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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강령 Aug 29. 2017

백 명이 있다면 백 개의 연애가 있다.

우리는 왜 하나의 연애만 이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걸까?


주입된 연애


영화 <디태치먼트>에서 문제아들이 모인 학교에서 임시 교사를 맡고 있는 주인공은 학생들에게 사고방식을 무뎌지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리의 사고가 공격받는 이유를 말한다.


우리는 "행복해지려면 예뻐져야 해"라는 말을 주입받고 있어.

하루 24시간 동안,
그 권력은 열심히 작용해서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어.

이게 '마케팅 학살
(Marketing Holocaust)'이야.
"This is a MARKETING HOLOCAUST!"


연애는 어떨까?

백 명이 있다면 백 개의 연애가 있다고들 말하는데, 실제로 행해지는 연애는 몰라도 우리가 '바라는' 연애는 그만큼 다양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선남선녀가 함께 요트를 타고 있는 여행 상품 광고, 서로를 첫눈에 알아보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 악역이든 비극적인 사건이든 각종 역경을 딛고 결국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


흔히 말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커플들의 이야기만 주야장천 뿌려대는 마케팅 홀로코스트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때때로 고민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이 있다. 당연한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당연한 것들이 우리에게만 당연하지 않을 때 비로소 문제가 된다. 이를테면 앞에서 말한 이상적인 형태의 커플링이 본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든지 할 때 말이다.


그럴 때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당연한데 안 되니까 내가 이상한 건가 괴로워하거나, 당연하지 않은 게 아니냐고 의심하거나. 나는 후자를 택한 사람으로서 기존의 생각에 질문을 던지며 이 글을 이어가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라는 이상적인 연애상(잘 어울리는 커플, 기념일을 잘 챙기는 커플, 서로 취미생활이 같은 커플 등등)은 어떻게 형성되어 온 것일까? 이상적인 연애상이 있다면 거기에 걸맞은 이상적인 대상들도 있을 텐데, 그들을 갈음하는 데에는 어떤 기준들이 있을까? '외모가 출중하고, 현명하며, 능력 있는 데다 돈이 많은'이라는 보편적으로 추구되는 특징들은 그 안에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이상형을 가져왔고, 왜 원하게 된 걸까?



이상적인 연애상이 형성되어온 과정


당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연애란 무엇인가?

오래 사귀는 것? 취향이 비슷한 것? 서로의 목표에 도움이 되는 것?


나는 연애라는 것을 해보기도 전부터 소설 같은 연애를 꿈꿨다. 무조건 서로를 위해 순간적인 감정은 조심하고 절제하는 연애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내 연애의 이상향을 이뤄내기 위해 연애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상대를 고르는 데에도 몇 달을 고심하는 등 거기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고, 연애를 하면서도 종종 애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를 의심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자제하고 억압했다. (상대는 너무 초연한 내 모습을 보며 내가 본인을 믿는다기보다는 관심이 없는 건 아닌가, 오해하곤 했다.)


알고 보니 연애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그것과 비슷했다.


빅토리아 시대에 낭만적 사랑은 그 자체로 칭송받을 만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기꺼이 바쳐야 하는 신성한 것, 또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계속 헌신함으로써 원초적인 본능을 승화시키고 영혼을 고상하게 하는 하나의 종교적 감정으로 인식되었다.
 에바 일루즈,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19세기에 사랑은 행복하기보다는 오히려 비극적인 감정이었다고 한다.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사랑은 극도로 불행한 삶으로 이어지는 위험한 감정으로 여겨졌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사랑은 도덕 내에 갇혀 있었다. "널 사랑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짓은 할 수 없어. 그런 사랑은 나쁜 거야." 하는 식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애인보다 관계 유지, '사랑'이라는 이상적 개념을 더 중요시했던 것 같다. '그'가 아닌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 좋은 연인이 되려면 해야 하는 것들, 오래 사귀는 방법 같은 것들을 틈날 때마다 찾아봤으니까.




1차 세계대전 이후, 사람들은 인간의 잔혹함을 보고서 기존의 사상에 회의를 품게 된다. 그로 인해 빅토리아 시대를 뒷받침하던 종교적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신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이성을 신뢰하며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굳이 어떤 이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연애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이때를 틈타 문화 자본주의 사업가들이 돈 냄새를 맡고는 새로운 문화를 조장한다.


바로, 사랑과 소비문화를 엮은 공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연애의 상품화


'연애'라는 개념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와 어떤 방식으로 맞닿아있는 걸까?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어쩌면 누군가의 음모에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맞나?...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연애상은 19세기의 그것에 가까웠지만, 나 역시 20세기의 '마케팅 홀로코스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20세기 초 가장 인기 있던 영화감독 세실 B. 드밀은 그의 작품에 '성공적인 결혼을 하느냐 못 하느냐.'를 주요 메시지로 계속해서 집어넣었다. 그 외 다른 여러 감독들도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로맨스 영화의 주연들을 스크린 밖에서도 스캔들 기사를 내보내며 그들의 인기를 이용했다.


