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식민지 조선의 병리적 욕망과 파국을 그려낸 '고딕 호러'소설
1945년 봄, 경성은 대다수 백성들에게 지옥이었다. 그 누군가에게는 천국이었다. 친일파들이 그러했다. 여기 한 친일파 가문이 있다. 그 중심에 한일 합방 때부터 친일을 일삼고 온갖 부와 특권을 누린 한 가장이 있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대부분인 4대 문 안에서 전망 좋은 언덕에 유럽식 성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살아온 남자. 백성들은 뒤에서는 죽일 놈이라 욕 할지언정 앞에서는 사내를 조선의 실질적인 왕이라 추앙했다. 그 중에는 그를 부러워하고 시샘하고 질투하는 패들도 있었다. 닿을 수 없는 거리가 그들과 그 사이에 존재했다. 친일이 과연 마음가짐만으로 가능한 일이던가. 영웅이 되기 힘들지만 반대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가 되기에도 쉽지 않은 시대였다. 거기에는 빠른 두뇌회전과 일제에 헌신하고 거래할 기득권과 뒷배경 그리고 친일에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세상사를 관망하는 눈치 빠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부득이하게 일반 서민과 조선의 실질적인 왕 사이에는 많지 않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그도 아버지였다.
축하드립니다. 이로써 경성에서 제일 좋은 땅들은 모두 전하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게 축하받을 일인가? 나는 기쁘지 않다. 가장 좋은 일은 내가 경성 땅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저 간도를 가로질러 만주 땅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황 폐하, 대일본 제국의 영토가 되는 게 중요하지. 나는 오직 대일본 휘하의 일개 신하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라를 위해 한 것에 비하면 내가 누리는 게 황송할 따름이지.
집안사를 총괄하는 집사의 눈에 경이와 존경의 빛이 어렸다. 역시 왕가의 수장답다. 더 듣고 있으면 눈물이 흐를 것 같다. 그의 애국과 충국(忠國)에 경례라도 붙이고 싶은 마음이다. 똑똑, 들어와. 왕의 낮은 저음에 뒤따라 왕비가 들어섰다. 집사가 왕비에게 90도,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왕이 집사에게 눈짓으로 나가보라 한다. 집사가 두 손으로 문을 공손히 닫고 나가는 걸 확인한 후 왕비가 왕 앞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울상이다.
또 무슨 일인가. 당신은 나라 일에만 관심이 있지, 왕자한테는 티끌만큼도 신경 안 쓰죠?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이걸 좀 봐요.
왕비가 왕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받아드는 왕의 눈빛이 흔들린다.
이거 왕자 성적표 맞나? 중학교 진학한 내내 전교 1등이지 않았나? 근데 이건 누구 성적표야? 반에서 끄트머리 성적이잖나? 네, 눈은 있어 바로 보시는군요. 도대체 왕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뿐만이 아니에요. 일주일 전에는 같이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랑 싸움을 하질 않나. 단짝 친구라면 동양척식주식회사 간부의 자제 아닌가? 정신 나간 놈! 근데 당신은 왜 그걸 이제야 내게 보고하는 건가? 보고? 날 집사처럼 종놈 취급하지 말아요. 말하려 해도 땅 놀이에만 정신 팔린 당신이 내가 얘기할 시간은 줬냐 이 말이지요. 그럼 어떡했으면 좋겠나? 당신 생각에. 누군가 당신이랑 나 말고 왕자를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누구? 가정교사라도 들여서 왕자 마음을 잡게 하자는 거지요. 갑자기 가정교사라니. 지금 과외 공부만 해도 엄청나게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런 과외 공부랑은 차원이 다른 24시간 밀착 지도가 필요하다고 봐요, 난. 당장 집사에게 말해서 가정교사를 구하도록 하지. 그게, 내가 봐둔 사람이 있어요. 누구? 우리 집 부엌에서 반찬 만드는 식모 아는 동생 아들래미라는데 북경에서 대학을 다니다 얼마 전에 귀국했다잖아요. 그런 근본 없는 놈에게 왕자를 맡길 수 있겠나? 두고 보시라고요. 머리, 인물, 인품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데 없이 모조리 갖춘 청년이랍디다. 그래도 영 찜찜한데 조센징은……. 그럼 마지막에는 왕자가 직접 결정하도록 하지요 뭐. 그럼 집사가 데려오는 한 사람, 그 식모가 아는 놈 한 명 두 명 중에서 왕자가 마음에 드는 놈을 가정교사로 두도록 하지.
왕 집무실을 나오는 왕비 얼굴에 만족감이 넘쳐났다. 그런데 저 멀리서 공주가 서서히 다가왔다. 왕비가 금방이라도 짜증이라도 낼 듯 싫어하는 티가 역력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공주를 보고 왕비가 입을 연다.
공주, 매번 말하지만 날 보면 인사하는 시늉이라도 하란 말이야.
공주가 왕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 숙인다. 그러고는 다시 왕비가 금방 나온 왕의 집무실로 향한다.
저게, ‘어머니’ 말 한마디 없이……. 끝까지 날 무시한단 말이야. 그래, 내가 후처다 이거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년!
왕비에게는 공주가 늘 눈엣가시다. 이 성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진다. 늘 자기를 하대하며 자존심을 건드리는 존재, 더욱이 얼굴은 조강지처인 자기 어머니를 닮아 얼마나 예쁜지. 저절로 질투와 시샘, 자격지심이 치받아 올라온다. 왕비는 공주를 계속 노려보다 하녀들이 다가오자 눈을 거둔다.
아바마마, 저예요.
방에 들어선 공주 말을 듣고 왕은 기겁하고 손사래를 친다.
