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집에서 배운 환대, 교회에서 본 한인들 애환

– 왜 어떤 신앙은 약자를 끌어안고, 어떤 신앙은 약자를 밀어낼까

by Thriving

미국에서 살면서 제가 가장 놀랐던 경험 중 하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한인 사람들보다, 유대인들이 더 따뜻하게 약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낯선 이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고,
“배울 점이 있다”고 느끼는 젊은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마치 살아 있는 학당처럼 함께 먹고, 자고, 토론하며 지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반면, 제가 만난 많은 한인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 중 일부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이 가진 자산, 배경, 사회적 지위에 따라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예수가 복음서에서 보여준 방식으로 약자와 함께하는 모습은
그리 자주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유대인이라서 본질적으로 더 ‘선한’ 걸까요?
기독교인이라서 본질적으로 더 ‘계급적’인 걸까요?

이 질문에서 출발해,
저는 역사·문화·심리의 여러 층을 함께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1. “유대인이라서 착하다”가 아니라

“어떤 전통과 공동체 안에 있느냐”의 문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전제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 약자에게 관대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차별적이지도 않습니다.

제가 만난 유대인들은 우연히도
배우는 것, 나누는 것, 약자를 환대하는 문화가 강한 공동체에 속해 있었고,

제가 마주친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성공·계급 의식과 뒤섞인 신앙 문화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질문은 사실 이렇게 바뀝니다.


“왜 어떤 유대인 공동체는 그렇게 약자를 살리고,
왜 어떤 기독교 공동체는 그렇게 못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조금은 역사와 전통, 그리고 집단 심리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2. 유대인 전통: 늘 쫓겨났던 민족, 그래서 남의 아픔이 낯설지 않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디아스포라(diaspora),
즉 “흩어진 민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나라를 잃고,
정착했다 싶으면 다시 쫓겨나고,
재산과 생명을 동시에 위협받던 역사가 깁니다.

이런 경험은 집단의 깊은 층에
이런 감각을 남깁니다.


“우리는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는 존재다.”


이 감각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
다른 하나는 약자와 낯선 이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입니다.

제가 만난 유대인 공동체는
후자의 모습을 많이 보여줬습니다.

2-1. ‘나눔’이 선행이 아니라 ‘정의’인 전통

유대교에는 **쩨다카(tzedakah)**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보통 “자선”이라고 번역되지만,
뉘앙스는 “불쌍해서 베푸는 자비”라기보다
**“마땅히 해야 하는 정의로운 행위”**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는 티쿤 올람(tikkun olam),
“세상을 수리한다, 고쳐 나간다”는 개념입니다.

가난한 자, 나그네,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 공동체 밖에서 온 사람을
돕고, 초대하고, 함께 배우는 일은
“착한 사람이 가끔 하는 특별한 선행”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해야 하는 기본값”**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집의 빈방을 나누고,

식탁을 나누고,

배움의 시간을 나누면서,

삶 자체를 하나의 열린 학교, 열린 예배당처럼 만들어갑니다.

3. 미국·한인 개신교의 어떤 얼굴:

“복 = 성공”이라는 왜곡된 신학

반대로, 제가 미국에서 만난 많은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안에는
기독교 신앙 그 자체보다는,
자본주의와 성공주의에 물든 종교 문화가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상당히 넓게 퍼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3-1. “하나님의 축복 = 돈, 지위, 성공”이라는 공식

일부 설교와 교회 문화에서는
아주 은근하게, 또는 대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사업이 잘 되고, 자녀가 잘 되고, 건강이 회복된다.”

“연봉이 오르고, 집이 커지고, 재산이 늘어나는 것 = 은혜의 증거”

그러다 보니 이 공식이 생깁니다.


잘 살면 = 축복받은 사람
가난하면 = 믿음이 부족하거나, 노력이 부족한 사람

이 논리가 굳어지면,
가난한 사람, 불안정한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영적으로도 ‘문제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은 어느새
약자와 함께하는 힘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경건하게 포장하는 장치”**가 되기 쉽습니다.

