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있는 시간 위에서 찾는 기울어짐을 찾는 우리
우리는 시간을 흐르는 것으로 배웠다.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과거는 지나가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며, 현재만이 살아 있다고. 하지만 물리학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시간은 정말 흐르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느낄 뿐인가?
1. 사차원이라는 가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제시한 상대성이론,
특히 특수상대성이론(특수 상대성 이론(Special Relativity)과 일반상대성이론(일반 상대성 이론, (General Relativity)은 시간을 공간과 분리된 개념으로 두지 않았다.
공간과 시간은 하나의 구조,
즉 시공간(시공간, Spacetime)으로 묶여 있다.
이 관점에서 세계는 삼차원 공간 + 일차원 시간,
즉 사차원 구조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블록 유니바스(BlockUniverse)다.
블록 유니버스 이론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이미 존재한다. 마치 한 권의 책이 통째로 존재하듯,
우리는 그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고 있을 뿐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펼쳐져 있는 구조’일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는 그 구조 위를 이동하는 의식의 단면일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우리의 시간은 하나의 동영상처럼 처음과 끝이 정해져있는 하나의 영상으로 되어있지만, 그 안에서 동영상이 재생 되고 있는것을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이 동영상은 흐르지 않고 존재하는 하나의 덩어리이며, 우리는 각 프레임을 살아가며, 시간이 흐른다고 느낀다는 가설이다.
이 관점은 낯설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미래 역시 이미 존재한다면? 우리는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려진 선 위를 통과하는 존재일까?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허무에 닿는다.
2. 미래가 없다면 삶은 암울해지는가
생각해보자. 오늘 백만장자가 되고 내일 죽는다면.
그 조건을 안 상태에서 오늘의 부를 선택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를 전제로 현재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노력은 축적을 전제하고, 사랑은 지속을 전제하며, 희망은 확장을 전제한다.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압축되고,
의미는 증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블록 유니버스적 세계관은 때로 결정론(Determinism)으로 오해된다.
이미 정해져 있다면, 왜 애써야 하는가?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가설과 모든 것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닐 수 있다.
3. 엔트로피와 불확실성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Entropy)가 증가한다고 말한다. 엔트로피는 쉽게 말해 무질서의 정도이자
정보의 불확실성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정보의 불확실성인 엔트로피로 인해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며, 미래로 뒷걸음질 치며 가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컵이 깨지면 다시 저절로 붙지 않는 이유,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을 섞으면 다시 분리되지 않는 이유. 시간의 방향성은 엔트로피의 증가와 연결된다. 우리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을 미래’라고 부른다.
즉, 미래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정보의 상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있다. 블록 유니버스가 맞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구조 안에는 엔트로피의 증가가 포함되어 있다. 그 말은 곧, 구조는 고정되어 있을지라도
그 안의 정보는 미세한 불확실성을 내포한다는 뜻이다.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은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한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는 어떤 물리량들은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세계는 완전히 단단하게 닫혀 있지 않다.
미세하지만, 가능성의 여백이 존재한다.
4. 정해진 시간선 위의 기울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시간은 구조로서 정해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구조 안에는 미세한 불확실성의 결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을 통과하며 살아간다. 우주적 관점에서 인류의 모든 선택은 티도 나지 않는 흔들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티끌 같은 차이가 개인에게는 거대한 기울기가 된다. 어떤 사람은 꼭대기에 도달했다고 느낀 순간 허무에 빠진다.
왜냐하면 정상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끝에 도달했다고 느낀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도달해야 할 절대적 꼭대기가 애초에 없다면?
삶은 정점의 게임이 아니라 기울기의 게임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조금 더 정직한 선택으로, 조금 더 책임 있는 행동으로.
그 미세한 차이가 나라는 존재에게는
거대한 방향 전환이 된다.
5. 부조리 속의 의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부조리(Absurd)를 말한다. 세계는 침묵하고, 인간은 의미를 요구한다.
이 간극이 부조리다. 만약 시간이 멈춰 있고 이미 완성된 구조라면, 부조리는 더 깊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본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겸손을 준다. 우리는 우주를 구원할 수 없다.
우주를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차지하는 국소적 영역, 우리에게 허락된 의식의 반경 안에서는
우리는 거대한 존재다. 하나의 선택, 하나의 태도,
하나의 책임이 그 반경 안에서는 세계를 바꾼다.
6. 겸손과 용기의 균형
나는 뜬구름 잡는 희망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원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 말은 우주적 구조를 무시한다.
그러나 “어차피 다 정해져 있다.”라는 말도
동일하게 무책임하다.
나는 그 사이를 원한다. 정해진 구조를 인정하는 겸손.
그 안에서 미세한 가능성을 밀어내는 용기. 겸손을 잃지 않은 용기. 맹목적이지 않은 희망. 우리는 별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별을 바라보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시간을 멈출 수 없다. 그러나 시간선 위에서 기울기를 만든다.
7. 의미를 찾는 행위의 의미
만약 모든 것이 구조라면, 우리가 의미를 찾는 행위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국소적 해석의 자유’라고 부르고 싶다.
전체는 정해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부분은 해석한다.
우리는 거대한 시공간 구조의 일부다. 하지만 동시에
그 구조를 자각하는 존재다. 그 자각이 엔트로피적 불확실성의 작은 틈과 만나 의미를 생성한다.
의미는 우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의미는 의식을 가진 존재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하다.
8. 끝이 있다는 사실
끝은 있다. 죽음은 온다. 시간선은 완결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기울기를 만든다.
우주적으로는 미미한 차이. 그러나 개인에게는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차이. 나는 이것을 비극이 아니라 품위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거대하지 않다. 그러나 무의미하지도 않다. 정해진 시간선 위에서 우리는 미세한 불확실성의 결을 따라 자신만의 방향을 만든다.
그것이 멈춰 있는 시간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가 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