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많고 소심하고 돈도 시간도 없었지만...
이제는 정말 꿈같은 이야기가 돼 버렸지만 꼽아보면 불과 2년 전 일이다.
내 생에 처음으로 밟아보았던 머언 나라 땅, 유럽.
만약 그때 얼떨결에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을 테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며 5년 뒤에 다시 오자, 했었는데...
그 다짐을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모르겠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옛 모습도 다시 볼 순 없을 것 같고.
내 주변의 동료나 지인들에겐 여행이 쉬워 보였다.
그래서일까, 자주 내게 물었다.
"일 끝나면 뭐 해? 어디 안 가?"
프로그램 하나가 끝나면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도 비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에 사람들은 내가 뭘 하는지 궁금... 해서라기 보다 약간은 답답해 보인다는 듯한 투로 물었다.
"집에서 맨날 뭐 하니? 보는 게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져, 글 쓰겠다는 애가 왜 그러고 사니."
그래, 떠나보면 알게 되는 게 여행이겠지만
나라는 사람은 새롭고 낯선 것들에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사람이다.
그래서 매번 외면했다. "나는 여행 안 좋아해. 귀찮아..."
그러던 어느 날, 자정이 넘은 밤에 톡이 울렸다.
[여기 가자]
주말 밤이었고, 그때만 해도 주말 심야의 홈쇼핑 채널에선 여행 상품이 '떠나라'를 부추기던 때였다.
쓰고 보니 너무 오래된 옛날이야기 같지만. 그랬었다.
아무튼, 톡에서 말하는 [여기]는 서유럽 6개 나라, 10박 12일의 투어였다.
영국, 프랑스, 바티칸,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을 찍고 나오는, 참으로 기적 같은 일정.
잠시 망설였지만 당장 떠날 것도 아니고, 일단 예약만 걸어놓는다니 답은 쉬웠다.
[그래 가자]
이것저것 입금하고 내라는 것들을 내고 나니 출발이었다.
아, 여행은 이렇게 떠나는 건가. 해서 아무튼 내 생에 첫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누구와?
언니와 언니의 두 딸과 함께.
패키지로 간다는 말에 내 주변 여행 좀 다녀본 사람들이 말을 거들었다.
"자유여행이 훨씬 좋은데, 왜 패키지야. 개고생일 텐데..."
하지만 나에겐 딱, 맞는 여행이었다.
물론 다녀와선 고생스러웠다 싶었고(대상포진이 가볍게 지나갔을 만큼)
자유여행이 훨씬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지만,
이것저것 알아볼 여유가 없고, 그 많은 과정이 귀찮고, 생판 모르는 곳에 나 혼자 툭 떨궈질 자신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겐 적절했다.
어느 정도 체력만 있다면.
그리고 덤으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여행을 함께 한다는 것도 어떤 면에선 재미난 일이었다.
여행지가 주는 자극도 있지만 낯선 사람들이 주는 자극도 신선했다.
영국 런던에 내렸을 때, 그때의 감격은 잊지 못하겠다.
풍경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지금 런던에 있다고?'
뭔가 장막 하나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열흘에 걸친 강행군은 정말이지 비타민과 자양강장제로 버틴 날들이었지만
모든 날들이 다 좋았다.
보이는 곳곳이 다 신세계였으니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차도 신기하고, 우체통도 신기하고, 나무도 신기하고, 신기하고 신기했다.
이 좋은 걸 그동안 왜 외면했을까. 왜 귀찮아했을까.
물론 귀찮음과 두려움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내 형편에, 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남겨두고 가는 걱정들이 늘 발목을 잡았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완벽한 타이밍이란 없다.
떠나는 순간 그게 타이밍이 되는 거지, 그걸 일찍 알았다면 더 많은 곳을 다녔을 텐데.
빡빡한 일정에 지쳤던 아이들은 여행이 중반부쯤 접어들었을 때 모든 감흥을 잃어버렸다.
그리고는 스무 살에 친구들이랑 올 계획을 잡고 있었더랬다.
첫째 아이는 이제 그 스무 살이 2년도 안 남았는데, 그 계획에 차질이 없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코로나 19로 흔들리고 있는 지구가 안정되길 바라고, 기후위기가 안정화되기를 바라지만
이건 시간이 필요한 일일 터...)
패키지로 떠나는 여행에서 제일 아쉬웠던 건
내가 좀 더 머무르고 싶은 도시에 더 있을 수 없다는 거였다.
한 도시에 내려 40분의 시간을 주면서
"자, 여기 오래된 커피집이 있으니까 커피도 한 잔 마시고, 한 바퀴 둘러보시고, 쇼핑도 하시고, 사진도 찍으시고 또 화장실도 다녀오시고..." 라는 가이드의 말이 원망스럽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신기한 건 그게 또 40분 안에 되기도 한다는 거.
여행하는 동안 몇 번의 소소한 기적을 경험했다.
다녀와서 일상은 또 빠른 속도를 내며 흘러갔고, 어느덧 추억이 돼 버렸다.
sns에서 몇 년 전 일이라며 알려주지 않는다면 잊히기도 할 일이지만..
가끔 여행지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럼 또 아련해진다.
사진 속의 아이들이 불과 2년 전인데도 너무 어려 보여서, 사진 속의 우리가 참 행복해 보여서.
그땐 그렇게 좋은 줄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너무 좋았구나..이런 깨달음이 와서.
엄마, 아버지랑도 같이 한 번 떠나야 할 텐데, 그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가늠하다 보면 또 아찔하고 아득해져서, 마음이 울렁거린다.
마스크를 쓰고 지낸 지 반년이 넘어간다. 여행은 꿈도 못 꾼다.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말을 얼마 전만 해도 의심했는데 이제는 의심할 수 없을 것 같다.
바이러스가 점령해 버린 시간, 그래도 행복해보자. 추억을 들춰보든 주변을 돌아보든 악착같이 행복해보자...
그래서 여행 사진 폴더를 열고, 언제일지 모르지만 떠날 계획을 세우고, 가족과 지인의 안부를 묻는다.
*비가 오던 저녁에 도착한 노트르담 대성당. 지쳐버린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 겨우 찍은 사진 한 장*
다녀와서 저 사진을 보며 아이들이 말하길 "그래, 저날 여행 중에 저기가 젤 좋았잖아."
아, 그랬었구나...문득 떠오르는 이 노래,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어쩌다 유럽여행, 나는 여전히 겁도 많고 소심하고 돈도 시간도 없지만...
마음이 있으니까 다시 떠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