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시민통합 경험담
난 네덜란드에 그렇게 오래 있었으면서도 아직 유럽거주권도 없고 네덜란드 여권은 받을 생각도 없다. 그동안 회사에서 스폰서를 해주는 회사원/전문지식인 (highly skilled migrant) 비자로 생활했다. 그만큼 그 회사를 더 다니지 않게 되면 사정이 무엇이든 몇 달의 유예기간 후에는 불법체류자가 되는 형식의 비자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고 일정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이상 비자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하지만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며 갓난아기를 어린이 집에 일주일에 이틀 이상 보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거나 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회사에 다니는 것과 소득과 상관없는 네덜란드 남편의 배우자 비자로 바꾸게 되었다. 바꾸는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체류의 목적(purpose of stay)이 바뀌고 한 달 만에 이민국에서 편지 날아왔다. '시민통합 (civil integration, 네덜란드어로는 inburgering; 인버허링/인버거링/인뷔르흐링)'을 3년 이내 마치지 못하면 네덜란드를 떠나야 함. 구청에서 연락 갈 것임'. 그때 조금 후회했다. 괜히 비자를 바꾸었나 싶었다. 이 시민통합 과정이 시간을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언어(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는 물론 기타 네덜란드의 직장생활, 네덜란드의 사회, 네덜란드의 가치에 대한 수업이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얼마 전부터 법이 바뀌어 구청직원이 담당자가 되어 무슨 수준의 언어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어떤 항목은 생략해도 되는지 일대일로 프로그램을 짜고 관리를 한다. 구청에서는 내 출산예정일 하루 전날 인터뷰를 하러 오라고 예정일 일주일 전쯤 편지를 보내왔다. 다짜고짜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담당자 핸드폰 번호가 있길래 담당자와 전화를 하고 일자를 바꾸었다. 만삭에 인터뷰를 하고, 회사 계약서도 보여주고, IQ시험 같은 시험도 치고, 최대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줄여달라고 여러 번 이야기한 끝에 내 프로그램이 나왔다. 2년 만에 다 통과하라는 오류와 함께. 3년이 법적인 기준치인데 왜 나는 2년? 이걸 정정하는데도 한참 걸렸고 결국 내가 발 벗고 나서서 DUO라는 또 다른 기관에 전화해 해결해야 했다. 구청 담당자는 그 후로도 아무 예고 없이 전화를 한다. 공부랑 준비는 잘 돼 가고 있냐는 식으로 물어보고 다음 미팅은 전화로 할지 직접 만나서 할지 이야기한다. 전화하면 되었지 또 미팅은 왜 잡나 싶다. 알아서 한대도 말이다. 그래도 시험을 통과했을 때 기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이 담당자 요스(Jos)다.
처음에 한 것은 네덜란드 가치관에 대한 수업 6시간이었다. 이 때는 아기가 어려 젖을 먹이면서 세시간 짜리 토론 수업을 들었다. 산휴 때였지만 미룰수록 힘들어질 것 같아서 하나하나 차근차근해두기로 했다. 그나마 이미 네덜란드에서 직장에 오래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에서 수료해야 하는 네덜란드 구직/직장 관련 강의는 듣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나머지 시험을 준비한 이야기다. 혹시 나처럼 네덜란드어 B1 레벨 언어시험이나 인버허링을 준비하는 분이 있다면 참고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우선 나는 시간이 없었다. 아기는 막 태어나 잠도 못 자는 시기에 무슨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건 출산 후 한참이 지나 서다. 그러고 나니 벌써 3년 기간의 반이 지나있었다. 6개월마다 언어시험 하나씩 보자는 생각도 뒤로 쏙 들어간 것이 이제 둘째를 임신했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얼른 시험을 다 통과하지 않으면 정말 너무너무 힘들 것 같아서 후딱 다 해치워버리고 싶어졌다. 아기를 돌봐야 하니 학원에 갈 수도 없었다. 직장도 가야 하는데 학원은 3시간씩 일주일에 2-3회 가야 해, 학원에 가기는 불가능했고 내가 알아본 학원에서 온라인 수업을 제공해주지도 않았다. 구청담당자가 정 시험을 통과 못하면 16주 기간 연장을 하거나 언어 시험 수준을 B1에서 그 보다 낮게 조정할 수 있되, 정식허가를 받은 학원에서 공부할 때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은 뒤로하고 찾은 나만의 방법은 읽기, 듣기, 네덜란드 사회에 대한 시험은 독학으로, 그리고 말하기와 쓰기는 선생님을 구해 연습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먼저 본 시험은 네덜란드 사회에 대한 시험이다. 책 한 권 다 풀어보면 그럭저럭 할만하다. Welkom in Nederland라는 책이다. 네덜란드에서 생활하는 데 유용한 상식을 물어보는 정도고 역사적 사실보다는 현대생활에 관련된 문제가 많이 나온다. 내가 시험을 볼 당시 선거철이라 정당에 관한 내용을 많이 읽었는데 그런 최근시사까지 반영해서 문제를 내지는 않나 보다. 그냥 적당한 내용이 나왔다.
