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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러 생각

이 시대의 스팩터(specter), 이재명

by 윤여경

3년전 이 즈음 나는 이재명을 지지한다는 글을 SNS에 남겼다. 윤석열 당선 후 그 글 때문에 주변 친구들에게 다소 핀잔은 들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당시 나는 진심으로 이재명을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응원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글은 인간 이재명이 아닌 대통령으로서 이재명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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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재명을 알게 된 것은 김부선이 이상한 폭로를 하면서부터이다. 심심풀이로 김부선의 폭로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았는데… 우연히 이재명이라는 사람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가 화전민 출신이고 어린시절 공장에서 일하다가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해 사법고시 패스하고 인권변호사로 일하다 성남시장이 된 이야기였다. 그의 삶이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이 사람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어려운 성남시를 맡아 모라토리엄 선언하고, 성남시를 다시 반석에 올려놓는 등 성남시장으로서도 꽤나 성과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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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pecter is haunting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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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장은 청년 마르크스의 유명한 저서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이다. 저 문장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라고 번역된다. 나는 궁금했다. 왜 유령이 ‘고스트’가 아니라 ‘스펙터’일까. 찾아보니 스팩터도 유령이라고 번역된다. 그때 스팩터는 고스트와 뭔가 다른 유령이구나 생각했다. 형태가 다소 분명한 귀신이 아니라 안개처럼 넓게 펴진 유령이 아닐까. 나아가 ‘스팩트럼’이란 단어와도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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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스팩터처럼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생각과 사상의 스팩트럼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다윈의 영향을 크게 받은 마르크스는 당시 유명한 리카도와 애덤스미스의 경제학을 이어받아 자본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정치와 경제 측면에서 상품과 돈이 연결되는 원리를 밝힌 거작 ‘자본’을 집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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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 자본의 첫 챕터인 ‘상품론’을 집중해서 읽었다. 물론 제대로 독해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반복해서 읽으며 내 나름대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취지를 이해하려 애썼다. 그때 나는 이 상품론이야 말로, 너무 정치적이지 않고, 또 너무 경제적이지 않으면, 또 너무 사회적이지 않고 나아가 너무 과학적이지 않은 참 균형잡힌 논리라 생각했다. 이후로 나는 주변에 마르크스의 자본 전체는 몰라도 ‘상품론’은 꼭 한번 읽어보라고 주변에 권유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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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가라타니 고진과 에히리 프롬 등의 철학자들이 마르크스를 재조명하는 글들을 접했고, 그의 사상을 떠나 마르크스란 사람 자체가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독일에서 프랑스로 영국으로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직업적으로도 철학자에서 역사학자로 또 정치학자에서 경제학자로 언론인으로 살았으며, 나름대로 당시 논란이 많았던 진화론과 같은 과학적 원리를 수용하는 등 굉장히 스팩트럼이 넓은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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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을 돌이켜보면 나는 이런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듯 싶다. 뭔가 좁은 세상에서 좁은 시야를 깊게 가져가기 보다는 넓은 세상에서 넓은 시야를 갖고 있는 사람. 삶이던 생각이던 스팩트럼이 넓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듯 싶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격언도 ‘우물을 깊게 파려거든 먼저 넓게 파라’이다. 이 조언이 매력적인 이유는 ‘넓게’라는 단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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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참 좁다는 느낌을 받는다. 삼면이 바다인 땅도 좁았고, 지배층의 공부범위도 좁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성리학만 공부했고, 해방이후에는 법과 의학 등 전문직을 선호한다. 몇백년 이렇게 좁게 공부한 분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다 보니 우리나라 정치도 항상 좁은 문제에 천착해 온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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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우리나라 민중들은 큰 것을 좋아한다. 내가 넓고 큰 것을 좋아하는 것도 한국사람이기 때문이다. 한국말은 영어랑 구조가 다르다. 영어는 주어 다음에 동사가 나와 동사가 주어의 행위성을 강조하지만 한국말은 동사에 해당하는 풀이말이 제일 마지막에 나온다. 앞에 등장하는 모든 말을 나열하고 나중에 풀이말로 한꺼번에 풀어내는 형식의 언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사람은 많은 것을 함께 풀어내기를 좋아한다. 더 많이, 더 넓게, 더 크게 풀어낼수록 좋은 것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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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내가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사람들은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지만 반만 맞는 이야기다. 청년시절 공산당 선언을 쓸때는 그랬다. 하지만 그가 영국에 왔을땐 자본주의자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면서 자본주의자였고, 정치학자면서 경제학자였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을 정치경제학 고전이라 말한다. 마르크스는 하나의 이념을 만들었지만 그는 그 이념에 종속되는 삶을 살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전기를 쓴 에히리 프롬은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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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치인 중 스팩트럼이 넓은 스팩터(specter)는 많지 않았다. 내 짧은 지식으로 옛날에는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 등 역사적 위인들이고, 최근에는 김대중 정도였던듯 싶다. 그리고 이재명에서 넓은 스팩트럼을 보게 된다. 이미 그의 삶이 우리 사회 가장 어려운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넓고 큰 스팩트럼을 경험해 왔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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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 역사의 분기점에 이런사람이 필요하다고 본다. 해방이후 대한민국은 전래없을 정도로 엄청난 도약과 진보를 추구해왔지만, 아직도 여러분야에 많은 문제가 산적하다. 그런데 이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고 모두 스킵되어 왔다. 갈등을 해소하지 않고 항상 그냥 조용히 덮고 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이 문제를 그냥 덮고 갈수만은 없다. 어떤식으로든 해결과 해소를 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큰 틀에서 대화하고 타협하는 ‘문제해결자(디자이너)’적 태도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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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면 일단 큰 사람이어야만 한다. 경험과 인식의 스팩트럼이 넓어야 하며 이는 우리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이 된 리더’만이 이 갈등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단 개천을 무시하거나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안된다. 개천과 용을 모두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개천에서 용이 된 이재명을 성남시장때부터 조용히 지지해 왔다. 주변에 그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곤 했지만 늘 돌아오는 대답은 핀잔이었다. 3년전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되었을때도 그랬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이재명은 안된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해 기대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 사람은 리더가 되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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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 3년 그는 죽음의 위기를 몇차례 넘겼다. 작년 초에는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삶과 죽음의 스팩트럼이 더 넓어졌을까. 지금 우리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이럴때 실수도 많고 오히려 일을 그르치기도 하는데… 과연 이재명이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된다. 지금까지 그가 해온 행보로 보아서는 잘 할듯 싶은데… 사람은 또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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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목전에 둔 이 상황에서 나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앞으로도 계속 그가 타협의 유혹과 좁은 수렁에 빠지지 않고, 또 스스로 ‘이재명주의자’가 되지 않고, 윤석열처럼 왕으로서의 대통령이 아닌, 한국을 대표하는 시민으로서 큰 스팩터답게 한국과 세계의 미래를 위해 스펙트럼이 넓고 높게 배회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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