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디자인' 현상의 바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예술, 공예,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여러 분야의 역사를 공부하며 '디자인'이란 현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폈다. 덕분에 한 줄기 흐름을 찾았다. 그 줄기를 소개하면 고전미술에서 벗어난 인상파에서 시작된다. 세잔, 피카소, 몬드리안, 말레비치, 엘 리시츠키, 반 두스뷔르흐, 모호이 너지 그리고 바우하우스이다. 이를 미술사조로 바꿔 말하면 인상파, 큐비즘, 데스틸, 절대주의, 구축주의, 다시 데스틸의 구성주의 그리고 구조주의다.
이 흐름의 큰 특징은 감각지각에 의해 형성된 의미요소를 갖고 요리조리 인과관계로 연결해 하나의 이미지 언어를 구성하던 기존의 고전적 방식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이다. 이 단절이 피카소와 몬드리안 사이다. 이런 점에서 피카소와 마티스는 마지막 고전주의자라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마티스는 전경과 배경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피카소는 의미요소를 자유롭게 분리하고 배치했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하다. 덕분에 몬드리안과 말레비치가 과감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몬드리안은 추상을 발견했다. 하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추상은 보편이 아니다. 추상은 보편적 가능성을 내포할 뿐이다. 시각적 단순화가 추상이고, 언어적 단순화는 보편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못하면 현대미술은 때려죽어도 이해 못한다. 추상이 언어적 보편성을 띄기 시작한 것은 말레비치 이후다. 구축주의자들은 추상을 언어적 요소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눈치빠른 바우하우스 교사들은 이를 예술의 언어요소로서 추상을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즉 de+sign, 완전히 새로운 기호만들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이 추상기호로 인과적 구성이 아닌 해체+콜라주 방식의 구성을 채택했다. 쉽게 말해 하나의 탑쌓기에서 복잡한 건물짓기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 일을 주도한 서양사람들은 공예가(craftman)가 아니라 예술가(artist)였다. 물론 이 예술가들은 공예의 보편성을 폭넓게 수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디자인의 뿌리는 두 분야에 있다. 예술과 공예. 사람들은 이를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틀리진 않지만 뭔가 모호하다. 보다 분명히 말하려면 "예술의 공예 지향"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 지향은 윌리엄 모리스부터 주장되었던 것이기에 특별할 것은 없지만, 추상요소를 발견하고 이를 다시 과감하게 언어적 요소로 만든 것은 아주 특별하다.
이 특별함은 '아르데코'라는 새로운 양식을 낳았다. 현대의 장식들은 모두 네모, 세모, 동그라미, 선 등 추상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의미적 요소보다는 추상적 요소 안에서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모더니즘 디자인이란 바로 '아르데코'에 그 본질이 있다.
이 아르데코에 반발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은 크게 보아 고전미술의 습관이 다시 온 것이다. 추상의 보편적 언어에 질린 사람들은 다시 의미적 요소를 찾기 시작했다. 이미 추상요소로 구성된 생활양식은 어떤 시대적 의미를 내포하기 시작했기에 '언어'적 공공성을 획득한 상황이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터는 그 추상언어들을 의미적 요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 레트로, 뉴트로 열풍이란 바로 추상으로 구성된 의미요소를 감각적으로 재수용하기 시작한 현상이다. 이건 과거 고전미술이 하던 방식이다. 무려 2500년동안 아니 인류가 생기면서 지금까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난 200년 동안 미술은 크게 요동쳤다. 그 파동에 새로운 미적활동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그림과 그릇을 만들던 예술과 공예가 언어적 행위로 여겨진 최초의 미적활동이 바로 디자인이다. 이 미적활동은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엄청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기술적으로 말과 글, 이미지, 건축이 하나의 매체에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언어=말/글"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미지도 공간도 모두 언어로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깨달음을 준 것은 마샬 맥루한인데,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밝힌다. 고맙습니다.
