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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유 Sep 01. 2017

동경도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바냐 삼촌>으로 읽는 동경의 사랑



동경 로맨스


주변에 이상형을 물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 중 하나가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듣는 사람들은 모두 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배울 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형으로 충분하다는 데에 동의하는 것일까.


고등학교 1학년, 지리 선생님이 좋다며 일주일 내내 지리 시간만 기다리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선생님이 수업을 하다 씩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막고 무음의 소리를 지르며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얼굴이 붉어져서는 내 등짝을 때리며 "봤어? 봤어? 어떡해-"했다.


대학교 3학년 때 들어간 교내 사업단에는 한 학년 위 선배의 팬클럽이 있었다. 학교 도서관 문 옆에는 포스트잇을 붙이는 공간이 있었는데, 나와 한 후배는 'XX학과 OO오빠, 멋있어요♥️'라는 메모를 붙여놓고 주전부리를 사다 바치기도 했다. 어쩌다 그 선배를 편의점에서 마주쳐 음료수라도 얻어먹는 날이면 사업단실은 꺅꺅대느라 난리가 났다.


회사에 다닐 때는 같은 팀 차장님이 막내인 나를 앉혀두고 유자차를 한 잔 타주며 미래에 뭘 하고 싶냐며, 도와줄 게 있다면 도와줄 테니 언제든지 말 하라며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그렇게 상냥하시다가도 회의 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일에 열중하시는 모습을 보고 친구에게 '우리 회사에 진짜 멋진 분 있어...'라며 온종일 회사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대기도 했다.


선생님과 제자, 선배와 후배, 상사와 부하직원... 이 외에도 무수한 관계가 있다. 동경 로맨스는 어디에나 있다. 동경은 자신보다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에 대해 생겨나는 감정이다. 내 고등학교 친구는 선생님의 지적 능력에 반했고, 나는 1년 앞선 선배의 어른스러움에 반했고, 차장님의 연륜에 반했다.


조금 부정적이라고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대부분 정말 그 특성을 사랑한다기보다는 '경험해본 적 없기 때문에', 즉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막연한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저렇게 뛰어나니 나머지 부분에서도 잘 하겠지, 저렇게 어른스러우면 나한테도 엄청 잘 해주겠지 같은 비약을 끼워놓고는 상상을 펼치다가 그 끝에는 거의 신격화를 해버리는 거다. 그러나, 동경의 함정은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에 있다.




동경은 환상


FAE(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설명할 때 그 행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나 상황적 요소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그 사람이 가진 성격이나 가치관 등 내적, 기질적인 요인들의 영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뜻하는 용어다.


교수와 면접을 보는 박사과정의 학생을 예로 들어보자. 면접 때 교수가 A가 무엇인지 물었는데, 전공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 대답을 못한 학생은 '저런 것까지 알다니... 교수님은 모든 걸 다 아시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사실 교수는 A를 알았을 뿐이지, 그게 전공을 제외한 다른 모든 분야에도 능통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학생은 자신이 교수의 지식의 권위에 눌려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교수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동경은 환상이라는 거다.


동경의 사랑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삼촌>에 나오는 인물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희곡의 주요인물은 다섯 명으로, 극 중 집주인인 세레브랴코프는 한때 촉망받는 교수였으나 이제는 명예로운 시간을 다 보내고 언제 죽나 하며 골골대는 늙은이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젊고 아름다운 그의 두 번째 처 엘레나는 마을사람들의 혀를 차는 동정에도 아내로서의 본분을 다 하려고 노력하지만, 그의 히스테리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다. 극의 제목이기도 한 바냐 삼촌은 교수 전 처의 남동생으로, 젊은 시절 교수의 재능을 예찬하며 그를 위해 소처럼 일하다 지금에 와서 그때의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며 교수를 원망한다. 의사 아스트로프는 교수의 중풍을 진료하려 집에 드나드는데, 극 중에서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소냐는 교수 전 처의 딸로, 아스트로프를 흠모한다.


엘레나: 학자이자 저명인사이기 때문에 난 그이한테 끌렸던 거야.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인위적인 사랑이었지만, 그땐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거지! 내 잘못이 아니야. 나는 따분하고 삽화적인 인간이야... . 솔직히 말하면 소냐. 깊이 생각해보면 난 정말 너무너무 불행해!
바냐: 우리에게 자넨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존재였고, 우린 자네 논문을 외울 정도로 알고 있었어... ... .
하지만 이제 내가 눈을 뜬 거야! 모든 게 보인다니까! 자넨 우릴 속였어!


늙은 교수와 결혼한 젊고 아름다운 엘레나는 의붓딸 소냐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녀는 지혜로운 교수의 모습에 반하여 결혼까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동경이 결국 환상이었고 사실 그런 지식은 둘 사이에서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걸 알고 후회한다. 교수의 재능을 동경하며 자신의 인생을 바친 바냐의 인생 역시 엘레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동경이라는 환상이 걷힌 자리에 그들에게 남은 것은 불행뿐이다.

 


동경의 위험한 점


아스트로프: (술을 마시려고 한다.)

소냐: 이건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선생님은 우아하고 목소리도 그렇게 부드러운데... ... 그 이상이에요.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 가장 멋지세요. 그런데 어째서 술 마시고 카드놀이나 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닮으려고 하세요?


동경에서 사랑이 시작될 수는 있지만 둘은 구분해야 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동경으로부터 나온 소냐의 이런 발언은 그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아스트로프의 입장에선 이러한 그녀의 기대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녀는 마음대로 아스트로프의 이상적인 모습을 상정하고 그 틀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자 그를 이해하기보다는 거부감을 느끼며 그를 말린다. (물론 소냐가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없지만) 혹은 바냐처럼 동경하던 대상이 그 빛을 잃은 것처럼 보이자 그를 원망하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고. 우리는 동경하는 사람이 그 모습을 잃어버리면 종종 '깬다.'라는 표현을 쓰며 실망하기도 한다. 애초에 그 모습은 사실보다는 우리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에 가까운 것인데 말이다.


또한 극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동경으로 이루어진 사랑은 열등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바로 동경이 상대가 가진 장점에 대한 질투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난 왜 저기 닿을 수 없을까' 혹은 '그 사람에 비하면 나는 이렇게나 부족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곤 한다. 특히 동경하는 지점이 본인의 역량에서도 달성하고 싶은 분야라면 이런 감정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열등감은 본인에게도 괴로운 마음이 들게 하지만, 그걸 보는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동경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동경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심지어 나는 지금까지 모든 연애를 동경하던 사람과 했다. (그래서 과연 그런 동경 없이 사랑을 시작하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의문이기도 하다.) 다만, 상대를 향한 감정이 100% 동경일 경우 과연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경만으로 이루어진 사랑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고 말이다.


연애 경험이 없었던 20대 초반에는 온통 환상 투성이었다. 이것도 멋져 보이고 저것도 멋져보이고... 해 본 적이 없으니 나한테 뭐가 맞는지 알 수 없었고, 먼저 해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건 다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실제로 연애를 하면서 상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꼈고, 실망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상대를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내가 만들어 놓은 환상을 좋아했던 건 아닐까?'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이런 혼란은 동경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한 것, 즉 동경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에서 온 것이다. 때로는 이런 혼란이 되려 사랑을 의심하게 할 때도 있다.


동경이 사랑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동경이라는 감정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동경으로 시작한 사랑이더라도 자신이 갖고 있던 상대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는 순간에 당황하지 않고 1)동경과 사랑을 구분해내고, 2)동경이 환상이라는 걸 알았다해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해낼 수 있다면 적어도 엘레나처럼 나중에 가서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라며 후회할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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