대중에게 그들은 더 이상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하는 커플이 아니었다. 자신도 그들처럼 화려한 비주얼과 호화스러운 집, 낭만적인 여행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경향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아니, 더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에바 일루즈는 그녀의 저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연애의 상품화, 즉 사랑을 돈으로 환산하는 데에는 세 가지 주요한 속성이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거 상술 아냐?


첫 번째 요소는 사치품이다.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매력적인 것들.

커플을 위한 'OO데이'마다 상술이라 생각하면서도 사탕이나 빼빼로 같은 예쁜 쓰레기들(실제로 나는 사탕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을 받지 못하면 내심 섭섭해하고 상대의 생일이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 식비나 잡비를 줄여가며 선물 살 돈을 모았던 기억이 난다. 비싼 것을 사줄수록 내 진심이 더 전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영화나 드라마, 광고에서는 기념일에 커플룩을 사야 한다거나, 생일에 할 수 있는 한 비싼 물건(시계, 지갑 등등)을 선물해야 한다거나, 프러포즈를 할 때에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필수라는 메시지를 빈번히 던져댄다.


스크린에서 뿐만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나 커뮤니티에서도 중요한 날에 선물을 못 받은 사람들이 애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의심하며 털어놓는 고민들이 줄지었다.


그래도 명색이 100일인데...


두 번째 요소는 여행이다.

일탈에서 느끼는 강렬함과 흥분.

돈 없는 새내기 시절, 나는 애인과 처음으로 100일을 맞았다. 몇 주 전부터 들뜬 기분으로 어디 멀리 여행 갈 생각을 하면서 데이트 비용을 쪼개가며 돈을 모았다.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멋들어진 펜션을 잡고, 볼거리가 가득한 곳에 입장해야 했으니까. 우린 꼭 학교를 벗어난 멋진 여행을 갔어야 했다. 그것도 멀리, 아주 근사한 곳으로.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콘텐츠가 아니어도, 낭만적인 사랑을 하려면 소비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콘텐츠들은 많다.


예를 들면 자동차 광고에서도, 좋은 풍경을 달리는 차 안에는 선글라스를 낀 커플이 타고 있다. 그들은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를 질주한다. 건물이 빽빽한 도시 풍경을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으로의 일탈은 꽤 낭만적이다. 광고하는 제품은 사실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자동차'지만, 우리는 거기 타고 있는 연인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선 "나도 저렇게 자동차 타고 행복하게 여행하고 싶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들은 결국 자동차를 사고 싶은 마음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자동차를 살 엄두는 못 냈지만, 여행은 기회가 될 때마다 다녔던 것 같다.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나 걔랑 영화 보기로 했다?


세 번째 요소는 이벤트다.

분위기로 빚어지는 친밀성과 로맨틱함.

아마 연애를 해 본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쯤은 이벤트를 받아보거나, 준비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애인과 나는 기념일마다 꼭 무언가를 했어야 했는데, 사정상 여행을 못 가면 무리해서라도 비싼 식사를 하거나 이색적인 데이트를 하곤 했다. 그때의 나에게 기념일에 일어나는 이벤트는 로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로망도 기념일이 몇 번씩 찾아오면서 점점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다음은 뭘 준비하지? 그건 전에 했는데? 이건 저번에 비해 너무 약하잖아! 따위의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부담을 느낄 정도로 강박을 가져야 했을까.


이벤트란 어떤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 영화를 보러 가거나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의외의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포함된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20대 초반에는 "나 걔랑 영화 보기로 했다?"라고 아주 신이 나서 자랑하는 친구들이 그렇게도 많았다. 어떻게 보면 그냥 취향이 맞아 취미생활로 같이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는 건데, 우리는 거기에 서로 간에 암묵적으로 '썸'을 동의했다는 설레는 의미부여를 한다.


영화뿐만 아니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놀이공원 등도 마찬가지다. '낭만적인 곳'이라고 정해진 특정한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낭만적인 이벤트를 겪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합(공간+로맨스)은 은 우리가 그런 공간에 더 많은 소비를 하도록 부추긴다.




연애도 있는 놈들끼리


위와 같은 연애의 상품화(마케팅 홀로코스트)가 문제시되는 이유는 모두가 ㅡ어쩌면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이ㅡ 이를 만족할 만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귄다면 그게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행운이다. '넌 왜 기념일 안 챙겨?', '지금까지 여행도 한 번 안 가봤다고?', '너네, 커플 맞아? 너무 신경 안 쓰는 거 아냐?' 주변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독촉, 제안, 의심들을 무시하고 둘 만의 세상을 갖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앞에서 말한 연애의 상품화에 기여하는 세 가지 속성(사치품, 여행, 이벤트)은 모두 돈이 필요하다. 게다가 여행이나 이벤트 같은 경우엔 돈뿐만 아니라 여가 시간까지 요구한다.