3-2. “교회”가 영적 공동체가 아니라

계급과 인맥의 장이 되는 순간

미국/한인 사회의 일부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비슷한 경제수준, 비슷한 학력,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의 “안전한 사교 공간”으로 교회를 사용하는 경우.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누가 어느 동네에 사는지,
집값은 얼마인지,
남편은 무슨 일 하는지,
자녀는 어디 학교 다니는지에 따라
**표정과 태도가 달라지는 배려(?)**가 존재합니다.

이런 곳에서 약자, 이방인, 실패한 사람은
“전도 대상”일지는 몰라도,
진짜 친구나 형제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4. 심리학적으로 보면:

“불안한 사람일수록 약자를 더 밟는다”

융 심리학의 언어로 보면,
약자를 하대하는 신앙인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4-1. 흔들리는 자존감 + 계급심리가 결합할 때

겉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귀한 존재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는 이 사회에서 충분히 인정받고 있나?”

“나는 실패한 인생은 아니야?”

“나는 남들에 비해 뒤처진 건 아닐까?”

라는 불안과 열등감이 꿈틀거릴 수 있습니다.

이 불안은 두 가지 방식으로 풀립니다.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자기보다 아래라고 느껴지는 사람을 밟고 내려다보기

그래서 약자에게는 함부로,
부자에게는 지나치게 친절하게 굴게 됩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계급 질서와 자본주의 논리를 좇는 마음이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4-2. 종교가 “거울”이 아니라 “가면”이 될 때

융의 말대로라면,
종교는 원래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내 탐욕,

내 두려움,

내 열등감,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는 나의 그림자.

하지만 많은 경우 종교는
“내가 어떤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지”를 위한
사회적 가면(persona) 역할을 합니다.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선한 쪽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이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에만 에너지를 쓰다 보면,
정작 내 안의 추함과 폭력성, 비겁함, 이중성은
끝내 직면되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 권력, 돈, 종교가 결합하면
약자를 경멸하는 신앙인이 탄생합니다.

5. 왜 유대인들에겐 관대함이, 교회인들에겐 실망이 더 크게 느껴질까?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기대치의 차이입니다.

유대인을 처음 만날 때 우리는
“심판자”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다른 문화권 사람” 정도로 만납니다.
그래서 그들이 집을 열고, 밥을 나누고, 배우려는 이들을 받아들이면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네?”**라는 놀라움이 크게 남습니다.

반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이미 머릿속에 복음서 속 예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고,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곁에 서 있던 그 예수 말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마주친 ‘신앙인’이
돈과 지위에 따라 사람을 나누거나,
약자를 하대하거나,
교회 바깥 사람을 쉽게 정죄하면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실망이 아니라,
**“예수를 배반한 태도”**로 느끼게 됩니다.
배신감과 상처가 더 깊게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6.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차이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저는 이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라서 본질적으로 훌륭하고,
기독교인이라서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전통, 어떤 역사, 어떤 집단문화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있느냐가 사람의 태도를 바꿔 놓는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종교는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약자와 함께 서게 만드는 힘이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종교는
계급을 포장하고
자기 우월감을 강화하는 화장품이 된다.”


유대인 집에서 경험한 무료 숙식, 열린 공부, 삶 속의 교육은
하나의 전통이자, 수백 년 누적된 집단의 선택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본 어떤 교회 안의 차가움, 계급의식, 약자 하대는
신앙의 이름을 빌린 집단 불안과 열등감, 그리고 그림자일 수도 있습니다.

7.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질문

이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면
결국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어떤 신앙을 살고 있는가?”
“나는 힘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나는 내 종교/철학/가치를,
나를 포장하는 도구로 쓰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깎아내고 성찰하는 거울로 쓰고 있는가?”


우리 각자가 이 질문 앞에 서기 시작할 때,
어쩌면 유대인들 집에서 보았던 그 넉넉한 식탁,
예수가 복음서에서 보여준 그 자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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