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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아영 Jun 30. 2019

도망치듯 떠나온 후쿠오카 2박3일 (2)

조건 없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법

루이보스 티를 마시며 치에코상과 담소를 나눴다.

치에코 상의 남편은 18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목수는 아니었지만 집 곳곳을 채운 가구를 직접 만들 정도였다고.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치에코 상은 매우 우울한 날들을 보내다 캐나다에 다녀온 후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았다고 했다. 61세부터 영어를 배워 지금 게스트들과 영어로 소통하고 요리며 그림이며 손으로 할 수 있는 취미 활동들로 인생을 꽉꽉 채워 살고 있었다. 죽기 전까지 건강하게 걷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며 치에코 상은 웃었다. 얼마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며 치에코 상의 건강을 기원했다.

문득 나도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지금 어떤 기분이고 왜 어쩌다 후쿠오카까지 급히 떠나왔는지. 어쩌면 당신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아 찻잔을 만지작하다 결국 목 끝의 말을 삼켜버렸다. 언어의 장벽이 있어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도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들었다.

내일 아침 조식을 준비해 주겠다고 일어날 시각을 알려달라고 한다. 치에코 상의 조식은 이미 에어비앤비 리뷰를 통해 그 훌륭함을 미리부터 알고 있어 기대가 됐다. 부지런히 움직일 하루니 아침 여덟 시에 만나자고 약속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일곱 시쯤 잠에서 깨어 명상을 했다. 요즘 요가하고 명상하는 게 좋아서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는 중이다. 일본에서의 요가와 명상도 나쁘지 않다. 장소가 어디든 충실히 습관을 들이는 삶도 멋지겠구나 싶었다. 습관은 취향이 되고 취향은 곧 그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니.


곧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와 부엌으로 향했다. 손으로 하는 건 다 좋아한다더니 치에코 상의 아침상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정갈하면서도 아름다운 플레이트와 적당한 간, 직접 길러낸 토마토와 오이의 신선함까지.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가 멍해졌다. 나도 모르게 공손한 말투로 “이타다끼마스”를 외치며 맛있게 식사했다. 역시 정갈한 식사는 마음과 몸을 든든하게 한다.

웬만한 레스토랑 못지않은 아침식사였다. 플레이팅도 예술이다.


씻고 짐 챙겨 집을 나서는데 또 대문까지 나오는 치에코 상. 손을 크게 흔들어 인사하고 걸어가다 문득 돌아보니 내가 골목길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는데.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먼저 뒷모습을 보일지언정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인자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몸 둘 바를 몰랐다.



흐린 날의 오호리 공원. 고요하고 평화롭다.


오늘의 첫 코스는 오호리 공원. 호수를 끼고 있는 후쿠오카의 대표적인 공원이다. 후덥지근한 날씨였는데도 조깅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 놀랐다. 삼삼오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평화로움을 느꼈다. 낯선 도시에서 사람을 찬찬히 구경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드물다. 국적을 유추해보고 표정을 읽어내며 그 사람의 삶을 상상해 보는 것. 한국인이 워낙 많아 내가 상상을 채 하기도 전에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오는 건 함정이었지만.

오호리 공원 내 일본 정원과 후쿠오카 미술관까지 알뜰하게 둘러보고 미술관 내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여유로운 이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는데 아사히 맥주공장 투어 예약해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불현듯 일정을 바꾸고 싶었는데 예약해둔 것이 마음에 걸려 아사히 맥주공장으로 향했다.




후쿠오카는 어제부터 계속 흐리다.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질락 말락 빗방울이 야금야금 지면을 두들기는 날씨다. 습한 날씨에 땀범벅이 되어 아사히 맥주공장에 도착했고 가자마자 수많은 한국인 사이에서 군중 속의 고독을 느꼈다. 흑 그냥 다자이후 갈걸. 그래도 열정적으로 가이드해주신 직원 덕분에 나름 알차게 투어도 마치고 시원한 슈퍼드라이 생맥주도 맛봤다.


혼자라 외로웠지만 야무지게 잘 마셨다.


맥주공장 투어가 끝나고 다시 하카타 도심으로 돌아왔다. 힙한 카페를 찾아갈까 하다 제일 맘 편한 스타벅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로열 밀크티 프라푸치노 시켜놓고는 김애란의 신작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었다. 한국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짓거리를 굳이 일본 후쿠오카에 와서 하고 있다. 충실하게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행위는 꽤 즐겁다. 김애란 작가님의 문장도 역시나 마음을 후벼 팠고. 아 충분히 충만하다.

책을 읽고는 예의상 쇼핑을 해야 할 것만 같아 커널시티 하카타, 돈키호테 나카스점 등을 돌았고 모든 에너지를 써버렸다. 역시 쇼핑은 내 체질에 맞지 않는다. 똑같은 걸음을 걸어도 공원이 훨씬 경쾌하고 즐겁다. 자본주의 외모지상주의 사회에 맞지 않는 인간이라 슬프다.

서둘러 쇼핑을 끝내고 이제는 두 번째 간다고 그새 익숙해진 치에코 상의 집으로 간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는 나를 마중 나왔다. 구글맵 경로를 찍어보니 어제와는 다른 버스를 타게 됐는데 그게 또 걱정이 됐는지 치에코 상은 차까지 끌고 나를 픽업하러 왔다. 말도 안 되는 그 마음씨에 오늘 밤은 진심으로 감사한 밤이다. 불쑥 찾아오는 누군가의 조건 없는 호의를 가슴 열고 받아들이는 법을 아주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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