시험 당일 당황한 점이 두 가지였다. 사지선다를 읽고 푸는 문제인 줄 알았는데, 듣기 시험이었다. 전혀 상상을 못 했어서 빠르게 적응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모두 다 함께 시험을 시작한다. 긴장했던 난, 시험 자리에 앉고 나서 시험을 나 혼자 시작했다. 그걸 발견한 감독관... 난 당장 시험도 못 치고 집에 가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이 가끔 유두리가 있다. 그래서 날 그냥 봐줬다. 대신 다른 사람들도 시험을 시작할 수 있기까지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내 컴퓨터의 타이머는 계속 흘렀고, 마침내 15분 남았다는 알림 창이 떴을 때 난 시험의 반도 못 푼 상태였다. 다급하게 감독관에게 이야기하자, 시험 시간을 연장해 주었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시험을 마칠 수 있었다. 결과는 100점 만점에 90점. 공부를 지나치게 열심히 했었나보다.
읽기과 듣기는 Inburgering B1 (Ad Appel) 책을 통해 준비했다. 수도요금이나 시청에서 세금 내라는 편지를 통해 대충 감으로 늘린 읽기 실력은 유용했지만 그 수준으로 중급단계인 B1은 어려웠다. 거의 없는 듣기 실력의 결과는 더욱 처참했다. 문제를 풀면 반은 우수수 틀리니 그때부터 매일 밤 아기가 자러 가면 1시간씩 책을 잡고 네덜란드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남편이 읽어주는 아기 동화책도 이해가 가지 않아 집에 있는 모든 네덜란드어 동화책도 다 읽었다 (이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Preply 앱을 통해 아르헨티나에 사는 네덜란드 선생님을 구해 모르겠는 부분을 물어보고, 그러면서 기초문법도 배울 수 있었다. 실제 시험은 책 보다 쉬웠다. 그리고 의외로 듣기 시험을 읽기 시험보다 더 잘 봤다. 듣기 시험이 운 좋게도 쉬웠다. 기출문제 중 어느 할아버지 구청장의 인터뷰는 너무 들리지 않아 몇 번을 더 들어봤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아주 천천히 말하는 아줌마 치즈메이커 인터뷰라 재밌게 들으며 시험을 쳤다. 사실 인버허링 언어시험은 점수가 중요하지 않다. 한 60점만 맞으면 통과다. '충분하다'는 것이다. 여기 '제스 예스 (zes yes)'문화라는 게 있는데, 60점이면 통과니 더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적당하면 되는 시민통합 시험이니 사실 몇 점을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은게 맞고, 시험결과에 100점 만점에 몇 점인지 나오지도 않는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못할지 알고 공부를 덜 하나 싶은 거다. 그대로 시험을 치면 50점도 간당간당 같으니 난 열심히 공부해서 한 번에 통과하는 방법을 택했다. 시험도 한 번 치려면 시험장소에 가는 시간까지 포함 4시간이니, 아기를 봐줄 시부모님과 시간도 맞춰야 했고 이거 저거 불편했기 때문이다. 만약 여유가 있다면 그냥 시험을 쳐보고 만약 통과하지 않으면 그에 맞춰 공부를 더 하는 것도 방법인가 싶었다.
