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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길 44,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 순례길 44.

포르토 마린에서 팔라스 레이까지

by 지구 소풍 이정희
6시 출발

알베르게는 새벽부터 출발을 서두르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7시면 벌써 절반 이상이 출발하고 어수선하다. 순례길의 시작이자 종착지인 성당 앞 광장의 카페에는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불이 환한 시가지를 내려오자 오후 3시경에 온다는 비가 이른 아침 어둠 속에 부슬부슬 내린다.


오늘은 거리도 먼데 새벽부터 비가 오고 걱정이 많아진다. 미뇨 강의 지류인 토레스 강 위를 지나는 좁은 다리를 건너자 순례길이 두 가지로 갈라지고 구글 앱은 더 빠른 길이라며 다른 길을 안내한다. 산티아고 91km 표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길은 세 가지나 있어 선택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왼쪽 길을 선택하였더니 꽤 많이 돌아가는 급경사 언덕길이다.

300m 이상 올라야 하는 고원길이어서 얼굴에는 빗물이, 우비 안에는 땀이 가득이다. 거리 안내 표지석이 정말 촘촘하게 많아졌다. 숫자를 잘 보이게 크게 하면 좋을 텐데 이제 자세히 보니 벌써 78km 남았다고 적혀있다.


안갯속에 오솔길은 순례자들의 화려한 우비와 헤드랜턴 불빛으로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갈수록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기쁘기도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점점 다가옴을 나타낸다.

순례길 걷는 학생 단체

어제 사리아부터 급격히 많아진 순례자들에 오늘 아침은 어제 본 중고등학생들 50여 명도 단체로 합류하여 아침부터 분위기가 시끌시끌하다. 어제와 오늘은 학생들과 순례길이 겹쳐지며 자세히 보게 된다. 신부복을 입은 교장선생님이 가운데에서 아이들을 관리한다.

맨 앞에는 젊은 남자 교사와 잘 걷는 학생들이, 맨 끝에는 나이가 지긋한 교사 두 명이 잘 못 걷는 학생 몇 명을 기다렸다 데려간다.

한국의 학생들처럼 시끄럽고 장난치고 걷기 힘들다며 길바닥에 주저앉기도 한다. 그러면 나이 든 교사가 스틱을 휘젓고 학생들은 얼른 일어나 다시 걷는다. 학생들의 걷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아주 흥미롭다.

배낭에 걸린 빨래

학생들 간 체격과 체력도 엄청 차이가 있어 대열이 많이 길고 모두 힘들어 보였다. 몇몇 학생들은 걸으며 핸드폰 동영상에 빠져 걱정이 될 정도이다. 어디 가나 아이들을 보면 부모 모습이, 학생들을 보면 교사 모습이 그려진다.


아스팔트 포장길과 나란히 흙으로 만들어진 길을 걷는다. 포르토 마린에서 곤사르까지 순례자를 힘들게 하는 오르막 자갈길이 이어지고 큰 도로 횡단을 여러 번 해야 한다.

천 년의 세계적인 관광지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수백만의 순례자가 찾는 곳이다. 그런데 중간에 쉼터가 없어 마을에 들러 가게를 이용해야 한다. 큰길을 건너는데도 횡단보도나 신호등이 없는 경우가 많아 황당했다.

수도사 옷차림의 세요 장사하는 곳(?) 순례자 여권 앞뒷면 나의 세요들

조그마한 마을 낡은 건물에 순례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기도하는 곳인 줄 알고 들어가니 수도사 옷을 입은 노인이 순례자에게 세요를 찍어주고 있다. 순례자들은 도장을 찍고 대부분 1유로를 낸다.

세요는 순례자가 머문 숙소, 식당, 성당에서 찍어주는 확인 도장이다. 도장에 찍힌 지역 이름과 날짜를 확인하여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길 완주증을 발행해 준다.


어제도 영국 민속 복장을 입고 백파이프 악기 연주를 하며 세요 앞에 돈통을 놓아둔 사람을 보았다. 처음에는 버스킹 연주인 줄 알았는데 세요와 교환하는 느낌을 받았다.

세요를 그려주고 돈을 받는 할머니

재능기부처럼 세요를 그려주고 돈을 받는 사람, 세요에 색종이를 붙여주는 사람 등 순례자들이 순례 여권에 여러 모양의 세요를 찍으려는 마음을 이용한 상술 같아 인상이 찌푸려진다.


갈리시아 지방은 농사보다는 목축업이 대부분인가 보다. 농사를 지을만한 땅에 목초를 기르고 양, 염소, 소, 젖소, 말들을 풀어놓아 기르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이 동물들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은 큰 개들이다.

팔라스 레이 입구 우아하게 활짝 핀 수국들

동물들이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한 발짝 움직이면 재빨리 개들이 쫓아와 짖는다. 그러면 몇 배나 덩치가 큰 소들도 얼른 울타리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사람 몇 몫하는 개들'


팔라스 데 레이라는 이름은 ‘왕의 궁전’(El Palacio de un Rey)이라는 의미다. 역시 이름처럼 아름다운 도시이다. 팔라스 레이 길목에 비가 와도 우아한 수국이 활짝 웃으며 맞아준다. 짙은 가을까지, 지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꽃처럼 마음이 예쁜 사람들은 멈추어 사진을 찍고 무심한 사람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친다.

'마음이 예뻐야 꽃도 예뻐 보인다!'


비바람에 우비를 쓰고 걸어오는 순례자들을 보고는 마을 안내소 직원이 도장을 들고 세요를 찍으라는 동작을 한다. 사나워진 비에 순례자들은 앞만 보고 뛰듯 걸었다. 자기의 업무에 충직한 공무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만세!

오늘의 알베르게는 박스형 이층 침대라 먼 길 걸어온 순례자가 커튼을 치면 나만의 공간에서 방해받지 않고 잘 수 있는 15유로의 궁전이다.

'아, 오늘도 코 고는 소리는 또 들린다!'

알베르게는 먼저 자는 사람만 숙면할 수 있다. 피곤한 순례자들은 거의 모두 코를 곤다. 100%

센도이라 알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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