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도 마음도 그때 그때 필요한 「정리(整理)」의 순간들
지난 2년간 큰 병치레 없이 홀로 해외에서 생존했음을 자만하다 한 차례, 호되게 앓은 적이 있다. 식중독으로 인한 장염의 고통 속에서 ‘먹어서 죽는다’는 법정 스님의 수필이 떠올랐다. 단순히 잊기 힘든 제목의 강렬함 때문이었지만, 이 고행의 기원도 육식이라면 육식이었다. 유통기간이 며칠 지나버린 모짜렐라 치즈. ‘이 정도 냄새면 괜찮아’라는 경험 자산에 대한 위험한 믿음으로, 조금 잘라서 샐러드에 넣어 먹었다. 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한 이 미련함의 출처는 무엇일까. 심리학자 허태균 교수는 ‘될 것 같은데’ 라며 제품을 매뉴얼대로 쓰지 않는 한국인들의 높은 활용능력이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까지 적용되어 전 세계 유래 없는 경제발전을 이뤘다고 했다 (어쩌다 어른). 그 심리적 DNA를 잘못 사용한 죄로 나는 1시간 반 동안 링거를 맞고 돌아와 ‘잘 버리자, 일주일 이상 두지 말 것’ 이란 포스트잇을 냉장고 앞에 붙였다.
이곳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이후 조금씩 모아두었던 작별과 재회의 선물들이 어느덧 내 작은 방에 차고 넘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처럼 이미 터 잡고 있던 물건들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러다 또 한 번, 스스로의 지독한 미련함에 뒷목을 잡았다. 고이 수납장 뒤 편에 안치된 스타벅스 캡슐 커피 3각이 발각되었다. 코로나 전의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던 파리에서 갑자기 동생이 생각나 몇 개 집었던 그것이다. 당시엔 시간만 되면 주말에 한번 다녀올 수 있는 한국이었다. 벌써 그럴 수 없는 세상이 된 지 오래인 지금까지 그 존재를 거의 잊어버린 것이다. 아니, 한 번은 떠올렸다. 이젠 고국으로 돌아간 친구의 집에 놀러 갔던 날, 그녀가 권하는 캡슐을 하나 골라 머신에 내리면서도 ‘아 그 캡슐 이 친구 줘야겠다’라는 생각을 못했다. 아니, 결심을 못했다. ‘고마운 친구지만 아직 내가 한국을 언제 갈지 모르겠으니까’ 라며 넣어 둬 버린 그 커피는 이미 발견 시점보다 1년 전쯤 생을 마감했고, 아끼다 똥이 돼 버렸다.
그 이후로 무심코 먹던 소스 병 뒤의 제조일자나 이미 인테리어 장식이 되어버린 포장 그대로의 향초나 디퓨져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지 확인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이 모든 게 오랜 세월 엄마에게 등짝을 내주며 지적받아 온 ‘정리’의 결핍에서 왔음을 새삼 깨닫는다.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수행하며 보고와 회의 일정을 관리하는 ‘보이는’ 일들은 나름 긴장하면서 정리해왔다. 회의 전 사전 이슈를 파악하여 공유하고, 회의 후 논의된 내용과 잔여 이슈를 랩업하여 재전달하는 일이 관성적으로 반복되는 매일의 연속이었다. 특히 기술자와 디자이너들의 전문용어를 사용자의 언어로 전환하는 중간자로서의 상황 ‘정리력’을 터득한 것이 지난 몇 년간의 업무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라고 자평하던 터였다. 그런데 정작 남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내 생활의 영역에서는 이렇게 많은 부분이 무너져 있었다. 하루 끝에 마주한 내 방의 흔한 풍경은 입으려다 만 옷들이 나보다 먼저 침대에 누워있었고, 전투적으로 화장을 끝낸 그곳엔 태풍이 지나간 자리가 남아 있었다.
