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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Jul 17. 2016

어느 비 오는 날의 규슈 어딘가에서

2016년 여행

 비가 내리는 날은 언제나 두 가지 욕망이 꿈틀댄다. 하나는 빗물이 부딪치는 창가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땅바닥에 고이는 빗물을 피해가며 무작정 걷는 것이다. 그중 첫 번째는 사실 집에 있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삶이라는 것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잘 없듯 의외로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대부분의 사람이 즐겨하지 않는 까닭에 혼자가 아니고서는 자주 해 볼 수 없는 일이다. 막상 혼자라 해도 빗물에 홀딱 젖은 채로 집에 들어간다면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화들짝 놀랄 일이라 이것 역시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듯 쉽게 해 볼 수 없는 일들이 쉽게 실현될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여행이다. 사실 많은 여행이 나름의 이유와 일정들을 가지고 진행되기에 첫 번째 일은 쉽지 않다. 대신 비 오는 날 무작정 걷는 일은 여행지 그것도 해외의 여행지라면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무작정 택시를 타기에도 가고자 하는 곳을 포기하기에도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이다. 


 다자이후 텐만구를 가는 그 날 역시 그런 날이었다. 3박 4일의 일정 중 3일째 우리 부부가 정한 여행지는 다자이후 텐만구와 규슈 기린 맥주 공장이었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경제학 박사과정 수료생 즉 학위 논문을 쓸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 아내이지만, 일본 여행을 떠나면 학문의 신을 모신다는 텐만구에 들르곤 했다. 그렇게 4년 전 방문한 교토의 기타노텐만구에서 장대비가 쏟아졌을 때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다자이후 텐만구에서 다시 장대비를 만나니 역시 공부하는 사람에게 학문의 신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교토의 기타노텐만구
다자이후 텐만구


 후쿠오카 하카타 버스터미널에서부터 40분가량 달려 도착한 다자이후는 일요일이라는 시간과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장대비와 어우러져 사람 반 물 반의 상태였다. 차분하게 텐만구를 살펴볼 수 있는 가능성은 4년 전 교토에서처럼 없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우산과 만나는 소리는 리듬감이 넘쳤지만, 질척이기 시작하는 발바닥의 질감과 시야에 가득한 우산들은 마음의 여유를 조금씩 빼앗아갔다.


 단체 관광객의 틈새로 꽤 많은 일본인들이 학업을 도와준다는 부적을 사고 진지하게 텐만구의 의식에 임하고 있었다. 자신의 학업이 완성되기를 바라기에는 너무나 많은 학부모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진한 공감과 씁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빗물과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학업성취 부적을 구입한 아내를 데리고 텐만구를 벗어났다. 다음 장소로 향하기 전에 찝찝한 느낌과 혼잡한 정신을 다독일 공간이 필요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인터넷을 검색하다 알게 된 다자이후의 스타벅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파와 빗물에 시달린 덕택이었을까? 아니면 그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도망가듯 입장한 스타벅스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좁은 입구 대신 길게 뻗어있는 가게 안에서 수천 마리의 물고기 떼를 마주친 기분이었다. 눈과 카메라로 한참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특히 천장에 드문드문 만들어진 천창 사이로 쏟아지는 빛줄기와 조형물의 만남은 마치 맑은 날 강물에 반짝이는 몇 가닥의 햇살을 보는 느낌마저 안겨 주었다. 날씨 덕분에 카페에도 사람이 많고 그만큼이나 대화 소리도 높았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어느새 습한 기운은 사라졌고 마음은 가벼워졌다. 이곳을 떠나면 다시 꿉꿉함과 소란스러움은 시작되겠지만 떠나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음 목적지인 규슈 기린 맥주 공장을 가기 위해서는, 여행자라면 타지 않을 버스를 타고 걷지 않을 길을 걸어야 했다. 편하게 이동하려면 다자이후에서 다시 후쿠오카로 가서 규슈 기린 맥주 공장으로 가는 것이 낫겠지만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고 싶었다. 게다가 이번 여행 우리 부부가 가지고 있는 교통수단은 버스를 무한정 이용할 수 있는 산큐패스. 기차를 타야 쉽게 갈 수 있는 곳을 버스로 가려니 믿을 것은 구글 지도뿐이었다. 