안 된다. 안 돼. 절대 안 될 일이야. 아버지, 허락해 주세요. 젊은 딸 혼자 미국 땅에 보내는 정신 나간 애비가 어디 있단 말이냐? 밖에 나가 아무나 잡고 물어봐라. 제발,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이 조선 땅은 제 꿈을 펼치기에는 너무 좁단 말이에요.
왕이 검지를 입술에다 대고 ‘쉿’ 했다.
조선 땅? 여기가 넌 조선 땅으로 보이냐. 대일본 제국 천황 폐하의 은혜를 입은 영광스런 나라로 보이지 않고. 차라리 일본 본토로 가겠다면 내 허락하마. 남자도 가기 힘든 미국 땅에 너 혼자 가서 어쩌려고 그래?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죽어서 네 에미 얼굴을 어찌 보겠니. 천황폐하, 대일본 제국, 조선 땅, 일본 본토 다 지겨워요. 여기 이 땅은 죽은 송장이 묻힌 무덤 속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아버지가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저 혼자 도망이라도 가겠어요.
레이스 딸린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끌면서 공주는 왕 곁을 서둘러 떠나갔다. 왕이 떠나간 공주 쪽을 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철딱서니 없는 것! 네가 내 앞에서나 공주지, 머나먼 아메리카에서까지 널 공주대접 해 줄줄 아는 모양이구나. 저것을 어서 시집이라도 보내야지. 집사에게 말해서 어디 모자란 놈만 아니면 서둘러 결혼시켜서 집안에 앉혀야지. 여자로 태어나 현모양처로 사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도 모르고.
다음 날, 예비 가정교사 둘이 성을 방문했다. 왕비가 그들을 맞았다. 집사가 고른 청년은 일본군 군복을 입고 있었고 식모가 말한 청년은 흰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둘 다 미남자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상반된 매력을 풍기는 둘이었다. 군인은 날카로운 쇠 같았고 다른 청년은 흐르는 맑은 물 같았다.
어서 오세요. 우선 전하부터 뵙도록 해요.
군인은 절도있게 경례를 하고 하얀 셔츠 조선인 청년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왕비를 뒤따랐다. 성 위에서는 공주가 커튼이 쳐진 창문 틈으로 이 두 방문객들을 몰래 훔쳐봤다. 오늘 아침 자기 머리카락을 빗는 하녀에게 오늘 동생 왕자의 가정교사가 방문할 거라는 언질을 슬쩍 들은 참이었다.
왕의 집무실로 가는 긴 복도에서 집사가 앞장을 서고 왕비는 두 청년 뒤를 따랐다. 그녀는 군인이 다리를 살짝 저는 것을 목격하였다. 아마 전쟁 중에 다쳤겠지. 같은 일본인으로서 동정이 일었다. 그에 반해 조선인 젊은이는 긴 다리에 검정 구두를 신고 자유롭게 안정된 자세로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집사가 두 청년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먼저 중위님이 들어가시고 그다음 순서로 그쪽이 전하를 뵙도록 하겠습니다. 왕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중위였구나. 어쩐지 늠름해 보였어.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에 그녀는 속으로 군인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걸 느꼈다.
어느 부대에 있었나. 왕이 군인에게 물었다. 만주에 있었습니다. 건강히 돌아온 걸 환영하네. 엄밀히 말하면 건강히는 아닙니다. 사내가 다리를 걷어 올려 자기 의족을 보여주었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네. 왕이 악수를 청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청년이 왕을 만났다. 제가 가정교사가 되면 전하께서는 제게 무엇을 해 주시겠습니까. 뜻밖의 물음에 왕이 멍해 있다 큰 소리로 웃었다. 글쎄, 원하는 게 있나. 저는 이 성에서 일하는 것 자체로 영광입니다. 곧 징병령이 내려질 텐데 자네도 예외는 아닐 거야. 거기서 자네 이름을 빼 주도록 하지.
그 순간 2층에서 으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이 무슨? 왕이 서둘러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바깥에서는 우당탕 의족을 찬 군인이 2층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왕비와 집사가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모두가 사색이 된 가운데 왕비가 왕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중위는 억지로 일어나 성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삽시간의 일이었다. 왕자를 만나보려 하다가 그만. 왕은 왕자 방이 있는 곳으로 뛰쳐 올라갔다. 왕자, 왕자! 대답이 없었다. 문고리를 돌려 보았지만 잠겨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왕이 방문을 쾅쾅쾅 세게 두드려 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집사가 방문 열쇠가 달린 꾸러미를 들고 급하게 왔다. 왕이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두 번째 청년이 말했다.
전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왕비도 청년을 거들었다. 왕이 문 앞에서 비켜서고 청년이 문고리를 돌려 왕자 방으로 발을 딛었다.
방안은 깜깜했다. 왕자님, 왕자님. 어디 계신가요? 그때 화살 하나가 매서운 속도로 청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청년은 침착을 잃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온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계속해서 왕자를 찾았다. 어두운 구석에서 활을 들고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집이 세 보이는 입술이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왕자님! 청년이 왕자 손에서 활을 받아 들었다. 다가가 왕자 등을 쓰다듬고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왕자가 청년의 품에 안겨 쓰러졌다.
그날 저녁 시간은 이 날의 소동을 전해 들은 공주의 웃음소리로 시작되었다. 깔깔깔, 그래서 그 군인은 왕자가 쏜 화살에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는 거군요. 왕비가 못마땅한 얼굴로 공주를 노려봤다. 왕이 맞은편의 왕자에게 물었다. 왕자야, 그래서 넌 어느 선생이 마음에 든다는 거냐? 후(後), 왕자가 후(後)라는 단어를 일본 말로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식탁을 떠났다. 자리에 남은 왕과 왕비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음 날부터 청년은 가정교사로서 왕실 사람들과 함께했다. 면접을 보러 온 날과 같은 차림이었다. 하인이 그가 들고 온 낡은 가방 두 개를 받아들었다. 청년은 고개를 숙이며 하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건 하인으로서는 처음 받는 대우였다. 이 성의 방문객 중에 자신을 그렇게 배려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기고만장했다. 청년은 지금부터 묵게 될 자신의 침실로 안내되었는데 그 방은 왕자 방 옆에 있었다.
