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찰나
Part3. 친한엄마
아이를 낳은 후 삶에는 새로운 단어가 하나 추가되었다. ‘친한엄마’
친근한 어휘들의 조합으로 된 낯선 이 단어는 나와 내 아이, 상대방과 상대방의 아이를 포함하는엄마- 아이 짝궁관계 단어이다.
아이를 가정보육하기로 결정하면서(아이에게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자연과 가까운 낯선 곳으로 이사하면서(어서 아는 사람을 만들어 육아를 공유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 ‘친한엄마’를 만들기 위해 혹은 누군가의 ‘친한엄마’가 되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의 나는 관계에 굶주린 배고픈 하이에나였다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놀라웠던 사실은 내 주변에는 관계에 굶주린 하이에나들이 나 말고도 참 많았다는 거였다.
그렇게 굶주린 우리는 아이의 이름을 묻는 순간부터 서로에게 친한엄마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푼 희망을 품었다.
엄마라는 이름과 함께 이 새로운 관계도 처음이었고, 처음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설렘과 잘해보겠다는 의욕충만을 몰고 왔다. 열심을 내었던 것 같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로들의 집을 오가며 음식을 나누고 육아정보를 나누고 마음을 나눴다. 내 아이를 아끼는 만큼 그녀들의 아이들도 예뻤다.
하지만 너무 열심을 낸 탓일까? 나는(혹은 우리는) 지쳐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는 방향은 같았지만, 각자가 지닌 속도와 허용되는 거리가 달랐다.
종종 혼잡하고 혼선이 왔다.
혼잡한 틈을 타 홀로서기를 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나자 이제야 제대로 생각할 시간이 생겨났고 관계에 굶주린 하이에나 같은 마음으로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결론과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건 이기적이라는 결론은 내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에서 멀어져 혼자만의 시간(아이와 나만의 시간)이 늘어나자 놀랍게도 이제껏 알아채지 못한 내 아이의 다양한 표정들이 보였다.
자, 이제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갈 준비(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를 차근히 해나가면서 주변을 신경 쓰느라 놓쳐버렸던 아이의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순간들을 마음에 차곡히 담을 준비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한동안 새롭게 이사한 이곳에서 친한엄마도 없이 그 누구의 친한엄마도 아닌 채로 이방인 같은 생활을 해나갔다. 그 시간 동안 아이와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고 일상에서 나만의 리듬도 찾아갔지만, 문득문득 마음이 외롭다고 칭얼거렸다. 아이의 칭얼거림까지 겹쳐지는 날에는 마음이 멍들고 곯은 사과 같았다. 그런 날은 어른과의 대화가 필요했고(남편이 퇴근하기도 전에 아이와 잠들어 버리기 일쑤인 날들이 많았다)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지만, 다시 혼잡한 생활에 뛰어들 용기도 좋은 사람이 되어줄 자신도 아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이와 나 둘만의 잔잔한 일상이 주는 안락함이 내게는 더 편안했다.
그쯤에 나는 이런 글을 쓰며,
아무리 좋은 사람이 곁에 있어도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옳게 고독할 수 있어서 고립된 사람에게 손을 내밀에 줄 수 있는 아이가 되기를 바라.
**고독(孤獨)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고립(孤立) 다른 사람과 어울리어 사귀지 아니하거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외톨이로 됨
나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 지금은 억지스럽지 않게 시작된 서로의 육아방식을 존중하는 친한엄마가 있다.
그녀에게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주어 그녀의 아이 또한 늘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내 곁에 사람들이 있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걸 기억하는 새벽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P.S 기관에 다니지 않고 친구들보다도 엄마와의 시간이 훨씬 많았던 아이, 그리고 기관에 다니며 다양한 친구들과 만남을 가졌던 아이 친구. 두 아이의 하루하루는 달랐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함박꽃웃음을 지으며 친절한 마음씨를 내어주는 모습이 똑 닮았다.
다시 배고픈 하이에나의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여전히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일에는 최선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만이 보이고 차선책은 잘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엄마도 아이도 편안한 선택이 가장 우선순위에 놓여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늘 그렇듯 육아에 정답은 없고, 해답은 나와 아이에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