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과 목적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파이트 클럽>은 나의 인생 영화 중 하나다. ‘인생 영화’라고 꼽을 정도로 교훈적이거나 훌륭한 작품은 아니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팍팍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탈출 심리를 폭력적이며 마초적인 장치로 표현한 영화다. 실제로 1999년 개봉 무렵, 뚜렷한 주제의식이나 철학 없이 스타일만 가득하다고 혹평을 받았으니까. 반면 그 독보적인 스타일 때문에 전 세계적인 컬트 팬을 얻었다.
파이트 클럽에는 8개의 규칙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규칙이 유명하다. 둘은 같은 말로 반복되는데 그만큼 클럽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이기 때문이다. 즉, ‘파이트 클럽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
“Gentlemen, welcome to Fight Club. The first rule of Fight Club is: you do not talk about Fight Club. The second rule of Fight Club is: you DO NOT talk about Fight Club! Third rule of Fight Club: (…)”
— Tyler Durden, Fight Club (1999)
오랜만에 작업실에서 <파이트 클럽>의 사운드트랙을 다시 들었다. 우울한 비트의 음악이 깔리는 동안, 당시 영화가 비판하던 자본주의의 민낯,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무정부주의, 끝없이 소비를 부추기는 현대사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문득 20여 년이 흐른 지금, 세상이 이미 그런 방향으로 기울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브래드 피트처럼 고급 비누를 파는 대신 적당한 보습 비누로 아이를 씻기는 정도랄까. 양육자가 된 내 인생은 무얼 위해, 누구와 싸우고 있을까. 정부? 돈? 시간? 아이? 늘 부족한 에너지?
내게는 썬데이 파더스 클럽이 있다. 파이트 클럽처럼 스타일리시하거나 실재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이런 규칙 정도는 필요할 것 같다. 첫 번째 규칙은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 두 번째 규칙 역시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
유아차를 밀면서 거리를 걷다가, 놀이터에서 졸린 눈으로 아이가 타고 있는 시소를 바라보다가, 쇼핑몰에서 아이를 태운 카트를 끌다가, 수영장이 딸린 리조트에서 아이 손을 잡고 걷다가 양육자끼리 눈이 마주치면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상상도 해본다.
반짝반짝 빛나도록 조명받으며 자라온 모두가 어쩌다 결혼을 하고, 어쩌다 아이를 낳아 엄마, 아빠, 보호자, 양육자로 불리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 이렇게 각자의 삶에서 투쟁하며 싸우는 중이라면, 이보다 어려우면서도 끝나지 않을 싸움이 또 있을까.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나는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 잭처럼 이따금 허무주의와 냉소에 빠져 있었다. 반면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그런 감상은 모두 사치였다. 아이를 차에 태우고 단둘이 근교로 나들이 갈 때면, 중력을 잃은 우주인처럼 둥둥 떠다녔다. 아이와 더불어 사는 일상은 버틸만했지만 가끔씩 버거웠고, 그 버거움은 인생이 허무해지도록 방치할 수 없다는 책임감으로 모습을 바꿨다. 요즘은 오히려 실용주의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신생아 시절부터 분유나 이유식은 어떤 걸 먹여야 할지 실리적으로 따지게 됐고, 찬 바람이 불어오면 기침약이나 해열제를 미리 준비해야 할지 고민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주인에게도 다시 중력이 작용했다. 이 뉴스레터를 꾸준히 쓰고(이번 레터는 결국 지각 발송을 했다) 동명의 단행본이 나오면서 독자들을 만나고 미디어 인터뷰를 하고 육아 백과사전이란 오픈카톡방(비번 0206)이 생겨 수시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 세월 동안 아이가 충실히 자라면서 육아가 조금씩 수월해졌다.
지난 11월 중순의 일요일. 아내에게 자유 시간을 주고, 경기도 퇴촌의 공동육아 모임에 다녀왔다. 아이와 단둘이 아침 일찍 떠나 점심과 저녁까지 먹었는 데에도 예전처럼 막막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이먼 앤 카펑클의 1981년 뉴욕 센트럴 파크 공연 실황 CD를 틀었다. ‘April Come She Will’을 지나 ‘Bridge over Troubled Water’가 재생될 무렵 우린 동호대교를 건넜고, ‘The Sounds of Silence’가 연주될 즈음 집에 도착했다. 예전 같으면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을 텐데, 70분이 넘는 재생 시간 내내 송이는 조잘조잘 대며 밤 운전을 외롭지 않게 해 줬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운전 중에 언뜻 본 풍경을 적고 싶었다. 가득 찬 달이 비춘 팔당호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사위가 컴컴한 데에도 달이 저렇게 밝게 비추니 물결이 보인 것 같다고 쓰고 싶었다. 물론 잔잔한 호수를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물결이 떨리고 있을 것이다. 송이와 함께 하는 전반적으로 평온하고 무탈한 하루를 확대해 보면 매번 미세하게 떨리는 일상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미세한 진동이 가끔 내 마음을 은은하게 울리고, 그 감정을 ‘행복’이라고 적어 꼼꼼히 보관하지 않는다면, 내 일상이 쉽게 외부 요인에 다치거나 연약해질 것 같았다.
얼마 전 우연히 브래드 피트가 출연한 또 다른 영상*을 봤다. 그가 뽐내는 카리스마는 여전히 멋있었지만 리즈 시절의 앳된 모습도 세월을 비켜갈 순 없었다. 그는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 그는 프랑스 국내 영화 시상식 세자르상(César Awards)에 참석하여, 자신의 오랜 동료이자 <파이트 클럽> 감독인 데이비드 핀처에게 명예상을 수여했다.
"최근 한 등장인물이 ‘여정과 목적지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라고 묻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다른 등장인물이 이렇게 대답하죠.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고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I was reading a passage recently where a character was asking “Which is more important, the journey or the destination?” And the other replied, “It's the company”, and I couldn’t agree more."
— 브래드 피트 Brad Pitt
나의 육아 여정에 아내와 송이,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여전히 좋다.
Note. 육아일기를 가장한 아빠들의 성장일기 '썬데이 파더스 클럽(Sunday Fathers Club)'의 116번째 뉴스레터로 발행한 글을 다듬은 버전입니다. 이 글은 제가 2년 반 전에 썼던 글과 이어지기도 합니다. 예전 글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