청년이 이 성에 머물게 된 기념으로 몸을 씻으려 셔츠를 벗었다. 급한 성미를 가진 왕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눈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선생님 미안합니다. 청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벗었던 셔츠를 다시 걸쳤다. 잠그지 않은 셔츠 사이로 잘 단련된 가슴과 복부 근육이 드러났다. 왕비는 고개를 돌린 채 청년을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선생님을 모시게 된 기념으로 오늘 저녁 무도회를 열기로 했어요. 참석해 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저야 영광이지요. 그럼 됐어요. 아, 참 그리고 무도회에 입고 오실 옷은 제가 이따 하인에게 따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왕비 마마. 왕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방 밖으로 나왔다. 청년이 다시 옷을 벗는 소리가 왕비 귀를 스쳤다. 청년이 서 있는 반대편 벽에 그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왕비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흥분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날 밤 무도회의 주인공은 단연코 가정교사로 이 왕가에 새로 들어온 미남 청년이었다. 말쑥한 외모는 면도를 막 끝낸 턱선의 푸른 빛으로 더욱 강조되었고 왕비가 준비한 턱시도는 그의 큰 키와 단단한 체형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왕비는 그 점에서 부채로 자기의 입을 가린 채 웃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년은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이야기면 이야기 거기다 홀의 중앙에 위치한 피아노를 다루는 솜씨까지 모든 점에서 완벽했다. 조선 반도 중심 경성의 이름 난 집안의 규수들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년의 매력은 모든 사람의 인기와 주목을 단번에 얻어내기에 충분했다. 아가씨들이 돌아가면서 음악에 맞춰 그와 춤을 추느라 안절부절못했다. 일본 동경 시내 극장에서 데려온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무도회의 뜨거운 열기가 한껏 끓어 올랐다. 청년은 지치지도 않는지 모든 아가씨들과 평등하게 한 곡씩 춤을 추었다. 지칠 만도 한데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그는 젊은 육체를 자랑이라도 하듯 쉬이 움직임을 멈추지도 중간에 쉬지도 않았다.
보통 때는 앞머리를 내리고 다니는 공주가 웬일인지 이마 위로 머리를 올렸다.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한쪽은 어깨 앞으로 한쪽은 목 뒤로 넘겨 공주도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체통을 차리느라 청년과 춤도 추지 못한 왕비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지켜봤다. 불같은 질투가 일었다. 왕비 옆에서는 하루 종일 조선 땅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집무에 충실했던 왕이 코를 골았다. 왕은 왕비가 부채로 손등을 치자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바로 세웠다. 공주는 청년과 함께 무도회의 마지막 곡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녀는 청년의 몸에 가까이 다가서는 율동을 할 때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은 이 분위기를 무척이나 즐기고 있군요?
청년은 놀라지도 않고 공주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은 미소를 띤 채였다. 음악이 멎고 악사들이 악기 연주를 멈추었다. 즐거운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공주마마. 청년이 공주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의 손님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한 마디 한 마디 친일로 귀족의 자리를 얻어낸 일당들, 고관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건배사를 외쳤다.
-대일본 천황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오늘 무도회의 대단원을 마무리 합시다.
모두의 눈이 왕의 입에 모아진 찰나 공주가 청년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오늘 수고가 많으셨어요. 청년은 공주의 손수건을 사양했으나 그녀는 떠나려는 그의 손길에 자신의 손수건을 꽉 쥐어 주었다. 청년은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고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러다 분홍빛 립스틱으로 써진 메시지를 발견했다.
‘오늘밤 12시 중앙 분수대 앞 발코니에서 만나요’
청년은 잠시 당황했지만 누가 볼세라 손수건을 서둘러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무도회에 참석은 하지 않았지만 무도회장 기둥 뒤에서 청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있었다. 불참 사유는 건강상 이유였지만 왕자는 청년의 모습을 특히 누이인 공주와 청년의 춤 동작의 움직임을 미동도 않은 채 지켜봤다. 동경과 추앙, 슬픔으로 가득 찬 둥근 눈동자의 테두리가 이날 밤 달무리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밤 12시 중앙분수대 앞 발코니. 무도회의 열기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발코니 앞 정원에는 한 여름밤의 열기에 취한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이는 미남 청년이었다. 자못 무도회 때와는 다른 열정이 그의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발코니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오른손은 턱을 괴고 왼손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계속 움직였다. 청년은 자기 무드에 파묻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발코니 뒤쪽 커튼이 둘러쳐진 기둥 뒤에서 기척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청년이 어둠을 향해 공주님? 하고 물었다. 그러나 등장한 인물은 촛대의 불꽃 그림자가 얼굴에 일렁이는 16살의 소년, 왕자였다.
그 시각 공주는 옷을 다 갖춰 입고 자기 방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왕자가 공주 방 크리스탈 주전자에 녹여둔 수면제 알약만큼 깊은 잠이었다.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 왕자가 반쯤 문이 열린 공주 방에 몰래 들어갔다 메시지가 적힌 손수건을 그녀의 탁자에서 발견한 이후의 사건이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 첫 눈에 반했다. 사랑하고 연모하고 만지고 안기고 싶다.
왕자의 갑작스런 고백에 청년은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고 왕자의 두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왕자님, 그건 한때의 열병 같은 겁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왕자님은 지금 동성 간에 일어날 수 있는 충동적인 감정과 남녀 간의 애정을 혼동하고 있는 겁니다. 괴로워 할 필요 없어요. 저도 사실 그런 적이 있고 많은 소년들이 이러한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워 한답니다. 청년의 말에 왕자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반문했다.
