”
백 대표는 최광의 마지막 한마디에 살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절대 금기시되었던 말을 최광이 입 밖으로 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한 듯했다.
“그건 그냥 네 딸이 이상하게 태어난 걸 어떻게 해! 아무리 인터랙트가 대단한 서비스라도 너의 딸처럼 망가져 버린 아이들까지 살려낼 수는 없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고 어차피 벌어져야만 했던 일이야. 고작 그것 때문에 남은 너의 인생, 그리고 내 인생 이렇게 날려 먹을 거야?“
그 마지막 말이 끝나기 전 최광은 벌떡 일어나 백 대표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붉은 와인과 혈흔이 백 대표의 흰 실크가운을 적셨다.
“내가 어떻게든 찾아. 우리 선아 죽인 원인, 인터랙트의 그 끔찍한 오류를 찾아내서 세상에 전부 알릴 거야.”
그 말을 남긴 채로 최광은 벽면에 있던 와인병들 중 손에 집히는 병들을 전부 바닥에 내던진 채 백 대표의 집을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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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몇 시간 후인 오전 6시, 최광은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려다 스스로 출근길에 나섰다. 밤새도록 서재에서 뽑아뒀던 자료들을 들여다보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그는 단정한 차림새로 인터랙트 본사에 도착했다.
동공 인식을 하고 들어가려던 찰나에 출입 게이트 로봇은 최광의 앞을 가로막았다.
“교감을 선택하세요 - 인터랙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당신은 미등록자로 입장이 제한됩니다.”
최광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불길한 느낌을 뒤로한 채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비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날부로 최광은 인터랙트에서 없던 사람인마냥 사라져 버렸다. 모든 권한과 자격이 박탈되었고 그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계약서 조항에 의해 백 대표에게 해고 처리를 당해버렸다. 뒤늦게 로봇 변호사와 감정 호소인을 선임하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아무것도 몰랐던 20대 초반에 그저 백 대표를 친구로서 믿고 체결한 계약서에는 최광에게 불리한 내용들로 넘쳐났다. 심지어 그의 집과 자동차까지도 법인 소속으로 처리되어 있어 해고됨과 즉시 3개월 안에 모두 반납해야 했다.
최광은 모아뒀던 돈으로 작은 아파트를 구해 이사했지만 이사하는 족족 백 대표는 사람을 보내어 최광을 감시하고 협박했다. 최광은 마지막까지 몰래 만들어둔 인터랙트 시스템에 대한 자신만의 백도어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기에, 쉽게 인터랙트 시스템을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이에 백 대표는 사사건건 사람을 보내어 당장 그만둘 것을 압박했다. 최광은 감시를 피해 이곳저곳 이사를 하면서도 꿋꿋하게 인터랙트 시스템을 해킹하고 정보를 빼 왔다. 백 대표는 최광과 관련된 뉴스가 대중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기에 이런 최광의 불법적인 행동들에도 별다른 공식 조취를 취하지 못했다. 백 대표는 오히려 최광의 존재가 드러나는 모든 기사와 뉴스들을 삭제시키고 천천히 대중과 언론의 기록에서 최광을 지워나갔다.
