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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Optimist Apr 15. 2020

화성탐사와 아동빈곤 구제 사이의 선택

선거일 특집, 정치와 주권과 투표의 의미에 대해서

칼 세이건이 쓴 <창백한 푸른 점>을 읽고 있다. 그 책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걸어서 노바야제믈랴, 에이어스 록, 파타고니아로 갔고, 돌로 만든 창 끝으로 코끼리를 사냥했으며, 7000년 전에 갑판도 없는 배로 북극해를 건넜고, 바람의 힘 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았으며, 또 최근에는 외계공간으로 나선 지 10년 만에 달 표면을 걷기까지 했는데,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화성으로 가는 일에 주춤거리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지구 주민들이 피할 수 있는 고통, 즉 몇 달러만 있어도 탈수증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데 화성 탐험에 드는 비용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 순간 나는 마음이 달라진다.




[정치]란 화성 탐험을 위해 항공우주과학분야에 투자를 할 것인가, 아동빈곤을 구제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위 구절은 과학철학자가 쓴 글임에도 정치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구절이 아닌가 한다.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가 있는데, 대표적인 견해 중 하나가 정치란 "가치(또는 한정된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설명이다.


사회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택지가 화성 탐험과 아동빈곤 뿐이라면 괜찮겠지만, 각자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나열하면 지역 보육시설 확충부터 타 항성계 진출까지 정말 다양한 요구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원하는 바를 그대로 반영하지는 못하였겠으나, 21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후보들이 내세운 공약을 모두 실현시키는 데 필요한 비용이 4,400조, 우리나라 국가예산의 8배라는 기사도 나올 정도로 우리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때 한 쪽에 이득이 되는 경우는 다른 쪽에 손해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회사의 복리후생비 예산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시니어 직원들이 원한다고 해서 비용이 적지 않은 자녀 학자금 지원제도 같은 것을 회사가 고집하면 주니어 직원들의 불만이 나온다. 


타노스처럼 인구의 절반을 날려버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치열한 이권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가치는 권위적으로 배분될 수밖에 없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양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배분은 정치의 마지막 과정이라 봄이 타당하다. 이슈가 발생하면 각각의 이해관계자들이 본인들의 주장과 근거를 들고 여론전을 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이를 조율하며, 각 진영을 설득한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선에서 끝낼 것인지를 최종적으로 확정한다. 확정된 내용은 입법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을 구속한다. 이 과정까지 이루어져야 비로소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이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주권]이란 화성탐사를 갈 지, 아동빈곤을 퇴치할 지의 결정을 누가 할 것인가, 즉 권위적인 배분에 관한 선택 권한을 누가 가질 것인가(=권위의 근거는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헌법 제1조 제2항에 따라 주권재민원칙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대한민국의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선택을 행하게 된다. 과거 군부 독재시절에는 군부를 장악해 독재권력을 가진 독재자가, 절대왕정시절에는 왕권신수설에 의해 왕이 주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했다. 


가치배분에 정답이 있지는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지리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그동안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가령, 18-19세기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결과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대 다수가 최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일부를 희생시키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외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시도는 이루어져왔지만 내가 아는 한 아직 정답을 찾은 사례는 없다.


주권재민 원칙은 이렇게 결과적 정답을 얻는 것이 어려우므로 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절차적 최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정당한 절차에 의해 주권을 행사하는 독재정이나 왕정과 달리,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주권을 보유하고 행사하는 민주정에서는 모든 국민이 스스로 선택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진다. 


다수가 결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결과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특히나 분할통치(Divide and rule)와 같은 전략에 취약해, 상대적 소수의 자기결정권 보호를 위한 장치들이 요구된다. 그러나 최소한 모든 사람이 권한을 갖는다는 점에서 공정하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를 최선의 차악이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존재하는 터일 것이다.




[투표(와 선거)]는 화성탐사를 갈 지, 아동빈곤을 퇴치할 지의 결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재정이나 왕정에서는 투표가 불필요하다. 권력자의 결단(Dezision)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던 이전의 정치체제들과는 달리, 민주주의 사회의 주권자인 국민은 다중적이기 때문에 다중적인 주권자들의 이해관계가 불일치할 경우(사실 필연적으로 그러하지만) 이를 조정할 수단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간접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주권자는 실질적인 정치과정을 운영하는 정치가들을 투표를 통해 통제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투표는 정치과정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투표의 중요성이 역설되는 것인데, 사실 이는 아무것도 안 하느니 제발 투표라도 하자는 호소에 가깝지 않나라는 생각을 한다.


간접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대리인문제의 발생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대리인문제란 경영영역에서 주로 언급되는 개념인데, 회사의 주인인 주주가 직접 회사경영을 할 수 없으니 일반적으로(글로벌한 시각에서..) 전문경영인을 대리인으로 선임하여 회사의 경영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 대리인인 전문경영인이 주인인 주주의 이익과 다른 방향으로, 가령 본인의 보신을 위한 의사결정만을 반복하거나 이를 넘어서 본인의 사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현실정치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에 정치가들 우리의 삶을 그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쥐락펴락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감시와 참여가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투표를 하면 끝이 아니라, 어찌 보면 내 삶을 낫게 만들기 위한 시작점, 최소한의 행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의 높은 투표율이 끝이 아닌 시작점이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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