-그대는 그대를 향한 나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것인가? 당신의 눈에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는 진심이다. 조센징들은 15, 16세가 되면 혼인을 하고 남녀가 육체적으로 결합해 아이를 낳는다고 들었다. 이성 간에 일어나는 일이 어찌 동성 간에 일어날 수 없다 하는가? 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 당신과 내가 아이를 낳을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 서재에서 본 책 속의 그림처럼 육체적 결합이 불허한 것은 아니다. 옛 그리스라는 나라에서는 오히려 남자와 남자간의 연애가 보통의 관계처럼 인정받았다고 들었다.
청년은 왕자의 양팔을 한 번 꽉 움켜쥐어 주고는 발코니에서 자기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왕자가 입을 크게 벌린 채 소리를 지를 찰나 상황을 정리하고자 청년이 손으로 왕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왕자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연민인지 동정인지 호감인지 사랑인지 모를 바람이 일었고 청년은 왕자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내리고 왕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청년의 등을 감싸안은 왕자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영문도 모르고 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하는 긴 복도에서 청년과 마주쳤다. 그녀는 귓속말로 청년에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무도회에서 무리했던지 그만 깜박 잠이 들어버렸지 뭐예요. 청년의 얼굴은 굳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청년의 무심한 반응에 대해 생각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무도회에서 나를 대하던 느낌과는 무언가가 달라진 거 같은데...
둥그런 원탁 테이블에 갖가지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이 음식들 중에 어젯밤 무도회에서 선뵈였던 음식과 중복되는 음식은 한 가지도 없었다. 왕이 중간에 앉고 왕비, 공주, 청년, 왕자가 순서대로 앉았다. 왕자가 아침 식사에 나타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왕비가 보기에 왕자의 볼에는 잘 익은 사과의 껍질에서 보이는 엷은 홍조, 생기를 넘어선 싱싱한 생명력마저 느껴졌다. 어젯밤 사정을 알 리 없는 왕비는 왕자의 회복이 다 청년의 지극히 건전하고 건강한 영향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주는 갑자기 어떻게 그런 대담한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탁 테이블보 아래서 스타킹을 벗고 맨발로 청년의 발등 위에 자신의 발을 얹었다. 청년은 모른 척 식사를 했지만 자신의 발등에서 복사뼈, 발목, 다리로 올라오는 맨발의 움직임이 신경 쓰였는지 헛기침을 했다. 왕비가 서둘러 주전자를 급히 들어 청년의 물잔에 물을 가득 채워 주었다. 저런저런 사래가 들렸나 보군요. 천천히 드세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왕비 마마. 아무래도 이상함을 느낀 왕자가 슬쩍 테이블보 아래로 눈길을 주다 공주의 만행(?)을 목격했다. 기분이 나빠진 왕자는 구두 뒤축으로 공주의 다른 발등을 콱 찧었다. 아아악 공주가 비명을 질렀다. 두 자녀의 청년을 둘러싼 신경전을 알리 없는 왕은 공주의 비명에 깜짝 놀랐다. 공주는 발등을 부여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왕은 당장 시종에게 의사를 부르라고 일렀다. 공주는 급히 도착한 의사의 치료를 받고 붕대를 감고 침대에 겨우 몸을 뉘였다. 그 조그만 녀석이 무슨 일을 벌인 게 틀림없어. 공주의 왕자에 대한 의심이 아지랑이처럼 올라 왔다. 설마, 혹시, 아니야. 아니야, 아니겠지.
왕비는 왕비대로 이른 폐경기에 접어들어 알 수 없는 우울한 심사와 고투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무도회에서 청년이 불렀던 노랫소리가 떠올랐다. 그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이 우울한 심정이 나아질 것만 같은데...그 때 청년은 공주의 방에 병문안을 와 있었다. 왕비의 하녀가 청년을 불렀다. 공주가 나직이 청년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를 조심해요. 아바마마와 왕비 마마는 침실을 따로 쓸 정도로 몇 년째 섹스리스에요. 당신을 향해 한껏 굶주려 있다구요
-설마...공주님은 왕비 마마가 저를 잡아 먹을까 봐 겁이 난 고양이 같군요.
공주의 얼굴이 자신을 고양이에 빗대는 청년의 말에 달아 올랐다.
청년은 왕비가 손님을 맞는 응접실에서 그녀를 위해 여러 곡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왕비의 우울감은, 실체는 외로움에서 비롯된 그 감정은 청년의 음성으로 어루만져지고 녹아 버리고 결국에는 사라졌다. 청년의 노래를 다 들은 왕비는 열렬한 박수를 치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청년은 마지막으로 왕비 앞에서 그녀의 우아함과 아름다움, 고고한 몸짓을 칭송하는 하이쿠를 즉석에서 지어 전해 그녀가 눈물까지 흘리며 격정적인 감정의 고양 상태에 이르게 만들었다. 선생님, 시는 어디에서 배우셨나요? 고등학교 다닐 때 문예반이었죠. 그때 저를 지도하신 선생님께서 실력이 대단한 하이쿠의 대가셨습니다. 그렇군요. 왕비가 손수건으로 한쪽 눈의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군요. 아니 청출어람이란 사자성어가 중국에는 있다죠? 청년에게 흠뻑 반한 왕비는 그에게 정장 여러 벌과 금붙이를 하사했다.