얼마 전에 봐서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쓰기와 말하기 시험은 선생님과 일주일에 세 번씩 수업을 해 2주간 공부했다. 같은 책을 교재 삼아 할 수 도 있었지만, 둘째가 생기면서 급하게 시험을 치고 싶은 바람에, 기출문제 위주로 벼락치기를 했다. 이때 유용한 것이 위에 말한 책의 저자인 Ad Appel의 웹사이트다. 수년간의 기출문제가 비디오 형식으로 나와있어서 쓰기는 선생님한테 검사받는 방법으로, 말하기는 일대일 수업으로 교정을 받아가며 준비했다. 말하기에는 시험 통과하는 공식이 있었다. 영어나 한국어와 다른 문장구조를 잘 이용해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면 된다. 말하기 시험은 좀 충격이었다. 우선 말하기 시험은 컴퓨터에 대고 말하는 것이다. 20초 주어진 시간 동안 문제에 대한 답을 하고, 시험은 자동으로 넘어가 30분이면 시험이 끝난다. 충격이었던 점은 문제의 반 정도가 이미 한 번 본 기출문제였던 거다. 내가 본 웹사이트 기출문제의 예시 답안만 달달 외워도 통과할 것 같다. 사실 실수를 많이 해서 재시험을 봐야만 한다면 어쨌든 다음번 공부법은 익혀놓았다. 쓰기 시험에서는 읽기 시험에서처럼 (정해진) 사전을 쓸 수 있어 도움이 많이 된다. 쓰기 시험도 컴퓨터로 쓰는데, 사실 100분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 남는 시간 동안 내가 자주 틀리는 문법이나 맞춤법을 이 잡는 듯이 찾느라고 진이 빠졌다. B1이 이곳의 MBO (직업전문고등학교) 수준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MBO 다닐 때 생길 상황에 대한 질문이 엄청 많았다. 무슨 학교에서 무슨 교육과정을 다니는데 시험을 못 본다, 어떻게 할 것이냐 따위의 질문 말이다.
마지막 네덜란드어 시험을 모두 본 날, 유난히 우는 아기를 재우다 포기하고 남편한테 맡기고 소파에 앉아 거북목으로 하염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닦는 것도 샤워도 네덜란드어 공부도 스트레칭도 빨래도 안 하고 그냥 시간을 낭비하는 사치를 만끽했다. 그만큼 스트레스도 받고 부담도 많이 갔던 네덜란드어 공부다.
그래서 시민통합과정을 거의 마친 지금의 나는 더 네덜란드 사람 같아졌나? 당연히 아니다. 시험을 통해 내가 네덜란드 사람과 비슷해질 수는 없다. 지식은 늘었다. 살면서 들여다보지 않은 네덜란드 행정구역이나, 역사적 사실 등 잡식이 늘었다. 남편은 진담으로 내가 자기보다 네덜란드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한다. 그렇다고 네덜란드 말이 늘었나? 그건 아니다. 그래도 네덜란드어 문법과 단어도 이제 좀 더 안다. 학원이나 개인 교습으로 알게 된 네덜란드어보다 지금이 이 방식으로 한 게 훨씬 도움이 되었다. 문법기준으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 이해기준으로 공부하는 거다. 말하기 시험 연습하던 기분으로 가끔은 일상생활 중 네덜란드어 말도 해본다. 남아프리카 출신 직장 동료도 네덜란드 공부를 하는데 (아프리카안스는 네덜란드어와 비슷한 단어를 많이 쓴다), 그가 명언을 남겼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외국인이 네덜란드 말을 하길 바라지만 도와주지는 않아'. 이 말이 정답이다. 누구 하나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잘 안 들리고 말하기도 힘들다. 이제 시험이라는 의무는 다 마쳤으니, 진짜 네덜란드어 연습을 할 때이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친구를 사귀면 그 아기들 네덜란드어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학부모간의 교류도 많아질 테고. 듣는 귀만 뚫리면 되겠다 싶으니 앞으로의 공부는 어떻게 해볼까 생각해 본다.
첨부 - 구청 직원도 알려주지 않은 유용한 웹사이트 (학원을 다니지 않으니 이런 정보가 부족했다).
- B1 시험 스케줄: 아무 때나 신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1년 단위로 신청 날짜, 시험 날짜, 결과 통지 날짜가 정해져서 공지된다. Examenrooster Programma I | Aanmelden | Staatsexamens Nt2
- 말하기/쓰기 기출문제 & 채점방식 (정부제공): Welkom | Facet oefenexamens
- 말하기/쓰기 기출문제 (Ad Appel; 정부에서 제공하는 3년 치 예시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볼 수 있다): Examenvragen B1 | AdAppel Taaltrai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