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실존적 목마름을 해결할 궁극적 치료 모델

250424 종교현상학 - 김재영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by 김희우

도덕주의는 안전한 길일지 모른다. 질타받을 일도 없고, 윤리 규범 안에 머물러 있으면 문제될 게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과 삶이란 그렇게 간단히 선 긋고 재단하기에 너무나 복합적이다. 도덕의 틀에 갇혀 사람을 바라보려는 상담심리사나 정신과 의사, 성직자는 그래서 위험하다. 내면의 고통과 혼란은 도덕이라는 기준선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진정한 치유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자(나)를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시작한다. 이것이야말로 심리치료가 도덕적 판단을 넘어 '존재 중심 치료'로 작동할 수 있는 이유다. 윤리적 평가 대신,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자 할 때, 비로소 변화의 문이 열린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파헤쳤을 때, 그는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모순적이며, 때론 파괴적일 수 있는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그가 보여준 질문은 '인간이 이토록 연약하고 뒤틀려 있음에도, 과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였지만, 해답까지 충분히 찾을 시간은 없었다. 반면 융은 종교적·영적 상징과 연금술에 관심을 두어 그 심연을 치유하고 넘어서려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쿠르트 골드스타인 - 아브라함 매슬로우 역시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자기 초월"의 욕구가 있음을 역설했고, 이는 곧 우리가 단순히 생존을 넘어 영적·종교적 차원에 이르고자 하는 본능을 지녔음을 시사한다.



니니언 스마트는 종교를 일곱 차원―경험·감성, 신화·서사, 교리·철학, 윤리·율법, 의례·실천, 사회·조직, 물질―으로 바라본다. 인간 또한 이 일곱 결이 서로 얽혀 있어, 각각이 조화롭게 회복될 때 비로소 온전한 삶에 이른다. 종교의 과제는 바로 이 통합적 치유를 돕는 일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 상담은 의사·사회복지사·정신분석가의 대체물이 아니라, 그들을 넘어 궁극적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심리치료와 종교가 만나는 지점은 '자유'에 대한 통찰이다. 롤로 메이가 강조했듯,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의 실존적 굴레를 넘어서려는 자유를 지니고 있으며, 심리 치료의 핵심도 그 자유를 되찾아주는 과정이다. 단순히 특정 증상을 없애거나 사회에 잘 적응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환자가 자신의 가장 깊은 열망—자기 초월과 자유—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이 참된 치유다. 종교가 전해주는 '궁극적 구원'의 메시지 역시, 사람을 속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본래의 자유로운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데 있다.



결국 치유란, "받아들일 수 없는 자(나)를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내부의 파편을 하나로 잇는 과정이다. 도덕적 규범을 준수하는지에 대한 판단만으로는 결코 전인적 회복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깊숙이 감춰진 절망과 두려움, 죄책감을 똑바로 마주하면서도 그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용기다. 종교는 이때 최종적 토대가 된다. 무한히 개방된 차원, 곧 '영원'과 닿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우리 일상의 상처와 혼란을 보듬는 힘이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본인이 밝혀낸 인간의 어두운 실존이 결국 종교적 해답과 접속하리라는 사실을 더 깊이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즉, 우리가 대신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심리 치료가 선사하는 자유와 종교가 열어주는 궁극적 길이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대화하고 협력해야 한다. 기계적인 도덕주의가 아니라, 인간이 지닌 다차원적 목마름에 대한 온전한 인식과 수용이야말로 현대 시대가 갈망하는 '진짜 치유'의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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