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브걸스, 무야호, 왕가위 영화, 홀맨, 정훈남 스튜디오의 사례 보기
‘역주행’, ‘끌올’, ‘유행은 돌고 돈다’ 이런 말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는 말이 당연한 진리처럼 들리지만, 모든 유행이 돌고 돌며 과거의 것이 모두 새 영광을 누리는 건 아닙니다. 역주행을 달리거나 끌올이 되려면 현재의 시대적 맥락과 잘 맞아야 하죠. 요즘은 ‘최신’, ‘NEW’에 무조건적으로 열광하는 시대가 아니라 가치와 다름에 열광하는 시대인데요. 최근 역주행을 달리는 콘텐츠들엔 이 시대의 어떤 가치가 담겼고, 어떻게 시대에 맞는 차별화를 공략했는지 살펴봅시다!
3/17(수) 21:30 클하에서(@bemyb.kr) 더 재밌는 얘기 나눠요!
이 글을 읽으시는 군필자 분들, 여러분도 혹시 1일 1롤린 하시나요? 저는 최근에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을 들었는데, 후렴구가 아주 중독성 있더라고요! 대표 안무인 가오리 춤은 몸치인 사람도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라 국민가요로 불러도 되겠어요. 하지만 이 음원이 나온 2017년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브레이브걸스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해체를 논의하기도 했다는데요. 4년 전에 나온 이 노래가 갑자기 음악 차트 1위를 휩쓸고 있습니다.
역주행이 일어난 가장 결정적 배경엔 브레이브걸스의 롤린 무대 영상에 달린 군필자들의 ‘댓글 모음’ 영상이 있다고 해요. 많은 군필자가 자신들의 군 시절 추억 썰을 풀며 이 곡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를 얘기했는데요. 인기 유튜버인 ‘마초맨’은 롤린을 두고 ‘아침에 듣고 보고, 밥 먹고 듣고 보고, 일과 끝나고 듣고 보고, 자기 전에 듣고 보고, 선임이 시켜서 춤도 춰보고’라고 말했을 정도예요. 물론 군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다른 걸그룹이나 곡들도 있지만,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이 역주행 한 이유는, 브레이브걸스 멤버들의 끈질긴 노력에 있는 것 같은데요.
근본적으로 좋은 음악이기 때문에 역주행이 가능했던 것도 있지만, 브레이브걸스가 지난 4년간의 노력이 미담처럼 인터넷에 퍼져 있어요. 언제 뜰지 모르는 막막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걸그룹보다 많은 위문 공연을 다니며 최선을 다한 히스토리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는 것 같아요. 여러 이유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젊은 세대에게 희망이 되는 것 같고요! 무엇에서든지 시간의 축적은 진정성 있는 차별화가 되어 주는 것 같아요.
얼마 전 팀장님이 ‘무야호’ 뜻을 아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야호~ 같은 거 아니에요?” 했다가 무시당했어요. (저희 팀장님이 알면 웬만한 사람들은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알고 보니 예전에 무한도전 ‘김상덕 씨 찾기’ 편에 나온 시민분이 무한도전을 잘 몰라서 잘못 말한 건데, 최근 다시 밈으로 유행하는 대사더라고요. (근데 뭐, 얼추 맞는 뜻 아닌가요!! 그만큼 신나신 거지!)
옛 예능에서 아주 잠깐의 순간이 왜 다시 밈으로 부활했을까요? 원래 밈이 그렇듯이 큰 의미는 없어요. 다만 맥락 없이 만들어진 이 장면이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 건 분명합니다. 또 무한도전을 아느냐고 물어본 출연진이 민망할까 아는 척 애써 주신 할아버지의 따뜻함이 웃픈 상황을 연출했고요.
사실 무야호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밈으로 재생산된 건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 덕도 있어요. 무한도전은 2018년에 종영한 프로그램이지만, 많은 유행어(‘형이 왜 거기서 나와’,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등)와 장면이 여전히 짤방과 밈으로 사용되잖아요. 새삼 콘텐츠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가 느낍니다. 플랫폼이 다양해질수록 어떤 플랫폼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가 하는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는데, 오히려 플랫폼이 다양해질수록 얼마나 좋은 콘텐츠이느냐에 따라 저력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무한도전이 여전히 회자되는 건, 레거시 미디어 콘텐츠여서가 아니라 뚜렷한 캐릭터들과 탄탄하고 빠른 호흡으로 이뤄진 무한도전만의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니까요.
왓챠도 콘텐츠의 힘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 달부터는 구독을 끊을까 고민할 즈음 구독을 연장할 수밖에 없는 영화를 상영해 주거든요. 90년대 홍콩 감성의 대명사인 왕가위 감독의 주요 영화를 독점 상영한다는 소식도 그랬어요!
90년대를 풍미한 감성은 암울함과 그늘 뒤에 자리한 사랑인데요. 왕가위의 홍콩 영화가 그 세기말 감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따뜻하고 순백의 느낌을 주는 일본이나 대만 로맨스와는 또 다른 느낌이죠. 1990년대는 정말 혼돈의 시기였어요. 단순히 1세기의 끝이 아닌, 1000년대가 끝나고 2000년대라는 전혀 새로운 시대가 올 거라는 전망이 대세였거든요. 오죽하면 이 시대를 *‘Y2K’가 이슈였을까요.
