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편집사이에서
삶은 이야기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적어도 살아내는 동안에는 그렇다. 그때의 우리는 인물도 아니고.그저 장면이다. 연속 촬영되는 이미지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상의 한 프레임일 뿐이다. 주마등이라는 말이 괜히 생겼을까. 삶은 서사처럼 정돈되어 흐르기보다 이미지처럼 스쳐 지나간다. 사건은 발생하고, 감정은 요동치고, 의미는 없다. 의미는 나중에 붙는다. 편집은 사후 작업이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때의 실패가 나를 만들었다.”
“그 시간은 성장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고통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것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의미는 견딘 뒤에 붙는다. 살아남은 뒤에 정리된다. 역사도 비슷하다. 성공하면 혁명이라 부르고, 실패하면 반란이라 부른다. 사건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이름은 결과가 정한다. 의미는 사건의 속성이 아니라 사후 해석의 언어다.
그렇다면 질문은 조금 달라진다.
우리는 왜 서사를 만드는가가 아니라, 서사란 무엇인가. 큰 틀에서 보면 서사는 자연이다. 진화와 멸종은 거대한 흐름을 이룬다. 수많은 종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어떤 종은 번성하고, 어떤 종은 도태된다.
그 전체를 바라보면 마치 하나의 장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연은 그것을 이야기라 부르지 않는다.교훈도 남기지 않고, 의도도 설명하지 않는다. 자연은 그저 흐른다.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흐름을 분절한다. 시작과 끝을 만들고, 원인과 결과를 배열하고, 이름을 붙인다.
이름 붙이는 순간 사건은 이야기로 변한다. 실패, 전환점, 성장, 몰락. 이 단어들은 자연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는 있다. 그렇다면 서사는 인간의 발명일까?
아니다. 그 또한 자연의 한 과정이다.
언어는 진화의 산물이고, 기억을 구조화하는 능력 역시
자연이 우리 종에게 허락한 기능이다. 우리가 서사를 만든다는 사실조차 자연의 일부다.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원인 불명의 급격한 변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변화조차 자연이 낳은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바깥이 아니다. 자연이 스스로를 복잡하게 만든 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처음의 서사는 생존이었다. 저곳에는 위험이 있다.
이 식물은 먹을 수 있다. 이렇게 했더니 살아남았다.
경험을 공유하는 기능은 집단을 지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사는 단순한 전달을 넘어 해석의 틀이 되었다. 무엇을 혁명이라 부를지, 무엇을 쿠데타라 부를지,
누가 영웅이고 누가 범죄자인지. 이름을 붙이는 자가 방향을 정한다. 그 순간 서사는 권력이 된다.서사는 본능에서 출발했지만 권력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위로가 되기도, 경고가 되기도 한다.
어떤 서사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어떤 서사는 사람을 묶는다. 폭력이 되는 서사조차 시간이 지나면 교훈이 된다. 서사는 단선적이지 않다. 현재의 해석과 미래의 재해석 사이를 오간다.
요즘의 서사는 조금 다르다. 서사가 사라진 시대라기보다, 하이라이트가 강화된 시대에 가깝다. 예전에도 의미 없는 날은 많았다. 지금도 많지만 달라진 것은 선명도다. 우리는 전체 극을 보기보다 인상적인 장면을 반복 재생한다. 만약 인생이 연기라면, 예전에는 극의 흐름과 캐릭터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멋있어 보이는 장면을 남기려 한다. 캐릭터보다 컷. 과정보다 장면. 흐름보다 인상. 우리는 삶을 바꾼 것이 아니라 편집 기술이 늘었다. 여전히 우연을 겪고, 혼란을 지나고, 실패를 경험한다. 다만 이제 우리는 그것을 기록하고, 자르고, 보정하고, 공유할 수 있다. 삶은 그대로인데 편집 도구가 정교해졌다.
그렇다면 모든 시간은 의미로 환원되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의미는 명명이고, 인간의 행위다. 명명되지 않은 시간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사람 안에 축적되어 있을 뿐이다. 실패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단순한 실패였는지, 성공을 위한 발판이었는지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체 시간이 말해준다.
어쩌면 한 인간의 삶이 모두 지나야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성장이라는 단어 역시 모호하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노화도 성장이다. 우리는 상승을 성장이라 부르고 쇠퇴를 실패라 부른다. 그러나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둘 다 변화일 뿐이다. 모든 고통이 교훈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교훈이 있는 고통이 값진 것이다. 그저 아팠던 시간도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국 남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서사를 만드는 존재인가, 아니면 서사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인가.
답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서사를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서사에 의해 만들어진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우리가 이해하는 역사, 우리가 믿는 가치,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정체성.
모두 이미 존재하던 이야기의 틀 안에서 형성된다.
우리는 문장을 쓸 수 있지만, 언어를 처음부터 만들 수는 없다. 우리는 방향을 고를 수 있지만, 지형을 고를 수는 없다. 창작자이면서 산물이고, 편집자이면서 장면이다. 해설자이면서 등장인물이다. 이 이중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자연은 흐르고, 우리는 그 흐름에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우리가 붙인 이름 역시 또 다른 흐름이 되어 우리를 만든다.
서사는 자연이 인간이라는 종을 통해 얻은 자기 반영 능력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말하지 않지만, 자연의 일부인 우리는 자연을 설명하려 한다. 우리는 서사를 만들면서 동시에 더 큰 서사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존재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아마도 우리는 조금 더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되,이야기에 취하지 않는 태도. 편집하되, 흐름을 잊지 않는 태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오늘도 또 하나의 장면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그 장면은
누군가의 이야기로 불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