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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Dec 27. 2022

세 식구의 소소한 크리스마스

올해는 있는 곳에서, 이곳에 있는 것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다. 여행을 가거나, 누구를 초대하거나, 누구에게 초대받지 않고 소소한 시간을 보내는 걸 의미했다. 여름에 이미 가족 여행을 다녀온 데다가 주변 관광지 호텔들이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여 숙박비가 껑충 뛰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조용하면서도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연말 명절을 맞는 연습이 우리 가족에게 필요하기도 했다. 추수감사절 연휴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작은 사치를 부려서 선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가족 누군가에게 필요했지만 사는  미루었던 물건, 오래되어서 바꾸려고 별렀던 물건, 필요해서 샀지만 조금 늦게 사용하기 시작해도 괜찮은 물건을 사서 크리스마스 포장지로 포장해서 트리 아래에 놔두었다. 크리스마스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열심히 찾았다. 유튜브에서 발견한 플레이리스트 중에 런던심포니가 연주한 캐럴 모음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금요일에는 코스트코에 가서 시장을 잔뜩 보았다. 일주일 내내 간편히 먹고살 수 있는 식재료와 냉동식품을 쇼핑카트에 주워 담았다. 매우 오랜만에, 아마 신혼 후 처음으로, 상하의가 한 벌로 구성된 잠옷도 샀다. 코스트코의 저렴한 물건 가격 덕분에 세 식구 잠옷을 50달러 미만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계산대를 지나면서 깜짝 놀라긴 했다. 푸짐하게 구입한 줄은 알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이 나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속이 살짝 쓰리려고 했다. 그래도 요즘 웬만한 식당에서 외식 한 끼 하는 금액 정도 더 나온 거라고, 그 대신 우리는 좋은 재료의 음식을 푸짐하게 먹을 거라고 위안을 삼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토요일에는 오전에 딸이 일을 하는 날이어서 도시락을 싸서 보냈다. 그동안 남편과 나는 강아지들과 주변을 산책하며 보냈다. 늦은 오후부터 간단하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레이비를 곁들인 립아이 스테이크와 구운 버섯과 아스파라거스, 매시드 포테이토, 그리고 크리스마스 리스 모양으로 담은 샐러드가 메뉴였다. 이름은 근사해도 모두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게 준비할 수 있는 음식들이다. 스테이크는 오븐에도 구워보고 그릴, 에어프라이어 등에도 해보았는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닥이 요철로 된 무쇠프라이팬에 굽는 게 가장 간단하고 맛도 좋은 것 같다. 메시드 포테이토는 딸이 준비했다. 감자를 넉넉하게 삶아서 다음 날 먹을 것까지 준비했다. 그레이비는 비프 브로쓰만 있으면 역시 5분 만에 간단하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스테이크, 구운 야채에 곁들이면 평범한 음식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하고 푸짐한 명절 음식으로 격상시켜 준다. 크리스마스 샐러드만 따로 담고 다른 메뉴는 모두 널찍한 디너 접시에 담아서 식탁에 올렸다. 치우는 건 남편이 담당했다. 저녁 식사 후 세 식구가 잠옷을 입고, 트리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휴대폰 리모컨 사용이 처음이고 강아지들이 버둥대는 통에 근사하게 나온 사진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그리고 세 식구가 잠옷을 입고 담요를 두르고 2017년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서재>(The Man Who Invented Christmas)를 보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부끄러움 없는 냉정한 자본주의의 기세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 작품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훈훈해졌다.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선물을 풀었다. 강아지들을 위해서도 장난감과 뼈다귀를 선물로 준비했다. 아주 오래 물어뜯을 수 있는 뼈다귀라고 되어 있었는데 강아지들은 뼈다귀를 각자 하나씩 순식간에 해치웠고, 막내 강아지 우디는 부스럭 소리가 나는 장난감에 단번에 꽂혀서 종일 가지고 놀았다. 남편과 딸, 나도 선물을 뜯으며 쑥스럽게 웃고 좋아했다. 그리고 딸과 함께 교회에 성탄예배를 드리러 갔다. 딸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건 매우 오랜만이다. 예배 후 자신은 역시 종교의 포인트를 모르겠다고 하긴 했지만. 샌디에이고에서 여행 중인 반가운 얼굴과 잠시 인사를 나눌 수 있어 기뻤다. 점심은 훈제연어 한 봉지를 뜯어서 밥과 김을 싸 먹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오후에는 딸이 선물한 붓으로 며칠 전부터 그리고 있던 유화 한 점을 완성했다. 저녁은 햄 스테이크와 구운 야채에 어제 만든 매시드 포테이토를 곁들여 먹고 설거지는 딸이 해결했다. 


이제 명절을 조금씩 덜 두려워하면서, 소소한 기쁨을 누리면서 보내는 법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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