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요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할까?'
바람이 부는 날이다. 우기(雨期)에 부는 바람이라 조금 거칠었다. 천(川) 가에 앉아 버드나무가 소리 내며 제 몸을 흔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무의 생각을 궁금해 묻다 갑자기 한 달 전에 본 찔레꽃이 생각이 났다.
지인과 함께 찾아 간 그날은 운이 좋게도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가장 절정의 시기의 꽃들은 마치 한낮의 별이 와르르 쏟아져 내려와 수줍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길 위에 옛사람은 소리 없이 와 있고 그 순한 웃음 뒤에서 흐릿한 꽃향이 풍겨 나왔다. 지인과 나는 서로의 다른 생각으로 꽃에 취해 한참을 걸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얼마나 센지 옷깃을 여미며 걸어야 했다. 나는 꽃송이가 떨어질까 봐 안타까웠다. 이 꽃을 피려고, 한 열흘 피려고, 참아왔던 세월이 보여 더럭 겁이 나기까지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한 잎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바람에 제 몸을 맡기고 흔들리면서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 상황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 세상 만물은 오고 가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 듯하다. 질서나 차례, 존재하는 것들이 가져야 하는 거스를 수 없는 힘을 본다. 2주쯤 지나 찾아간 그곳에는 찔레꽃은 한 송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내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저 버드나무의 흔들림이 어떡해 세상을 살아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나무도 저렇게 흔들리며 살아내고 있구나.' 바람이 가끔씩 잦아들면, 숨을 고르는 나무를 보며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살아가는 한 단면을 보여 주었지만, 나무는 이런 삶의 여름을 몇 번이나 맞았을까 생각을 하니,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온전한 자기 삶을 살고 있을 때, 나는 내 삶의 온전한 주인공이었을까? 내 삶에서 내가 빠진 시간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가족을 위해, 희생을 희생인 줄 모르는 삶, 그 속에서는 나는 항상 뒷전이었다. 하다못해 한 끼 식사에도 가족을 위한 밥상에는 시장을 보고 정성을 들이다가도, 나를 위한 밥상을 제대로 차려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그랬을까?' 나의 삶에서 나를 위해 산 날이 얼마나 될까? 답이 없는 질문을 한다.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아내였고, 부모였고, 친구였고, 동료였고------
이런 정해진 틀 안에서 바람은 얼마나 거칠게 몰아쳤던가? 그것이 인생이라고 저 지혜 있는 나무가 지금 들려주고 있지 않은가? 뭐 특별한 일이 있었겠냐고. 다 아는 일이지 않냐고.
지금의 나를 본다. 이 나이가 돼서야 내가 보였다. 나를 위해 밥상을 차릴 줄을 알게 되었다. 나를 위해 글쓰기도 시작하였다. 나를 위해 사는 방법을 차츰차츰 늘려 나가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자기 삶을 살고 있는 저 나무는 길게 늘어뜨린 몸을 흐르는 물에 비추며 날마다 자신을 바라보며 산다. 흐린 대로, 맑은 대로, 비 오는 대로, 눈 오는 대로------
참 아름답지 않은가!
6월의 끝자락에서 바람은 나에게도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