왕은 공주의 병세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녀의 맞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 시각 공주의 방문을 두드렸다. 공주가 침대 곁에 앉아 있다 몸을 이불 안으로 급하게 파묻었다. 왕은 공주가 아무 대답이 없자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공주의 방으로 들어왔다. 공주? 공주야! 공주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왕이 크게 한숨을 쉬고는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고 있지 않은 거 다 알고 있다. 내가 왕이기에 앞서 괜히 너의 아비겠니? 그건 누구보다 세상에서 너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이란다. 공주의 몸이 조금 움직였다. 왕의 말이 이어졌다. 몸이 불편한 건 알고 있다만 잠시 이리 와서 이 아비와 이야기를 좀 나누자꾸나. 공주가 덮고 있던 이불을 내리고 말간 얼굴을 드러냈다. 왕이 침대 옆에 자리한 짙은 초록빛의 소파에 몸을 의지했다. 공주는 자신의 행동에 괜히 부끄러움이 들었다. 애써 감정을 감추고 왕의 앞에 앉았다.
오늘 아침 다친 발등은 좀 괜찮니? 왕이 붕대로 감싼 공주의 발등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실내화를 신고 있었지만 발등은 꽤 부어 있었다. 조금 욱신거릴 뿐 괜찮아요. 공주가 자신의 발을 치마 속으로 감추며 말했다. 네 어머니 말이 널 계속 이 집에 두었다가는 큰 일이 날 거라고 하더구나. 아버지, 그 여자는 아무것도 몰라요, 게다가 절 도박빚 갚듯 빨리 처분하고 싶어한다구요. 그 여자가 아니라 네 어머니야. 인정할 수 없어요 제 어머니는 돌아가신 왕비마마 한 분 뿐이에요. 이런, 이런 네 어머니가 걱정하는 것도 일리가 있구나 이렇게 집안의 기강이 잡히지 않아서야 원. 암튼 널 빠른 시간 안에 시집 보내기로 했다. 아버지! 일단 다 듣고 말하거라. 네 어머니 말로는 네가 왕자의 가정 교사, 그 청년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 하더구나. 사실이냐? 공주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네가 대답을 않는 걸 보니 네 어머니가 영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닌가 보구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당키나 한 일이냐? 감히 그 천한 것이 너랑? 말도 안 돼. 선생님은 좋은 분이세요. 전 알 수 있어요. 네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이리 경거망동한 게야. 절대 안 되는 일이다. 아버지, 전하. 이번만은 제발 부탁드려요. 제발 제 말을 이번 한 번만 들어주세요. 왕의 눈이 노기로 번뜩였다. 공주는 왕이 마지막 말을 준비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네 어머니와 곧 상의해서 맞선 자리를 마련할 테니 그리 알고 있거라. 왕의 단호한 말에 공주는 순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잠시 침묵이 그들 부녀 사이에 흘렀다.
정 그리하시겠다면 저는 저 혼자서라도 미국에 가겠어요. 왕의 눈이 공주 말에 놀라 커졌다. 공주야, 넌 지금 미혹에 빠진 게야. 어서 이 아비 곁으로 돌아오너라, 제발. 이게 다 널 위한 일이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신랑감을 네게 대 줄 테야. 넌 그 신랑과 함께 성대한 결혼식을 하고 아이를 낳고 오래도록 영원히 행복해 지는 거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네가 몰라서 그런다. 한 남자의 아내로 귀여운 아이들의 어머니로 넌 오래도록 칭송받을 거야. 그럼 저는요? 저라는 존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버지. 왕은 더 이상 자신의 말이 공주에게 들어 먹혀 통하지 않음을 느꼈다. 너무나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아버지와 딸이었다. 듣기 싫다. 앞으로 일주일간 외출 금지다. 이 방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갈 생각 말아라. 그랬다가는 네 새어머니 말대로 곱추 영감에게 시집을 보내버릴 테니. 그건 실언이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에 나온 말을 전능한 왕이라고 해서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공주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가 아버지를 조종해 하다 하다 그 짓까지 계획하고 있었다니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미모 하나만을 믿고 어린 나이에 왕을 꾀어 이 집에 들어와 조강지처이자 공주의 친어머니를 독살까지 한 여자였다. 그 여자라면 진짜로 나이 많은 곱추 영감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자신을 팔아치워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음모에 공주는 몸서리가 쳐졌다. 왕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도리어 더 근엄한 표정을 짓고 공주의 방을 나갔다. 곧 왕이 한 하인에게 열쇠를 가져와 공주의 방문을 잠그라는 명령을 내렸다. 잠시 밖이 소란스럽더니 곧 공주의 방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잠겼다. 그때까지 발등이 아픈 줄도 모르고 방 한가운데 서 있던 공주는 갑자기 몸에서 온 힘이 빠져나갔다. 침대까지 몸을 움직일 겨를도 없이 공주는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응응응 응응응 공주의 입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울음소리가 배어 나왔다.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왕비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공주의 울음소리는 낮게 그러나 길게 이어졌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왕궁에 담요를 덮어쓴 한 사람이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공주였다. 공주가 어떻게 그 철옹성 같은 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먼저 말해 두어야겠다. 왕은 공주에게 바깥출입은 금지했지만 저녁 식사까지 금할 수는 없었다. 단 평소 공주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의 접근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노련한 남자 하인이 식사를 가져와 공주 방의 탁자에 놓았다. 음식에 눈길도 주지 않은 공주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기지가 발휘된 것은 그때였다. 공주는 남자 하인이 다시 빈 그릇들을 수거하러 오기 전에 흰 백지에다 펜으로 급하게 휘갈겨댔다. 그러고는 입에도 대지 않은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 아래에다 종이를 고이 접어 숨겼다. 시간이 지나 하인이 음식물을 도로 내가러 방을 찾았다. 남자 하인은 음식물과 쟁반을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하녀에게 전달했다. 젊은 하녀는 용케 접시 아래의 쪽지를 발견했다. 하녀가 남몰래 접혀 있던 쪽지를 펼치자 그 안에 있던 반지가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하녀는 커다란 다이몬드가 박힌 반지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바닥에서 주워 들었다. 그녀의 눈이 갑자기 희번덕거리기 시작했다.