서양 디자인사를 알았으면 우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한국은요?"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요원하다. 나는 이제야 한국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 디자인사 흐름을 대강 알았기에 한국 디자인사의 흐름도 대강 예측해 볼 수 있는 있겠다.
서양에 디자인이 등장한 배경은 길드와 아카데미의 몰락 때문이다. 산업혁명으로 그 동안 유지되던 상당수의 대형길드가 해체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전통 기술을 보호해줄 길드가 사라지자 숙련된 장인들조차 먹고살기 위해 공장 기계 앞에서 단순한 일을 해야만 했다. 대혁명으로 신분제가 사라지면서 아카데미 출신 예술가들도 몰락했다. 그들은 사제와 귀족에게 얻은 명분으로 자본가들에게 작품을 팔아왔다. 하지만 사제와 귀족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예술가들의 권위도 추락했다. 예술가들은 자본가의 공장에 취업하거나 타락했다. 이를 개탄한 모리스는 예술가들에게 쓸데없는 고집을 꺽고 몰락한 공예에 관심을 두라고 부추겼다. 그게 미술공예운동이다. 이 주장은 결국 서양에서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미적 활동을 형성시켰다.
그럼 한국에도 이런 흐름이 있었을까? 물론 있었다. 일단 한국에는 예술가라는 직업이 딱히 없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은 주로 양반계급이 겸하고 있었다. 양반계급의 사치품을 만드는 숙련된 장인들은 있었다. 조선사회도 '공工'이라는 계층이 있어 거대한 '공길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의 제가백가 중 '묵자' 계열이 바로 이 '공길드'에 해당한다. 이 길드는 수천년동안 중국문화권에서 나름의 역할과 책임을 해왔다.
19세기말 서양 산업혁명의 물결이 한국에 들이닥치면서 한국의 장인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이들은 타락하기 보다는 변화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기계를 도입하고 자신의 기량을 접목시켰다. 자본가와 대중들의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이땅의 마지막 장인들은 생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한국의 공예사에는 이런 사람들을 별로 주목하지 않는듯 싶다. 한국 공예는 크게 두가지 상황을 주목한다. 첫번째는 유학파와 공모전 당선자다. 이들은 일찍히 서양의 추상양식을 받아들여 서양을 열심히 뒤따른 사람들이다. 덕분에 권위를 얻고, 교수와 관료 등 높은 자리에 올랐다. 두번째는 나전칠기나 한지 등 전통방식을 고집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통적 생산방식을 고집함으로서 끝끝내 희소성을 획득했다. 우리는 이분들에게 '인간문화재'라는 요상한 이름을 붙힌다. 안타깝게도 이 전통기술을 이어가려는 젊은이는 별로 없는듯 싶다. 하긴 나조차 그러지 않으니 누구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
나는 이 두가지 관점에 오랜시간 놀아났다. 이들 뒤에 감춰진 마지막 장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의 작업에 중국의 정교한 그림이나 서양의 추상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 장인들의 그림이나 작업을 어설픈 아마추어들의 키치나 버내큘러디자인 정도로 여기고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그렇게 한국의 마지막 장인들은 잊혀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같은 자들의 역할이 크다. 그는 영국에서 어설프게 들은 정보와 자신의 불교이론을 접목해 새로운 미적 관점을 만들었다. 바로 '민중공예=민예'이다. 나는 한동안 그 관점에 빠져 그의 책을 탐독했다. 여기에 진짜 한국디자인의 흐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소박함'이다. 이 소박함은 숙련된 장인들의 손에서 탄생하는데,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무심' '불이' 등의 개념으로 소박한 공예는 어떤 가치는 획득했지만 몇몇의 취미가에 의해서만 인정될 뿐, 결국 특별함을 내세운 서양의 예술과 디자인에 가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최봉영 샘 집에서 나는 한국의 특별한 공예품들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 또 최봉영이다. 그래서 내가 이 분의 이름을 자꾸 언급하는 이유다.
