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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Maf Aug 23. 2023

참 자아는 관조한다.

타인, 과거, 미래를 벗어나다.


2022년 7월 1일


나는 왜 내 의식 속에서만 존재 가능한 ‘타인’이라는 피조물에 영향을 받을까? ’나‘라는 관찰 주체가 없을 때 ‘타인’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우주가 존재하려면 인지할 수 있는 생명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의 말처럼 타인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려면 ‘나’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타인’이라는 규정 자체가 ‘내가 아닌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내가 아닌 무언가’도 존재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내 의식이 사라지면 나와 타인이라는 존재의 유무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내 의식이 사라지면 나와 타인을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사라진다.


그래서 ‘나‘와 ’ 타인‘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내 의식이 필요하다.


이렇듯 내 의식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타인’이라는 피조물에 왜 나는 영향을 받을까? 그것은 그 타인이라는 존재를 내가 사라져도 남아있는 하나의 객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내 의식이 사라지면 ‘타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할까?


만약 존재하더라도 의식이 없는 내가 그 타인을 인식할 수 있을까?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인지가 가능한가?


타인이 인지가 가능하다면 내가 존재해야 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타인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타인의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만약 내 육체가 소멸한 상태에서도 내 의식이 존재해서 내가 여전히 타인이 인지할 수 있다면, 나는 영원히 사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영원히 존재하는 신과 같은 나에게 타인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즉, 내 의식이 영원히 존재를 하든, 소멸을 하든, 타인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그 의미 없는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가?


그것은 아직도 ‘타인’을 내가 아닌 무언가로 인식하는 오류에서 발생하는 현상인 것 같다.






2022년 7월 1일


 내가 죽어서 내 의식이 소멸된다면 나는 나의 죽음을 인지할 수 있는가? 의식의 소멸은 기억을 보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의식이 소멸되는 그 시점부터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의식이 소멸되면 남아 있는 피조물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남아 있는 자의 슬픔을 과연 나는 인지할 수 있는가?


남아 있는 자의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내가 소멸되었을 경우, 내가 나의 소멸을 인지할 겨를도 없이 소멸된 경우, 남아있는 피조물들은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타인의 죽음은 살아있는 나에게 영향을 주고, 나의 죽음은 살아있는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만,



나의 소멸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2022년 7월 1일


인간에게 미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미래’란 도래하지 않은 시간인가?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란 영원히 도래할 수 없으니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된다.


그렇다면 미래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곧 도래할 시간인가? 도래한 시간은 ‘현재’이거나 ‘과거’가 된다. 즉 곧 도래할 시간은 죽을 때까지 나에게는 없는 시간이다.  


결과적으로 도래한 시간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그 시간은 현재를 거쳐 찰나의 순간 과거가 된다.


도래 중인 시간이라는 말이 있을까?


‘현재를 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그 미래를 위해 우리는 이미 도래한 현재를 갈아 넣는다.


동물과 식물에게도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 존재할까? 꽃에게 저녁 5시 30분이 존재할까?


왜 인간에게만 저녁 5시 30분이 의미가 있는가?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인간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장미에게 존재하지 않는 퇴근시간이 있는 것이다.






2022년 7월 1일


회피와 관조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모른 척을 하는지 관찰을 하는지 나 자신은 구분할 수 있는가?


회피는 두려움을 수반하지만, 관찰은 두려움을 수반하지 않는가?


관찰하다가 두려움이 수반되어 인위적으로 관찰을 중지하는 상태를 회피라고 한다.


관찰을 중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관찰 후 발생하는 나쁜 감정에 의해 관찰을 중단하는 상황을 몇 번 접하다 보면, 특정 상황에 뛰어들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상황을 피하게 되는데 그것이 회피다.


그렇다면 관조는 감정이 없는 상태인가?


우파니샤드의 관조하는 새는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아무런 집착 없이 초연하게 바라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관찰과 관조는 어떤 차이일까? 관찰은 분석과 목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관조는 아무 목적 없어도 가능하고, 분석을 수반하지 않아도 된다. 즉, 목적의식 없이 그냥 보는 것이다.


목적의식도 없고, 분석도 안 하는데 도대체 왜 보는 걸까?



참 자아는 왜 피조물들을 관조하는가?



관찰을 하면 분석을 하니 두려움이나 기타 감정 등이 수반되어 회피가 발생하지만, 관조를 하면 아무런 분석을 하지 않으니 두려움이 수반되지 않아 회피가 발생하지 않는다.


관찰을 사고의 영역이고, 관조는 인지의 영역이다.


사고가 없어도 관조가 가능하고, 의식만 있으면 관조가 가능하다.



참 자아는 관조하는 새이다.



자각몽의 발동기제도 꿈을 관조하면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나의 의식이 타인, 과거, 미래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시간의 개념 없이 대상들을 관조할 때 참 자아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고,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면

참 자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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