일은 공주의 생각대로 일사천리 진행되었다. 어린 하녀는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는 늙은 하인의 방,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그의 외투를 뒤져 공주 방의 열쇠를 찾았다. 자정이 넘은 시각 누군가 공주 방 방문을 열쇠로 열었다. 곧 그 발걸음은 재빨리 공주 방에서 멀어져갔다. 침대 위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있던 공주의 얼굴이 곧 드러났다. 옷을 다 갖춰입은 상태였다. 공주가 비로드 담요로 온몸을 감쌌다. 공주 얼굴이 설레임으로 발그레 상기되었다.공주는 대담하게 그러나 용의주도하고 조심스럽게 가정교사인 청년의 방 앞에 이르렀다. 노크를 하기에는 바로 옆 방이 왕자의 방이라 자신의 동태가 발각될 위험이 컸다. 공주가 문고리를 돌렸다. 다행히 문고리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공주는 어느새 청년의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침대 위에 벗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잠들어 있는 청년의 얼굴이 창밖 달빛에 일렁이며 그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공주는 담요를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청년 곁으로 다가갔다. 공주는 청년의 아름다움이 빚어내는 빛에 취해 한순간 말을 잃었다. 기척을 눈치챈 청년이 몇 번 조심스럽게 움직이더니 눈을 떴다. 자기 얼굴 앞 공주를 확인하고 청년은 놀라움에 잠깐 몸을 떨었다.
쉿! 무언가 말하려는 청년의 입을 공주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지그시 눌렀다. 그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청년의 입술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청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주님! 청년이 공주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돌아가십시오. 저는 공주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고귀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상관없어요. 공주가 청년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이 누구든, 어디서 왔든 상관없어. 이 숨 막히는 지옥에서 나를 사람으로 봐주는 건 당신뿐이었어. 아바마마는 나를 늙은 곱추에게 팔아넘기려 하고, 왕비는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어요. 제발…… 오늘 밤만이라도 나를 구원해 줘요.
공주의 절박한 속삭임은 청년의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고독을 건드렸다. 그 역시 누군가의 온기가 절실했던 위태로운 영혼이었다. 청년은 천천히 손을 들어 공주의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당신을 놓치는 것이야말로, 내 생애 유일한 후회가 될 거예요.
공주가 발꿈치를 들어 청년의 입술을 찾았다. 망설임은 찰나였다. 두 입술이 맞닿자 억눌러왔던 욕망이 터지듯 폭발했다. 그것은 서로의 생명을 갈구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침대 위로 두 그림자가 엉켰다. 창밖에서는 마른 천둥이 쳤고, 이내 굵은 빗줄기가 성의 지붕을 때리기 시작했다. 밤비는 그렇게 밤새도록 퍼부었다.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원에는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났지만, 성 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왕비는 요즘 들어 부쩍 히스테릭해졌다. 그녀의 날 선 신경은 주로 청년을 향했다. 자신의 유혹을 번번이, 그러나 정중하게 거절하는 그 젊은 가정교사에게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그녀는 밤마다 술을 마시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감히 천한 것이 내 호의를 무시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어. 이 성안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어.’
그녀의 직감은 차갑고 정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식탁에는 기름진 로스트비프와 생선 비린내가 풍기는 수프가 올라와 있었다. 왕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고기를 썰고 있었다. 그때였다. 수프를 한 숟가락 뜨려던 공주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욱…….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지 못한 공주가 식당을 뛰쳐나갔다. 복도 끝 화장실에서 구역질 소리가 들려왔다. 왕비의 눈매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공주의 허리선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그리고 아침마다 창백한 얼굴로 신음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왕비의 눈빛이 아주 천천히 맞은편의 청년에게 향했다. 청년은 고개를 숙인 채 물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공주, 저것이…… 혹시?’
왕비의 붉은 입술이 묘하게 비틀렸다. 그녀에게 이것은 공주를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파국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날 오후, 왕자는 청년의 방을 찾았다. 자신이 습작한 풍경화를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선생님인 청년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청년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 열망이 소년의 집착만큼 커 가고 있었다. 청년의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왕자가 문을 두드리려 손을 든 찰나, 방 안에서 들려오는 낮은 대화 소리가 그의 몸을 얼어 붙게 만들었다.
선생님, 아이가…… 생긴 것 같아요. 몸이 이상해요. 공주의 설레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왕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스케치북을 쥔 처음에는 미세하게 떨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주님, 미안합니다. 제가, 제가…… 청년의 목소리에는 괴로움에 찬 당혹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에 비해 공주의 목소리는 강단 있고 단단했다. 아니에요. 우리 도망쳐요, 네? 이 아이와 함께…… 아무도 우리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살아요.
문틈으로 보인 광경은 왕자의 세계를 산산 조각냈다. 자신의 누이인 공주가,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고 사랑하고 추앙했던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청년은 그런 공주를 소중하게, 연인을 감싸듯 안고 있었다. 아……. 왕자가 뒷걸음질 쳤다. 손에 들려 있던 스케치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배신감. 그것은 단순한 실연의 아픔을 넘어선 것이었다. 왕자의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왕자는 비틀거리며 복도를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왕자는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잠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못 미더웠다. 벽에 걸린 그림도, 책상 위의 책들도, 숨 쉬는 공기조차 기이하게 다가왔다. 간질 발작의 전조가 뇌를 파고들었다. 시야가 일그러지고 이명이 들려왔다. 죽어야 해…… 다 무서워……. 왕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튼 줄을 풀었다. 두껍고 질긴 벨벳 커튼 줄이었다. 그는 의자를 끌어와 샹들리에 고리에 줄을 매달았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는 올가미에 목을 넣었다. 선생님…… 당신을 저주해……. 의자 넘어가는 소리가 둔탁하게 방 안을 울렸다.