어느덧 나만큼 나이를 먹은 ‘주변 정리 못하는 습관’을 마주하며 다시금 ‘정리(整理)’의 의미를 뒤적여본다. 먼저 찾아본 국어사전의 정리는 뜻이 좀 너무 많았다. 명료해지고 싶었으므로 한자사전으로 가본다. 이번엔 단 두 개의 뜻을 보여준다. ‘1) 흐트러진 것을 가지런히 바로잡음 2) 불필요한 것을 없애고 일이 잘 되게 함’. 심지어 일까지 잘 되게 하는 것이라니 내친김에 구성 원리까지 스크롤을 내려본다. 사물의 모양을 본뜬 ‘상형(象形)’과 기존 뜻을 지닌 글자를 모아 새로운 뜻을 만드는 ‘회의(會意)’, 각기 뜻과 음을 나타내는 두 글자를 모은 ‘형성(形聲)’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며, 그 출처 또한 네이버 기준 ‘자원(육서), 한자 로드(신동윤), 디지털 한자사전 e-한자’ 등으로 풍부한 한자의 뜻 해석은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에 가까워 좋으면서도 때로 피로하기도 하다. 나의 경우, 글자마다 더 와닿는 뜻의 출처를 골라 조합하고 거기에 내 생각을 조금 보태어 ‘오독’의 위험은 있지만 일종의 아포리즘(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격 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 되는 ‘의미 편집’을 즐긴다.
먼저 ‘가지런할 정(整)’은 묶을 속(束) + 칠 복(攵) + 바를 정(正)의 3개 글자의 조합이다. 나뭇가지 몇 개를 끈으로 동여맨 ‘束’은 ‘묶다’를, 몽둥이를 손에 든 형상의 ‘攵’은 ‘~하게 하다’를, ‘한 일(一)’과 ‘그칠 지(止)’가 결합된 ‘正’은 ‘하나뿐인 길 앞에 잠시 멈춰 살피는 일, 바름’을 뜻한다. 유년의 반장선거 때 칠판에 숨 가쁘게 적히던 ‘바를 정(正)’이 이토록 뭉클한 글자였다니 또 한 번 놀랐다. 이렇게 의미를 합쳐보면 ‘가지런하다’는 것은 ‘한데 모아서 신중히 바르게 하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한편 ‘다스릴 리(理)’는 구슬 옥(玉) + 마을 리(里) 2개 글자의 구성인데 나로서는 다소 이해의 혼란을 겪었던 글자이다. 여기서 ‘里’는 발음으로 쓰여 ‘玉’과 함께 결합됨으로써 ‘단단한 보석 옥을 깎아 무늬를 새겨 넣는 세공의 일’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원석을 다듬는 어려움’에 집중하여, 결국 ‘정리’란 ‘무언가를 모아 묶고 충분히 바른 지 검토하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갈무리해보았다.
그러다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미련(未練)’이란 단어도 마저 찾아보았다. ‘아닐 미(未)’는 나무인데(木) 아직 윗부분이 자라지 않은 미완성의 상태다. ‘익힐 련(練)’은 실 사(糸) + 가릴 간(柬)의 조합으로 ‘누에에서 뽑아져 나온 실들을 구별하고 분간해내는’ 능력의 상태다. 합쳐보면 ‘미련’은 아직 사리를 분간할 수 없는, 능력 상실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상태를 벗어나 練의 세계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익힐 련(練)’과 관계된 단어들을 떠올려본다. 연습(練習)과 수련(修練)이 있었다. ‘익힐 습(習)’은 깃 우(羽) + 흰 백(白)의 결합인데 갑골에서 白은 해 일(日)이 된다. 곧 ‘깃이 달린 새가 해 위에 오를 때까지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이 ‘익히다’는 의미였다. 또한 ‘닦을 수(修)’는 바 유(攸) + 터럭 삼(彡)의 모음으로 攸는 사람을 앞에 두고 몽둥이로 때리는 형상이며 그 결과 땀과 피(彡)가 나고 있다. 닦을 수(修)가 이렇게 무서운 글자인지 몰랐으므로 선택지가 있다면 높이 날아오르는 새처럼 練習하여 未練을 벗어나자고 다짐해본다.
이렇게 나를 일과 생활에서 지킬과 하이드로 만드는 ‘정리’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긴 미련의 동굴을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연습해야 할 정리의 시작은 그 의미를 되짚어 볼 때, 지금의 필요를 검증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과감히 버리는 것이다. ‘참 삶이란 부단히 버리는 것과 든든히 붙잡는 것의 통일이다’라는 전우익 작가님의 문장이 오버랩된다. 그저 털털하고 까다로운 성격과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생존 방식으로 '정리'를 인정하고, 잠들기 1분 전 책상 정리부터 실천해보려고 한다. 브런치를 통해 다시 시작해보고 있는 글쓰기도 내게 참 고마운 일종의 정리다.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생각을 하얀 지면의 글로 옮기며 비로소 그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고 새로운 인풋을 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내 행동하지 않은, 전하지 못한 어떤 마음들도 점차 변질되고 부패된다는 것을 기억하겠다. 이제 그만 에코와 개츠비의 은퇴를 선언한다. 상한 것은 버리자. 그래야 새로운 것을 품을 자리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