그 후 최광은 주소지는 그대로 유지한 채 작은 컨테이너를 구하여 실질적으로는 거주하는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그 컨테이너에서 혼자 은둔하며 인터랙트의 문제점을 찾는 생활을 하다 보니 점점 그의 정신상태를 피폐해져갔다. 어느 날은 죽은 선아의 모습이 너무 선명히 눈앞에 존재했고, 어느 날은 자신의 온몸에 뱀이 칭칭 감고 있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어느 날은 갑자기 컨테이너 내부가 서서히 줄어들며 자신의 몸에 딱 맞는 크기로 작아진 것 같아 숨을 쉬지 못하고 기절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살가죽 내부가 너무 가려워 전부 뜯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런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최광의 유일한 일과는 선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파헤치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중, 한 번도 온 적 없었던 손님이 자신의 컨테이너 문을 두드렸다. 수연과 스테파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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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말해보세요. 당신들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최광은 진심 어리고 담백한 어투로 물었다. 이번에는 스테파니가 이야기할 차례였다. 수연조차도 지금 자신이 정확히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 최광의 컨테이너로 스테파니를 데리고 왔는지 알지 못했다. 기회가 찾아온 듯한 분위기에 스테파니는 급한 손길로 가방에서 꾸깃꾸깃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너무나도 참혹한 아기의 사진이 담겨있었다. 수연은 깜짝 놀라 스테파니를 쳐다보았지만, 스테파니는 그저 담담하게 사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진 속 아기는 이미 죽은 듯한 모습으로 수북이 쌓인 눈 사이에서 보랏빛으로 변해있었다. 너덜거리는 싸개를 덮고 있지 않았다면 로드킬 당한 새끼 짐승과 구별하기 쉽지 않았을 만큼 사진은 끔찍했다. 스테파니는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에요. 나 고아원 처음 버려졌을 때.“
수연은 그 사진을 이 상황에서 꺼내어 보여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수연은 조심스레 최광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그저 담담하게 그 사진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어서 스테파니는 가방 속에서 노란색 꽃이 그려진 패브릭으로 덮인 앨범을 하나 꺼내었다. 그 앨범을 최광에게 건네준 후 펼쳐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광은 천천히 앨범을 펼쳐 넘겼다. 앨범 속에는 방금 본 사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아기의 사진이 담겨있었다. 귀여운 오리 인형들에 둘러싸인 갓난아기의 사진부터 노란 장화를 신고 첨벙거리는 물웅덩이 속에서 환하게 웃는 아이까지 사랑을 가득 받은 아이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각 사진 옆에는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듯한 글씨로 아래와 같이 쓰여있었다.
지아의 첫 웰컴 홈
지아의 첫 목욕
지아의 첫 분유
지아의 첫 인형 친구
지아의 첫 공원 산책
계속 이어지는 메모들을 읽으며 사진을 보다 보니 이 지아라는 아기의 일생을 전부 함께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테파니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부들부들 떨며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입가에는 따스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스테파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수연과 최광은 이 앨범 속의 아이가 스테파니의 아이이자 그녀의 온 세상, 온 우주임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은 듯 최광은 앨범을 조심히 덮고 스테파니에게 낡은 손수건을 내어주었다.
스테파니가 원했던 것은 한마디로 설명 가능했다.
“이 인터랙트를 지아에게 선물해 주세요. 내가 훔쳤어요.”
수연은 그제서야 처음 인터랙트 본사로 전화를 걸었던 스테파니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기존의 유저 대신 인터랙트에 새로 등록해서 사용하고 싶다는 의미였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후 작은 탄성을 뱉었다. 최광은 잠시 망설이는 듯 생각에 빠졌다.
머지않아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인터랙트 기기를 데스크탑에 연결시키더니 데이터를 불러와 쭉 읽어보며 중얼거렸다.
“이유선이라는 아이의 것이군요. 한번 시스템을 건드린 기록이 있네요?”
스테파니는 옅은 인상을 쓴 채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최광은 이후 더 물어보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조용한 그의 컨테이너 속에서 타닥타닥 타자 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최광은 자신이 갖고 있던 고유 마스터키를 비롯한 지금까지 축적해 둔 여러 데이터를 사용하여 인터랙트를 리셋시킨 후 지아의 생체 정보들을 입력했다. 스테파니는 수두룩하게 인쇄해 온 각종 서류와 지아의 검사내역 및 출생기록을 최광에게 쥐여주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일단 유저 등록은 완료했어요. 다만 이 AI 시스템이 주어진 데이터를 갖고 학습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려요. 며칠 정도는 불안정한 내용일 수 있으니 완전히 신뢰하지는 마시고,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정확하게 분석을 해나갈 거예요. 사용하면 할수록 인터랙트 교감 시간에 나눈 대화들을 기반으로 더 많은 정보들이 입력될 테니 점점 지아에게 딱 맞춘 육아 시스템이 도입될 겁니다.”
여러 번 허리를 숙여 감사하다고 외치는 스테파니에게 최광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괜찮다고 답했다. 스테파니와 수연이 일어서서 나가려고 할 참에는 벌떡 일어서서 자신의 서랍 속 유리병에 보관되어 있던 이슬 찻잎을 스테파니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처음 서로를 마주했던 컨테이너의 문 앞에서 최광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