왕자 마마! 마마, 안에 계세요? 마침 간식을 가져온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챈 하녀가 집사를 불렀고, 집사가 열쇠를 가져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악! 마마! 허공에 매달린 채 바둥거리는 왕자를 발견한 하녀의 비명소리가 성을 뒤흔들었다. 집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인들이 달려들어 왕자를 끌어내렸다.
왕진 의사가 급히 호출되었다. 숨은 붙어 있었지만, 왕자의 목에는 붉고 흉측한 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깨어난 왕자는 말을 잃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온 왕과 왕비, 그리고 창백하게 질린 청년과 공주가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 왕자의 시선이 청년에게 닿았다. 그 눈빛에는 예전의 동경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서늘한 살기(殺氣)만이 담겨 있었다. 나가……. 왕자가 화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나가란 말이야! 내 방에서 당장 꺼져! 그 광기에 찬 외침은 더이상 투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왕가(王家)의 균열을 알리는 서곡처럼 들렸다.
그날 밤, 대저택의 응접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폭풍전야였다. 왕비는 아들인 왕자의 자살 소동을 빌미로 뒷조사를 감행했다. 공주 방 책상 서랍에서 산부인과 진료 의뢰서를 찾아냈다. 그녀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그 증거물을 왕 앞에 내밀었다.
여보, 이것 좀 보세요. 집안 꼴이 아주 기똥차게 돌아가는군요. 왕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이내 흙빛으로 변했다. 그 놈이…… 공주가…….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공주를 사랑한 만큼 청년을 신뢰한 만큼 노기가 끓어 올랐다. 그는 즉시 하인들로 하여금 두 사람을 응접실로 끌고 오게 했다.
잠시 후, 청년과 공주가 무릎을 꿇은 채 왕 내외 앞에 앉았다. 왕은 아까부터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독일제 루거 권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옆에는 왕비가 싸늘한 표정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공주 뱃속에 든 그게…… 정말 네 놈의 씨란 말이냐? 왕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활화산 같았다. 그는 자신의 딸이, 감히 자신의 허락도 없이 천한 가정교사와 놀아나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공주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독기가 서려 있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여자의 눈빛이었다.
네, 맞아요. 저는 선생님을 사랑해요. 아버지가 저를 짐승 취급하며 늙은이에게 팔아넘기려 할 때, 저를 유일하게 사람으로 대접해 준 분이라고요!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왕이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청년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공주를 감쌌다. 쨍그랑, 크리스털 재떨이가 청년의 등에서 부서지며 파편이 튀었다. 이것들이 감히 내 집안을 능멸해? 내 오늘 저놈의 피를 봐야겠다. 저놈을 죽이고, 너도 호적에서 파버린 뒤 정신병동에 처넣을 테다. 왕이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차가운 총구가 청년의 미간을 겨누었다. 안 돼요, 아버지! 차라리 저를 쏘세요! 공주가 청년의 앞을 막아서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왕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 비켜라. 둘 다 죽여버리기 전에. 왕의 검지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멈추세요! 그때, 2층 난간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목에 붕대를 감은 왕자였다. 유령 같은 얼굴로 왕자는 양궁 활을 들고 있었다. 왕자의 손때가 묻은 활이었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화살촉은 아버지 왕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윤아, 너 지금…… 너도 네 누이처럼 미친 게냐? 왕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바마마가 선생님을 쏘시면, 저도 쏠 겁니다. 총을 내리세요. 제발……. 왕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차마 자신이 사랑했던 청년이 죽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왕자가 청년에 대해 가진 마지막 연민이었다. 그리고 종국에 그 감정은 비틀린 사랑에 이르렀다. 왕자의 복잡한 감정이 차고 넘쳐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딸의 정인을 겨누고, 아들은 아버지의 심장을 겨누었다. 왕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자신의 입을 막았다. 왕은 청년을 향해 다시 조준했다. 청년은 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안 돼! 왕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순간, 왕자가 눈을 질끈 감고 활시위를 놓았다. 핑- 하는 파열음과 함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왕의 총구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화살이 박힌 곳은 왕의 심장이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무릎 꿇고 있던 청년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청년의 무게에 왕과 청년, 두 사람은 동시에 무너져 쓰러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청년의 등 한복판에 박혔다. 붉은 피가 하얀 셔츠를 순식간에 물들였다.
선생님! 공주의 비명이 성을 찢었다. 왕자는 활을 떨구고 주저앉았다. 자신이 쏜 화살에,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면서도 자기 목숨과 맞바꾸더라도 살리고 싶었던 그 사람이 맞았다. 왕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왜? 도대체 왜 저놈이 나를 대신해 화살을 맞았지?
청년은 바닥에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공주가 기어와 그를 안고 오열했다. 청년은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왕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말해야 했다. 이 지독하고 잔인한 연극을 끝낼 시간이었다. 당신을…… 살리려던 게…… 아닙니다……. 청년이 피 섞인 거품을 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천륜을…… 차마…… 내 손으로 끊을 수 없었을 뿐……. 그게 무슨 소리냐? 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 어머니를…… 기억하십니까……? 청년의 입에서 왕의 기억 속에 유폐되었던 한 여자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왕의 동공이 순간 커졌다. 그러고선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24년 전, 자신의 집 식모를 도와 부엌일을 하던 미모의 하녀.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고,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어디서 씨를 받아와서 내게 뒤집어씌우냐며 매몰차게 내쫓았던 그 여자. 제가…… 당신이 버린…… 그 여자의 아들입니다…….
무덤 같은 정적이 성을 휘감았다. 시계 초침 소리만이 째깍거렸다.
뭐라……? 복수를 하러…… 왔습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정보를 빼내 독립군에게 넘기려고…… 나는 스파이로 이 지옥 같은 집에 들어왔어…….
청년이 피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당신의 딸을 사랑하고…… 당신의 아들에게 사랑받고…… 결국 당신을 위해 죽는군요…… 이것이…… 내 더러운 운명인가 봅니다…….
