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결정하는 것의 비밀

어느 광고인의 고백 EP.03

by 왕태일

CHAPTER 1. 속도가 바뀐 시대,

광고인은 무엇을 붙잡는가

광고인의 독백 EP.03

[출처] 판단하는 광고인은왜 끝까지 남는가

느리게 판단을 한다는 책임감


광고 일을 하면서 내가 가장 경계하게 된 것은 ‘느림’이 아니라 ‘성급함’이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도구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 빠르게 판단해야 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회의는 점점 짧아지고, 결정은 즉각적으로 내려져야 하며, 생각은 충분히 정리되기도 전에 말로 튀어나온다. 처음에는 그것이 효율처럼 보였다. 빠른 판단은 일을 앞으로 밀어내는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조직 안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그 빠른 판단들이 남긴 결과는 묘하게 가벼웠다. 틀린 결정은 아니었지만, 오래 남는 결정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게 되었다. 지금 내가 내린 판단은 정말 충분히 생각한 결과일까, 아니면 이 상황을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에 반응한 결과일까. 이 질문은 생각보다 불편했다. 왜냐하면 솔직하게 답해보면, 많은 결정들이 ‘충분히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해’ 내려진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술은 우리에게 속도를 선물했지만, 그 속도가 항상 더 나은 판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판단의 깊이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


빠르게 결정하는 것의 비밀

AI를 비롯한 기술의 발전은 분명 놀랍다. 아이디어를 정리해주고, 수많은 선택지를 빠르게 제시하며, 우리가 놓쳤을지도 모를 패턴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모든 도구 앞에서도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는 어떤 기술도 대신 답해주지 않는다. 판단은 언제나 사람의 몫이고, 그 판단에는 책임이 따라온다. 나는 이 책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빠르게 결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경험했다. 동시에, 그 방식이 가장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도 함께 배워왔다.


그래서 나는 어느 시점부터 판단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느리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결정해야 할 순간에 한 박자 쉬어가는 습관을 들이려 했다. 이 판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지금 이 선택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지, 이 결정이 나 자신의 기준과 어긋나지는 않는지를 한 번 더 점검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솔직히 불안했다. 주변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는데, 혼자만 속도를 줄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았고, 즉각적인 답을 내놓지 않으면 준비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조급해지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모두가 이미 방향을 정해둔 듯한 분위기였고, 빠르게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이 회의실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일정은 촉박했고,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것 같은 기류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의견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스스로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판단은 내려야 했지만, 그 판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스스로 설명할 수 없다는 느낌이 계속 남아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아주 짧은 유예를 요청했을 뿐이었지만, 분위기는 미묘하게 흔들렸다. 누군가는 조심스럽다고 느꼈을 것이고, 누군가는 답답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하루의 여유는 나에게 중요한 기준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떤 태도로 결정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느린 판단은 결정을 미루는 태도가 아니라, 결정에 책임질 준비를 하는 태도라는 것을. 적어도 나는 그랬다.


시간이 지나자 분명해진 것이 있다. 느리게 판단한 결정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회의에서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설명해야 할 때도 말이 길어지지 않았다. 기준이 이미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나 스스로의 태도였다. 빠른 결정은 상황이 바뀌면 쉽게 수정되지만, 깊이 고민한 결정은 상황이 바뀌어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심은 결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판단의 무게였다.


광고인은 종종 트렌드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늘 빠르게 반응해야 할 것 같고, 남들보다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광고인일수록 느리게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렌드는 빠르지만, 사람의 생각은 느리고, 일의 결과는 더 느리게 드러난다. 이 속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빠른 판단을 반복하면서도 왜 결과가 남지 않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느린 판단은 용기가 필요하다.


당장 답을 내놓지 않는다는 건, 모른다는 상태를 잠시 견디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름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생각은 정리되고, 기준은 선명해진다. 그리고 그 기준이 쌓여 한 사람의 태도가 된다. 나는 광고라는 일을 하며 이 태도가 결국 가장 오래 남는 자산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확인해왔다. 기술은 바뀌고 도구는 사라지지만, 판단의 태도는 남는 것이었다.


속도가 바뀐 시대에 광고인이 붙잡아야 할 것은 더 빠른 판단이 아니라 더 깊은 판단이다. 기술이 아무리 많은 선택지를 던져줘도, 선택의 책임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느리게 판단할 수 있는 여유와 기준이 필요하다. 나는 그 기준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일부러 한 박자 늦게 생각하려 애쓴다. 그것이 이 일을 오래 해온 광고인으로서 내가 선택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어느 광고인의 독백

세 번째 이야기는 그렇게,

속도보다 기준을 붙잡는 사람의 기록으로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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