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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유 Jun 01. 2017

서로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사랑

<해변의 카프카>에서 말하는 사랑


근 2년 전만 해도, 내게는 '자아’라는 것이 없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정말 그랬다. 게다가 이런 현상은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그리고 그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까지도 겪은 슬픈 상황이었다.


불안이라는 불쾌하고 꺼려지는 감정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자아를 삭제하고 꼭두각시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 나의 눈으로 본 세상은 온통 불안 투성이었다. 내가 뭔가 다른 선택을 했다가는 큰일이 나는 것으로 모자라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폭삭, 망해버릴 것 같았다.


무서웠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가는 것이, 내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림을 좋아하던 나는 미술은 돈벌이가 안 된다는 말에 덥석 ‘무난한’ 영어를 전공했고, 하기도 싫고 잘하지도 못하는 무역을 하겠답시고 4-5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었다.


당시 “넌 무역이 왜 하고 싶어?”라고 묻는 친구의 말에 “보기에 멋있잖아!”라며 당황하지 않은 척 대답을 하고선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그 이유뿐이었기 때문이다.


진로뿐만 아니라 사사로운 취향에서도 꾸준히 자아를 삭제해나갔다. 패션에 일가견이 있으신 어머니는 내가 옷을 살 때마다 안목 좀 기르라며 농담조로 타박을 주시곤 했는데, 몇 번 듣고 난 후 나의 옷을 고르는 기준은 ‘엄마 눈에도 예쁠까’가 되었다. 엄마 말을 안 들으면 왠지 내가 촌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굳어진 취향은 지금까지도 남아서, 이제는 '이게 진짜 내 취향이 맞을까'하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내 머릿속은 상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와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사람인 지보다 상대가 어떻게 내게 더 매달리게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사랑을 받는 데에는 내 모습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모습은 애인이 바뀔 때마다 상대에 맞춰 정신없이 바뀌었다.


내가 인생에서 했던 대부분의 선택 기준은

'타인이 어떻게 보느냐’였다.  꼭두각시와 다름없었다.




이런 내게 <해변의 카프카>가 말해주는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주요 등장인물들이 다루는 사랑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았지만, 내 눈에 띄었던 것은 한량 청년 오시마와 하룻밤을 보낸 엑스트라 매춘부가 얘기하는 사랑이었다. 섹스머신이라는 별칭을 가진 그녀는 낮에는 철학을 공부하고 밤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관계를 하다 말고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는 오시마에게 말한다.


헤겔은 자기의식이라는 것을 이렇게 규정했지. 인간은 단순히 자기와 객체를 따로따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중간에서 자기와 객체를 연결해 객체에 자기를 비춤으로써, 행위적으로 자기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게 자기의식이지. 우리는 서로 자기와 객체를 교환하고 투사해서 자기의식을 확립하고 있는 거야. 행위적으로.


자기를 인식하고 그런 자기를 상대에 비춰보며 더 깊이 이해하는 것.


자아를 지워버리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내게 서로의 모습을 보고 각자의 모습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즉 자아를 찾아가는 것은 가장 이상적이자 지향할만한 사랑으로 여겨졌다.


내겐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연인과 그런 과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환상적인 일이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 첫사랑과 했던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다.  

나: 너 이런 생각해본 적 있어?
애인: 무슨 생각?
나: 내가 어떤 사람일까 하는.
애인: 응? 그런 건 중학교 때 다 끝내는 거 아냐?


그에게 몸만 자란 생각없는 사춘기 꼬마로 보였다는 사실에 귀가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대화는 이후 내 진짜 모습을 찾는 것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와 사귀는 동안 나를 깊이 이해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상적인 것들(어떤 옷을 살 것이며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 것이고, 수업을 땡땡이칠까 말까 하는)을 얘기하고 생각했다. 내 모습을 찾는 것보다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기를 ‘인식’하는 것조차 거부했기 때문에, 나를 그에게 비춰서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부끄러움 따윈 무시하고 그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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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이유 모를 이별 후에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의 한 구절을 읽고 내가 그와 헤어진 이유는 이것이었구나, 했다.


“먼저 해결해야 하는 다른 과제가 있어요. 나는 나 자신부터 교육해야 해요. 그런데 당신은 그 일을 도와줄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떠날 거예요."


자기를 인식하는 것을 포기하고, 서로를 통해 서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며 느낀 괴리감은 이별이라는 비극까지 초래하게 만든다.


<해변의 카프카>의 섹스머신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줌으로써 서로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사랑의 중요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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