*Y2K: 연도의 두 자리만 인식하는 컴퓨터가 99년에서 00년이 되는 순간, 2000년과 1900년을 혼동해 버그를 일으켜 사이버 대재앙을 일으킨다는 뜻
이때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기대와 상상이 마음껏 펼쳐진 동시에 공포와 불안이 공존했어요. 이 시대의 음악, 영화, 패션 등 대중문화에 SF적 요소와 디스토피아적인 컨셉이 유행한 이유예요. 변혁을 앞둔 시대였던 만큼 도전적인 시도도 많았어요. 왕가위가 대표하는 홍콩 영화의 미장센 기법이나 시나리오도 과감한 도전 사례로 꼽히죠. 20년 전 영화 리마스터링 소식이 핫한 건, (애틋한 추억에 대한 그리움도 있겠지만) 왕가위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세계관이 그립기 때문 아닐까요.
요즘 한국 영화 위기론이 자주 거론되는데요. “2000년대 초반의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제작 풍토는 사라져 갔다”며 “한국 영화계는 조금 더 모험적일 필요가 있다”라는 봉준호 감독의 말을 차용하면 위기를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볼 문제만은 아닌 듯해요. 또한 패션이나 음악, 라이프스타일 등 여러 브랜드에서도 9000의 디스토피아적 컨셉을 재해석하고, 대중이 이에 반응하는 걸 보면 과감한 시도나 컨셉이 영화계에 국한됐다고 볼 순 없어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새 시대의 등장을 앞둔 건 마찬가지예요. 새로움에 주춤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자신만의 세계관을 선언해보세요. 이전 시대의 변혁이 좋은 레퍼런스가 되어 줄 거예요!
Tip. 세기말 감성을 단번에 느끼고 싶다면, 015B의 ‘모노리스’ 뮤비와 일본 록 그룹 ‘엑스재팬’을 추천할게요. 모노리스 뮤비는 당시 돈으로 수 억 원을 들여 만들었지만 ‘중국이 무슨 힘이 있다고 핵 전쟁을 일으키냐’, ‘과한 억측’이라며 주목받지 못했는데요. 지금에 와선 소름 돋는 예지력이었다며 다시 주목받고 있어요. 엑스재팬의 파격적인 외형과 행보는 아티스트를 넘어 당시의 문화를 대표했고요.
여전히 문자 감성이 그리운 분들 있으신가요? 지금이야 어떤 이야기건 글자 수 상관없이 편하게 쓰지만, 문자를 주로 쓰던 때만 해도 80자를 넘기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말을 줄이거나 문자를 여러 개에 나눠 보냈어요. 80자가 넘으면 추가 요금이 붙었거든요. 줄임말이 유행할 수밖에 없던 배경이죠. 그래서 80 바이트, 줄임말, 문자 메시지 이 세 가지 요소만 있으면 자연스레 00년대 문자 감성이 패키지처럼 떠오르는데요. 최근에 이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구 LG텔레콤의 (지금은 LG U+죠.) 홀맨이 SNS에 등장했어요! 인스타그램 계정 @holeman_is_back으로요!
SNS에 재등장한 홀맨은 9000의 대표 가수 김현정과 콜라보레이션 음원을 내는가 하면, 피처폰의 문자 감성을 사라지게 만든 주역 카카오톡을 저격하기도 합니다. 더 재밌는 건, 그 경쟁 상대인 카카오톡에 자신의 이모티콘을 낸 거예요. 홀맨 입장에서 카카오톡이 얄밉긴 해도, 카카오톡을 적으로 돌리기보다 영리하게 이용하기로 한 거 같아요. 그 모습이 귀여운 스파이의 잠입처럼 보이네요!
홀맨이 돌연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한 배경, 홀맨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 말투나 행동 등 홀맨이라는 캐릭터를 둘러싼 스토리와 그것의 세계관은 스마트폰의 발전에 따른 역사적 맥락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홀맨의 마음에 더욱 공감하고, 컴백을 환영해요. 단순히 이전 시대의 정서를 가져온 콘텐츠라고 무조건 뜨는 게 아니에요. 지금 시대를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개연성 있게 이을 때 과거는 불편하지 않은 신선함으로 다가옵니다.
과거의 것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현대식으로 재해석해 인기를 끄는 콘텐츠가 또 있습니다. 바로 유튜브 채널 ‘정훈남 스튜디오’의 8비트 콘텐츠들인데요. 요즘은 픽셀 하면 마인크래프트가 떠오르지만, 90년대와 00년대 초반만 해도 픽셀 하면 다마고치 미니 게임이나 오락실과 집에서 했던 콘솔 게임, 플래시 게임 등 다양한 게임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게임이 진행될 때 나오는 8비트 기계음이 떠올랐죠.
정훈남 스튜디오는 이 요소들을 모두 살려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데요. 요즘 대중가요를 8비트 음으로 바꾸고, 가수들의 안무나 동작을 픽셀 아바타에 입히고, 콘텐츠 진행 방식을 게임의 장면처럼 꾸미더라고요. 추억의 요소를 현대적으로 잘 해석하는 덕에 농심, 넥슨, 정관장 등 여러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 영상을 만들기도 했죠. 부자연스러운 아바타의 기계적인 동작과 단순함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고도화된 기술에 익숙한 세대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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