최봉영 샘 집은 아주 크다. 그 큰 집에 발딛을 틈이 별로 없다. 온갖 물건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도자기와 조각, 관광공예품 등등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마지막 장인들이 만든 물건들이 집안 방마다 가득가득 들어차 있었다. 대략 만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처음엔 이 물건들이 뭐지 싶었다. 이후 물건들의 의미에 대해 곱씹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제 최봉영 샘과 통화하면서 그 물건들의 의미를 이제 알게 되었다. 바로 '인상파'다.
구한말 마지막 장인들은 과거의 전통적 생산방식과 단절을 해야만 했다. 그래야 물밀듯 들어오는 서양의 상품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그들의 경쟁상대는 자본주의 시장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절치부심해 여러가지 실험을 한다. 과거 불교의 전통문양 및 청나라의 그림들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표현주의 기법을 도입한다. 서양의 물건과 시장의 추이를 살피며 새로운 시도를 거듭한다. 그렇게 피카소까지는 나아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추상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한국에 마티스와 피카소, 몬드리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수근이 마티스이고, 이중섭이 피카소다. 김환기는 몬드리안에 해당될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공예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시인이자 건축가였던 이상이 모호이 너지와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에 다소 관심을 두었지만 그저 문학적 취미였을 뿐이다. 유학파와 공모전 당선자에겐 별로 기댈 것은 없다. 결국 그들의 베껴쓰기에 능한 사람들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한국 공예에는 디자인 흐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봉영 샘 집에서 나는 오랜 편견을 깨게 되었다. 아주 잠깐 머물렀지만 나에게 이 집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나오는 보물창고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은 단재의 책과 석봉의 천자문을 보여주셨지만 내 눈과 시선은 방안에 있는 나무조각과 거실에 빼곡한 도자기에 새겨진 그림들이었다. 선생님은 이 도자기를 '해주백자'라 했는데... 이 백자에는 이상한 그림들이 가득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던 그림들이.
처음엔 나도 이 조각들과 그림들이 키치나 버내큘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필력이나 섬세함이 너무 비범하다. 종종 선생님께 해주백자의 형성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청자와 백자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고, 나의 한국 공예 흐름이 완전히 재구성 되었다. 나는 해주백자를 만든 사람들이 '마지막 도자기 장인들'이란 생각이 들었고, 해주백자에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한국의 고흐이자 고갱, 세잔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티스와 피카소, 표현주의 미술가들의 바탕에 인상파가 있었듯이 이중섭과 박수근의 바탕에 마지막 인상파 장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백자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그리고 달항아리로 계보가 이어진다. 최봉영 샘은 고려청자는 불교도상을, 조선백자는 중국도상을, 달항아리는 서양추상을 따른다고 말한다. 달항아리는 야나기에 굴절되어 묘한 이미지를 획득했다. 조선백자와 달항아리사이 인상파에 해당되는 해주백자는 무시되고 있다. 서양은 고전예술과 단절한 인상파를 통해 새로운 예술과 디자인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인상파가 조명 받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 중간에 야나기 무네요시가 있다. 야나기 '소박함' 때문에 한국 해주백자의 특별함이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 장인들의 노력, 해주백자의 그림과 조각들을 통해 한국의 현대 예술과 디자인의 흐름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공부해야 할 것이 있어 몇권의 책을 주문했다. 아... 이걸 언제 다 읽지... ㅠㅠ 아무튼 이제라도 알게되어 다행이다. 이제야 제대로 된 한국디자인사를 조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상파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것이 한국 예술과 공예, 디자인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그 흔적이 바로 한국공예사와 디자인사의 중심 관점이 될 것이다. 서양 근현대 미술사와 비교하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재구성될 듯 싶다. 이 외에도 한국인이 세상을 보는 '인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제 소박한 달항아리보다 특별한 해주백자를 주목해야만 한다. 여기가 바로 한국 공예와 미술, 디자인의 로도스다!
사진은 최봉영 샘 집 거실에 해주백자가 가득차 있는 사진이다.
(출처: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1410100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