연애도 돈 없으면 못한다.




에바 일루즈는 이를 '로맨스의 정치경제학'이라고 부른다. '연애'를 소비의 영역으로 엮어버림으로써 상위에 속해있는 일부만 이상적인 연애를 경험하고, 그 일부가 또다시 연애-소비를 결합한 문화를 조장하여 유지하는 계급 관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 계급 관계는 19세기부터 죽 이어져오던 것이다. 당시 엘리트 계급에 속해있던 사람들은 자신들만 즐기던 문화가 대중화되는 데에 위협을 느꼈고, 문화에 있어서 대중들과는 다른 새로운 차별점을 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19세기 사람들은 청교도 도덕으로 무장하여 공개적인 오락을 삼갔다. 그들의 자유시간은 다 같이 피크닉을 가거나 파티를 하는 등 공동체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적인 시간을 나눌 수 있는 건 오로지 결혼을 전제로 한 사이끼리 서로의 집에 초대를 할 때뿐이었다.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흔히 나오는 '응접실'문화) 하지만 이 초대 관행 역시 초대할 공간이 있는 부유한 집안에서나 가능하지, 집이 비좁은 노동계급은 아예 사생활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20세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기존의 초대 관습은 점점 사라지고, 레스토랑, 영화, 여행 등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사생활을 즐길 수 있는 외출 문화가 부흥하기 시작한다.




물론 중상층 계급은 이러한 문화의 전환에 반대했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놀러와 조용조용 놀다 가는 게 아니라, 연인 단 둘이서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우겼다.


그들은 이를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이라고 비난했다. 19세기에는 '초대'라는 시스템으로 사회적으로 적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했지만 결국 20세기의 흐름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만 즐길 수 있도록 문화를 고급화하는 것에 열심을 기울였다. 예컨대 멋진 데이트를 하려면 앞에서 말한 대로 돈을 쓰거나, 거기에 합당한 매너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든지 하는 것이다.


학교 급식에서 나오는 토마토 스파게티 정도나 라면 먹듯 젓가락으로 후루룩 먹었던 나는 애인과 처음 크림 파스타를 먹으러 갔을 때 포크로 면을 감을 줄 몰라 부끄러워 쩔쩔매며 어떻게 먹는 건가 몰래 눈치를 봤던 기억이 있다. 음식을 먹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데이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연애는 더 이상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돈, 자유시간, 적합한 매너와 교양 등과 더 강하게 연결되어 '계급 나누기' 구색에 맞춰져가고 있다.


기념일에 선물을 준비하지 않으면 무심하거나 센스 없는 사람이 되고, 테이블 매너나 대화 방법 같은 데이트 매너를 알지 못하면 촌스럽고 선을 긋고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된다. 연애가 소비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지위 소비 형태로도 드러나게 된 것이다.



백 명이 있다면 백 개의 연애가 있다.


이상적인 연애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없으면 못 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다. '연애를 하기 위해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해결책 아닌 해결책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단은 영화 잡지 <포토플레이>에 실린 한 독자의 편지다.

내 남편은 자동차를 가질 형편이 못 돼요. 우리는 돈 걱정을 해야 했고 야외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로가 무딘 남편, 따분한 아내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삶에서 로맨스를 유지하기 위해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뜻밖의 것을 찾아요.
-영화 잡지 <포토플레이> 독자 편지 中


이 편지의 주인 역시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소비를 통한 연애 없이는 서로가 지루한 사람이 되어버릴 거라 걱정하고 소비를 하면 비로소 행복해질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이상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라는 비교적 저렴한 형태의 소비를 이상적인 '로맨스'로 추구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영화관으로 외출하는 것이 부도덕하고 이상적이지 않은 연애로 여겨졌는데도 말이다.


그들이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건 19세기에 중하층계급이 연인을 초대할 공간이 없어서 사생활을 포기한 것에 비하면 좀 숨통이 트이는 일이다. 그리고 영화는 곧 상층계급들까지도 소비하는 문화로 전파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이상향'으로 상정된 연애상은 분명 존재하고, 그 영향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겠지만, 그걸 가질 수 없다고 괴로워 하거나 가지려고 아등바등 애를 쓸 필요는 없다.


위 편지의 주인은 당시의 이상향을 달성하지는 못 했지만, 대신 좀 더 저렴한 방식으로 낭만을 추구했고, 그때에 비해 계급 간 문화 격차가 많이 줄어든 지금은 우리가 원한다면 거기서 더 나아가 굳이 소비를 하지 않더라도 낭만적인 연애를 달성하고 지속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을 찾는 것이야 뭐, 각자의 몫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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