 한국에서야 구글 지도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지만 외국에서는 놀랄만한 실력을 보여준다. 한국에서의 다음이나 네이버 지도처럼 구글 지도는 허허벌판에서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교통수단과 소요시간을 알려주었다.


허허벌판의 정류장에서


 시간당 한 대 정도가 오는 버스를 타고 내렸다. 약간을 걷다 허기진 배를 편의점 김밥과 라면으로 살살 달래고는 기차역에 도착했다. 버스만으로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가려고 하는 규슈 기린 맥주 공장은 다치아라이(大刀洗) 역에서 가까운 터라 기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두 개 역 정도만 지나치면 되는 거리여서 기차를 타는 것에 대한 비용 부담은 거의 없었다.


 원래 맥주 공장의 견학을 가기 위해서는 예약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예약을 하지 못 했다. 여행 일정은 진작 확정했지만 언제 어느 곳을 갈지를 결정하지 못해 고민하다 예약 인원이 다 채워져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여러 맥주 공장의 견학을 경험했기에 가서 맥주를 마시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맥주를 생산한 곳에서 마시는 것은 분명 다른 경험이다. 대부분의 음식이 만들고 난 직후에 먹을 때 맛있는 것처럼, 일본과 유럽의 여러 양조장을 방문했을 때 마셔본 갓 생산한 술의 풍미에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예약을 안 했다는 우리의 이야기에 공장 직원들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태세를 전환해 후쿠오카 한정이라는 캔맥주를 권했다. 맥주 공장을 오게 되면 습관적으로 맥주잔을 구입하는 데 이번에는 ‘한정판’이라는 말에 혹해 후쿠오카 한정 맥주까지 함께 구입했다. 



 규슈 기린 맥주 공장 맞은편에는 유럽풍의 맥주 하우스가 있다. 부슬거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아내와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맛있었지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예전 처음 기린 맥주를 먹었을 때는 특유의 비릿함이 묘한 매력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느낌이 없어졌었고 나 역시 마시지 않았었다. 특유의 느낌은 예전 처음 먹었을 때와 같았지만 역시 이곳에서 마셔야 한다는 느낌까지는 아니었다.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들뜨지도 않았다.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나인데, 어느새 흘러버린 시간들에 덤덤함만 늘어난 것인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도 들었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고 숙소인 후쿠오카로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과는 다르게 가기로 했다. 30분 정도 걸으면 한 번에 후쿠오카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는 다시 거세졌고 길은 그저 두 가지 풍경이었다. 공장의 무리를 지나치니 벼가 자라는 논들이 펼쳐졌다. 논두렁길을 걸으며 ‘후쿠오카공장 한정제조’ 라는 캔맥주를 마셨다. 이미 마신 맥주에 어느 정도 술기운이 있었지만 기가 막힌 맛이었다. 캔맥주가 이렇게 신선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술이 오히려 깨는 기분이었다. 



 푸릇한 논 사이 드문드문 보이는 농가를 안주삼아 빗길을 걸었다. 나이가 들수록 비는 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이상하게 나는 그러고 싶지가 않아진다. 인생의 정답이 없다는 것은 다들 진리처럼 알면서도 혹시나 정답을 벗어날까 봐 묘한 두려움에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는 무엇이 정답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인생의 정답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고 해도 자신의 삶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과 두려움들은 스스로가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좋았지만 거세지는 비바람에 아내의 표정은 어두워져 갔다.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알 수 없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상황은 점점 몸과 마음을 힘들게 했다. 그래도 계속된 걸음 덕분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속도로 한가운데 임시로 만들어 놓은 듯한 정류장에서 혹시나 버스가 우리를 지나칠까 하는 걱정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버스는 정류장의 시간표와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고 우리는 한달음에 버스에 올랐다. 화장실까지 갖춘 고속버스 덕분에 아내와 나는 이내 편안해졌다. 


 빗물은 여전히 차창에 스치듯 어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날, 그렇게 나는 그곳의 그날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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