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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철이 왔다.

꽃이 없는 무화과(無花果)가 나에게로 와 은화과(隱花果)가 되었다.

by 도시락 한방현숙

무화과를 떠올리며 8월의 마지막을 보냈다. 익히 들어 익숙한 무화과! 그간 말린 무화과나 샌드위치 속 무화과를 무심히 흘려보냈었다. 이번처럼 한 박스를 사서 정성껏 관리하며 제 때 먹으려 노력한 것은 올해가 아마 처음일 것이다.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니 무화과는 어느덧 특별한 제철과일로 다가왔다.


유명한 트로트 노래 가사 속 '이렇게 무화과가 익어가는 날에도'를 흥얼거리면서도 무화과를 정작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 아담과 이브의 '무화과'를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주변에서 무화과나무를 보거나 무화과를 먹는 것은 꽤 낯선 일이었던 것 같다.


무화과(無花果), 꽃이 없는 과일이라니! 한자를 보고 새삼스레 궁금증이 생겨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내가 몰랐던 신기한 사실들이 많았다. 열매처럼 생긴 무화과 껍질은 꽃받침이며, 우리가 좋아하는 맛을 지닌, 열매 속 붉은 부분이 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화과의 과즙 또한 엄밀히 말하면 무화과꽃의 꿀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식물분류학에서는 무화과와 같은 열매의 형태를 은화과(꽃이 숨어있는 열매)라고 한다니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다니, 인류가 재배한 최초의 과일 중 하나라는 수식어와 함께 살짝 낭만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꽃이 없는 무화과(無花果)가 나에게로 와 은화과(隱花果)가 되었으니, 불현듯 김춘수 시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소환되었다.


없던 꽃을 찾은 것처럼 무화과가 수정되는 과정도 놀랍기만 하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암무화과, 숫무화과, 무화과종벌 중 숫컷종벌, 암컷종벌 등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꽃을 맺기 위한 벌들의 운명적인 수분 활동과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식물, 자연의 섭리(무화과 밑동의 밀리미터 단위의 작은 구멍을 통과하느라 온몸이 부서지는 암컷종벌, 무화과 안에서 태어나 교미 후 그 안에서 죽고 마는 숫컷종벌, 수정 후 암꽃 안에서 죽고 마는 암컷종벌, 지켜내기 위해 독성을 뿜어내는 식물 암무화과, 수정 후 말벌의 시체와 알 모두 강력한 단백질 소화 효소인 피신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등) 앞에 탄성이 나왔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새로운 꽃이 피어나고 열매를 맺어 그다음을 기약하는, 이처럼 사소하고도 위대한 일에 새삼 뭉클해졌다. 가장 중요한 인간은 물론이고 자연 만물의 섭리를 새삼스레 느끼며,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존재는 절대 없으며, 존중받지 못할 생물 또한 절대 없다는 생각을 되새겼다.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눈에 띄지 않아도 각자의 소임을 다할 때, 세상이, 우주가 돌아갈 수 있음을, 어느 작은 구멍도 예외 없이 우주의 섭리가 미치고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이렇게 귀한 과정을 통해 피어난 무화과! 살살 어린 아기처럼 다뤄야 하는 연한 껍질은 쉬 물러져 농약조차 멀리한다고 한다. 언젠가 잠깐 방심했다가 곰팡이까지 피어 아깝게 버린 일이 있어, 이번에는 살살 흐르는 물에 씻어 가며 며칠 동안 열심히 먹었다. 미처 먹지 못해 남은 것은 냉동실에 얼려가며 야무지게 먹었다.


무화과가 지닌 효능 또한 엄청 대단하다. 항산화 효과는 물론이고, 혈당을 낮추고 심혈관을 튼튼하게 해 준다니 일부러 찾아서라도 먹어야 할 유익한 과일이다. 뼈건강을 챙기고 항암 작용에 빈혈까지 예방한다니 특히 우리 같은 중장년층에게는 특효약인 듯 귀한 먹거리이다.

노화방지와 숙취해소에도 탁월하다니 또 주문해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피신이란 단백질 분해효소가 위를 보호하고 소화를 촉진시켜 고기와 함께 먹으면 더 좋다고 한다. 암컷종벌에게는 독성으로 작용하는 피신이 이렇게 우리에겐 유익한 일을 하니 자연의 오묘함은 참 이루 말할 수 없다.


무화과의 제철이 대략 8~11월까지인데 특히 9월이 한창이라 하니 이제 시작이다. 우리나라 영암에서 많이 생산된다는 말에, 작년에 무화과를 모른 채 영암 여행을 다녀온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우리나라 무화과 생산량의 약 75%를 영암군이 차지한다니 생무화과가 몹시 그리울 때면 영암을 다녀와야겠다. 좀 더 나아가 무화과 먹으로 튀르키예 갈 거야,라는 허세도 부리고 싶다. 전 세계 무화과 생산량이 가장 많은 나라가 튀르키예라는 말에 농담을 던져 보았다.


오늘도 동네 청과물 가게에서 무화과를 샀다. 지난번보다 알이 작아서인지, 제철을 맞이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가격이 만원에서 7천 원으로 내려 있었다. 조심히 다뤄 물에 씻으며 어떻게 먹을까 궁리를 해 보았다. 반을 갈라 무화과꽃을 찾아 자세히 보니 이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어떻게 꽃이 되었는지, 어떤 생물들의 희생과 노고로 맺어졌는지 확인하듯 꽃을 보니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저절로 떠올랐다. 자세히 보니 예쁘고, 오래 보니 귀하고 중한 꽃 중의 꽃이었다. 티스푼으로 키위를 퍼 먹듯 알알이 씨까지 음미해 보았다.

생무화과 그대로 먹기도 하고, 그릭요구르트나 크림치즈 조합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하고, 무화과잼은 물론 샐러드로도 음식 활용은 무궁무진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이제 나는 무화과를 꼭 챙겨 먹는 이가 될 것이다. 클레오파트라가 가장 좋아했다니, 언감생심의 마음은 접어두고 그녀를 따라 하면서 그렇게 건강에 이로운 무화과의 효능을 누려볼 생각이다.


더불어 멀쩡히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꽃이 없느니, 향기가 없느니 함부로 보인 무지가 부끄럽기만 하다. 나아가 혹시라도 늘 만나는 친구들, 교실에서 마주하는 아이들, 소중한 가족 앞에서 꽃과 향기를 찾아보지 않은 채 함부로 들이댄 잣대가 있었을까 돌아본다. 나의 무지와 선입견으로 상처를 남겼을까 마음이 덜컹거린다. 반성한다고 모두 고쳐지는 것은 아니나 무화과 철이 오면 나를 돌아보는 시간으로 삼는 것도 의미가 크겠다.


오랜만에 어릴 적 가물거리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그대여 이렇게 바람이 서글피 부는 날에는, 그대여 이렇게 무화과가 익어가는 날에도,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싶구나(김지애-몰래한 사랑 1990)'


청춘에 들었던 무화과가 푹 익어 중년이 된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제철을 맞아 많은 의미를 지닌, 꽃과 향기를 품은 채 은화과(隱花果)가 되어 나를 철들게 한다.


이 글은 방금 2025. 09. 07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로 채택되었습니다.

https://omn.kr/2f7u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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