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의 시대, 잃어버린 것들

지식의 풍요, 지혜의 빈곤

by 이수염

편리하다. 그리고 불편하다


미디어나 시각정보와 자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네모난 작은 핸드폰 사이로 바라보는 세상의 정보는 이제 우리가 어디를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세계 각지에 있을 수 있게 해 주고 손가락 한번 튕기는 것으로 다양한 종류의 경험과 정보는 제공한다.


나 역시 그 세상에 몸을 담고 있다. 그 세상에는 우리에게 감명을 주는 책들조차 들어있고, 훌륭한 책들의 문장들 중 세문장정도로 요약해서 우리에게 제공되기도 한다. 가령 예전처럼 우리가 삶의 일부에 한 권의 책을 녹야서 단 몇 시간 만에 깨달음을 얻는 시대는 거의 사라졌다. 우리는 손가락을 한번 넘겨서 단 세문장으로 한 권의 책을 요약해서 깨달음을 얻는 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멍청해진다.


이 말은 과격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단어를 쉽게 거두지 않으려 한다. 멍청해진다는 것은 지식의 양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우리는 더 많이 안다. 더 많이 본다. 더 많이 접한다. 그런데도 멍청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해하는 대신 소비하기 때문이다.


세 문장은 결론이다. 그러나 결론은 과정이 아니다.

결론만 반복해서 먹다 보면 우리는 씹는 법을 잊는다.

씹지 않는 음식은 소화되지 않는다. 소화되지 않은 지식은 몸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배부르지만 영양실조다. 정보는 넘치는데 판단은 얕아진다. 문장은 기억하는데 맥락은 잊는다.


세 문장은 날카롭다. 강렬하고 공유하기도 쉽다. 하지만 세 문장 뒤에 있었던 망설임, 의심, 반복, 반박, 수정의 시간은 잘려나간다. 우리는 결과만 먹는다. 그리고 결과만 먹는 습관은 사유를 굶긴다.


사유는 느린 행위다. 사유는 머뭇거림을 포함한다. 이 문장이 맞는지, 이 생각이 타당한지,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묻기 전에 넘긴다. 읽기 전에 판단하고, 이해하기 전에 동의한다.


속도는 중독적이다. 빠르게 이해했다는 느낌, 빠르게 성장했다는 느낌, 빠르게 깨달았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느낌은 이해가 아니다. 우리는 깨달음의 모양을 소비한다. 진짜 깨달음은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오래 남는다. 하지만 오래 남는 것은 빠르게 소비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남는 것보다 빠르게 남는 것을 택한다.


이것은 단순한 취향의 변화가 아니다. 사고 구조의 변화다. 우리는 점점 과정을 생략하는 사고에 익숙해진다. 요약을 요약하고, 정리를 정리하고, 의견을 복사한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했다고 느낀다.


기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누가 우리를 속였는가.

아무도 대놓고 속이지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다. 편리함을 선택했고, 효율을 선택했고, 빠름을 선택했다. 그러나 선택의 구조는 이미 설계되어 있었다. 네모난 작은 화면은 무한한 세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깊이를 제한한다. 짧은 영상, 짧은 글, 짧은 문장. 길어지면 떠나고, 느려지면 지루해한다. 머뭇거리면 불안해진다.


우리는 기다림을 잃었다. 기다림을 잃은 인간은 사유를 잃는다. 사유를 잃은 인간은 판단을 외주화 한다.

누군가 정리해 준 생각, 누군가 요약해 준 결론, 누군가 이미 검증했다는 주장. 우리는 그것을 빠르게 흡수한다. 그리고 빠르게 확신한다.


확신은 편안하고, 의심은 피곤하다. 그래서 우리는 피곤해지지 않는 길을 택한다. 이 구조는 계층을 만든다.

빠름을 소비하는 사람들과 빠름을 따라가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빠름을 설계하는 사람들.

빠름을 설계하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시스템을 만든다. 그는 흐름을 만든다. 그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에서 넘길지 안다.

반면 우리는 넘기고 계속 넘긴다. 넘기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순간 뒤처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이 가장 강력한 통제 장치다.


우리는 바쁘다. 그러나 무엇에 바쁜지 묻지 않는다.

우리는 많이 안다. 그러나 무엇을 이해했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자랐는지는 점검하지 않는다.


지식은 쌓인다. 그러나 지혜는 기다린다.

지혜는 압축되지 않는다. 지혜는 요약되지 않는다.

지혜는 반복과 실패와 오해 속에서 천천히 자란다.

우리는 지혜를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림은 손해처럼 보인다.

느림은 낭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느림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속도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느림을 선택할 수 있는 이는 빠름을 사용한다. 빠름에 사용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보이지 않지만 점점 벌어진다.


피라미드는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모양이 달라졌다.

위에는 극소수, 아래에는 거의 전부. 위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을 통제한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속도를 견딘다. 속도를 견디는 동안 생각할 시간은 줄어든다.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조를 의심하지 못한다.

의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이 구조는 스스로를 유지한다. 매우 불편하게도 대놓고 기만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만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빠르게 넘긴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것은 속도가 아니라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 깊이를 불편해한다.

긴 글을 피하고, 복잡한 논리를 지루해하며, 모호함을 참지 못한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회는 극단으로 기울기 쉽다.


흑과 백. 찬성과 반대. 옳음과 틀림.

그러나 현실은 그 사이에 있다. 그 사이를 걷는 힘이

사유다. 나는 이 구조를 비판하지만 그 안에 서 있다.

나 역시 넘기는 행위를 하고, 요약을 보고, 빠르게 판단한다. 그래서 이 글은 타인을 향한 고발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기록이다.


우리는 멍청해지고 있다.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유하지 않아서.

속도를 사용할 것인가? 속도에 사용될 것인가?

세 문장을 소비할 것인가? 한 권을 견딜 것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충분히 빠르다.

그리고 그 세상 안에 우리 역시 충분히 빠르다.


우리는 풍요로운 지식의 시대와

빈곤한 지혜의 시대를 동시에 살아간다.


이제 묻는 일만 남았다.


우리는 아는가?

아니면 알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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