청년의 시선이 공주에게로 향했다.
미안합니다…… 누이여…… 나의 사랑…… 당신에게…… 나는…… 늘…… 미안한 사람밖에…… 못되는군요.
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치심과 분노, 충격이 뒤섞여 그의 얼굴에 기괴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아들이, 그것도 천한 종년의 몸에서 난 사생아가, 자신의 턱밑까지 쳐들어와 있었다. 게다가 그놈이 내 딸을 임신시키고 내 아들을 죽을 뻔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대신 그는 더 잔인해졌다. 이…… 이놈이…… 끝까지 나를 기만해? 거짓말이다! 너 같은 놈은 내 자식이 아니야! 애초 왕에게는 청년에게 나누어줄 부성애 따위는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흠집 없는 권위뿐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청년을 향해 다가갔다. 벽에 걸려 있던 일본도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칼집을 벗어난 일본도의 칼끝에 차가운 살기가 서려 있었다.
안 돼요! 아버지! 오빠예요! 제 아이의 아빠라고요!
공주가 청년의 몸 위로 엎드리며 절규했다. 하인들이 달려와 공주를 억지로 끌어냈다. 공주는 바닥을 긁으며 울부짖었다.
이 더러운 피를 내 손으로 씻어내겠다. 우리 왕가에 이런 오점은 없다.
왕의 눈에 광기가 번득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으아아아! 왕자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서걱. 순간 공주의 비명이 끊어졌다. 그녀는 기절하여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 위로, 청년의 목이 굴러떨어졌다. 눈을 채 감지 못한 그의 머리가 마루를 굴러 왕의 발치에서 멈췄다. 왕자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 몸이 굳어버렸다. 그의 눈동자에서 이성의 빛이 완전히 꺼져가고 있었다. 그는 히죽, 하고 기괴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헤헤헤…… 선생님…… 헤헤헤…….
그날 밤, 성은 공포와 광기에 휩싸였다. 하인들은 공포에 질려 하나둘 도망쳤고, 남은 이들은 피 냄새를 지우느라 밤새 마루를 닦아냈다. 비릿한 피 냄새는 며칠이 지나도 가시지 않았다.
왕비는 미쳐 돌아가는 집안 꼴을 보며 짐을 쌌다. 그녀는 이 저주받은 집에 한시도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이 집은 끝났어.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야 해.’
그녀는 금괴와 패물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 새벽녘, 모두가 잠든 사이 뒷마당으로 향했다. 하인들이 대충 묻어둔 청년의 가매장 터였다. 왕비는 맨손으로 흙을 파헤쳤다. 손톱이 깨지고 피가 났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내 거야…… 넌 내 거야……. 그녀는 청년의 잘린 머리를 꺼냈다. 흙 투성이가 된 그 잘생긴 얼굴을 자신의 치마폭으로 닦아내며 그녀는 섬뜩하게 웃었다. 이제 아무도 널 못 가져. 그 년도, 저 영감탱이도…… 넌 영원히 나와 함께 가는 거야. 왕비는 청년의 머리를 비단 보자기에 싸서 품에 안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왕은 왕자의 발광(發狂)과 왕비가 가출한 충격으로 쓰러졌다. 반신불수가 된 그는 침대에 누워 하루하루 말라갔다. 왕이라 불렸던 사내의 비참한 말로였다.
왕자는 그날 이후로 완전히 백치가 되었다. 그는 하루 종일 정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선 허공에 대고 활을 쏘는 시늉을 했다. 선생님…… 피하세요…… 슝…… 내가 지켜줄게요……. 왕자의 혼잣말이 텅 빈 성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한편 공주는 방에 갇힌 채 배를 감싸 쥐고 울었다. 그녀의 뱃속에는 오빠이자 연인이었던 남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 아이는 저주인가, 축복인가. 그녀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지만,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 때문에 죽을 수 없었다. 밤마다 청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살아요…… 살아서 우리 아이를 지켜요…….'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다. 거리마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또 만세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산꼭대기의 성에는 만세 소리 대신 횃불과 죽창을 든 성난 군중들이 당도했다. 친일파 조승재를 죽여라!, 매국노의 피를 말리자! 수십 년간 억눌려왔던 소작농들과 민중의 분노가 성의 철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들은 화려한 샹들리에를 깨부수고, 비단 커튼을 찢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왕은 분노로 눈을 부라렸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 나는 조선의 왕이다…… 네놈들이 감히……. 왕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왕! 성난 하인들과 군중들은 그를 침대에서 끌어내려선 앞마당으로 패대기쳤다. 왕은 개처럼 끌려나와 처참하게 몽둥이찜질을 당했다. 그의 비명소리는 해방의 함성에 묻혀 사라졌다. 그의 시체는 거적때기에 말려 개천가에 버려졌다.
군중들이 물러간 뒤, 불타버린 저택은 흉가로 변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귀신 들린 성’이라 부르며 얼씬도 하지 않았다. 밤마다 머리 없는 유령이 피아노를 치며 슬픈 노래를 부른다는 흉흉한 소문도 들려왔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저택에는 여전히 끈질긴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공주는 낡은 요람을 흔들고 있었다. 요람 안에는 맑고 깊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아이는 청년을 똑 닮아 있었다. 공주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멸시 속에서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낮에는 성 뒤편의 밭을 일구고 밤에는 아이를 지키며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자장…… 자장…… 우리 아기…….
공주가 부르는 자장가는 과거 청년이 발작을 일으키던 왕자를 달래며 불러주었던 그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슬펐지만 단단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결에 언뜻, 청년의 부드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어느덧 공주의 목소리에 구슬픈 청년의 노랫 소리가 포개졌다. 왕가의 전통처럼 노래는 길게 이어졌다.
_끝_2023년 여름~2025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