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도 잊은 그에게...나의 뒤끝.
다시 그가 돌을 던졌다.
꽝꽝 얼어 그 돌을 튕겨낼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을까.
그가 몇 년 만에 다시 불쑥 던진
"뭐 하니?"
이 한 마디가 만들어낸 파문은 컸다.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받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답을 해야 했다.
뛰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아..오랜만이네요..모르는 번호라 누군가 했네..잘 지내죠?"
너는 잘 지내냐, 나도 잘 지낸다. 이러고저러고 산다..
그런 근황을 묻고 답하다가 그는 끝내 또 선을 넘는다.
"나 지금 택시 안인데, 00 알지? 거기서 보자. 나와라."
뚝.
전화가 끊겼다. 잠시 후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젠 니가 답할 차례]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잠시 망설였고, 그래, 드디어 끝장을 보자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가 말한 곳은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걸었다. 걸으면서 몇 번이나 나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무슨 마음으로 그 자리에 가고 있는 거지?
지금 가서 그를 만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설마 그러길 바라고 가는 걸까.'
내 마음도 모르겠고, 그의 마음도 모르겠다.
그러니 만나서 그 마음을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그곳에 도착했다.
그가 벌써 도착해 있을 시간이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다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뒤통수가 찌릿, 했다.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땐,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이번엔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온몸이 쩡, 하고 울렸다.
벌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더 기다려야 하나,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쏟아지는 빗속에 서서 오래 생각을 했다.
배터리의 문제라면 그는 그곳에 왔어야 했지만, 그가 끝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그의 의지로 그곳에 오지 않았다. 핸드폰이 꺼진 것 역시 그의 결정이었고.
그렇게 가닥을 잡자 모든 게 선명해졌다.
그도 나도 서로에게 바닥을 보인 거고, 결국 둘 다 비겁한 인간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누가 먼저 비겁했고 누가 나중에 비겁했는지,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한지의 차이만 있을 뿐.
그는 모처럼 아내와 아이가 없는 홀가분함과 자유를 만끽하며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셨고,
비 오는 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마음이 울렁거렸겠지. 그리고는
가까이에 있어 손을 뻗어볼 수 있지만 안전거리만큼은 끝까지 지켜줄 안전한 사람이 생각났을 테지,
그 옛날처럼. 그러나 나는 그 옛날처럼 안전거리를 지켜줄 마음이 없었고, 그가 뒤늦게 그 사실을 감지했겠지.
나를 치고 달아난 뺑소니.
그 생각을 하며 다시 10분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젖은 몸을 씻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을 청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
다음날 오후.
어젯밤의 일에 대해 사과하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덧붙여 당분간 연락을 하지 않겠노라고도 했다.
아니 내 번호를 핸드폰에서 지우겠다고도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의 번호를 저장했다. 실수로 받게 될 일을 미리 막기 위해서.
분노는커녕 아무 마음도 일지 않았는데 그날의 일기에 딱 한 문장을 썼던 기억은 남아 있다.
[그가 죽었다]
그 뒤로도 몇 번 그를 만나는 일이 생겼다.
우연일 때도 있었고, 그가 나올 걸 알고 가는 모임에서도 만났다.
깍듯하게 인사하고, 근황을 묻고 답하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웃고 떠들고.
그는 참 잘도 잊은 것 같았다.
나도 살다 보니 잊게는 됐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거나 어쩌다 소식을 듣거나
어쩌다 만날 일이 생겨 만나고 돌아온 날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빈다.
너는 부디, 잘 있지 말라고.
그는 여전히 너무나 잘 지낸다.
사실은 그래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