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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May 09. 2024

오늘 스무살이 된 너에게

아들, 잘 잤어?


네가 눈을 떠서 이 편지를 보고 있을 때쯤, 나와 네 아빠는 시베리아 위를 날고 있을 거야. 우린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란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 ‘둘이 또 이럴 줄 알았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라면 물을 올릴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겪어 온 너를 생각하면 후자에 더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오래 전부터 준비했어. 네가 막 기어다닐 때 쯤이었던가? 네 고모가 결혼하기 전에 할머니랑 둘이 이야기를 잠깐 했거든. 내가 우스갯소리로 “어머님, 이제 육아 끝나셨네요?” 했더니, 너희 할머니가 호탕하게 웃으시더라고. 그 웃음이 참 시원해서 결심했지. 난 훨씬 더 빨리 육아를 졸업해야겠다고. 


네 아빠랑 나는 지구 이곳저곳을 여행할 생각이야. 엄밀히 말하면 앞 문장의 주어는 ‘네 아빠와 나’가 아닌 ‘나’지만. 원래 내 목표는 네가 스무살이 되는 첫 날, 쿨쿨 자고 있는 두 남자를 두고 쪽지 한 장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지는 거였어. ‘때 되면 돌아올 때니 나를 찾지 말고 잘 지내라!’ 하고. 그때부터 야금야금 조금씩 돈을 모았지. 덜 쓰고 덜 먹고 덜 사면서. 


1년쯤 지났을 땐가. 치밀한 네 아빠 레이더망에 내 비밀통장이 딱 걸린 거야. ‘1년이면 꽤 오래 숨겼네’ 생각하고 있지? 나도 신기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허술한 내가 1년이나 비자금을 모으고 있었다니. 물론 네가 스무살이 되는 날까지 모으겠다는 게 명목상의 목표였지만, 나도 나를 잘 알기에 처음부터 짐작했지. 얼마 못 가서 들통나겠다고. 그래도 일단 모아보기로 했어.


비자금을 들킨 이후로 너를 재운 후 네 아빠와 나의 설전이 시작됐어. 멀쩡히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왜 그러냐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진짜로 떠날 거냐는 의심, 진짜 가면 집 비밀번호를 다 바꿔버리겠다는 협박까지. 비슷하게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수십 번 들으면서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지. 결국 네 아빠도 두손두발 다 들었단다. 알잖아. 나, 한 번 꽂힌 건 꼭 해야 되는 성격인 거. 네 아빠도 잘 알 거고.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했어. 일단 처음엔 둘이서 떠나기로. 둘이 같이 다니다가 ‘때가 됐다’ 싶은 날 내가 말해주면 네 아빠는 집으로 돌아가겠대. 그런 날은 절대 안 올 거라고, 넌 나 없이는 하루도 혼자 못 버틴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나도 장담하지. 네 아빠가 돌아가면 난 혼자 지낼 거야. 네 아빠 말처럼 힘들겠지. 그래도 견뎌보려고.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혼자인 게 익숙해지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릴 거라고 믿으면서. 


오십이 넘었지만 사실 나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어.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쌓이고 인생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생길 줄 알았는데, 실상은 정반대더라고. 하루하루 사는 데 급급하다 보니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좁은 일상에서 배운 몇 가지 사실로 세상을 재단하고 섣불리 판단하는 데 익숙해져서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건 점점 어려워졌어. 겉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어른 같은데, 속은 한없이 미성숙한 상태랄까. 그런 상태로 계속 시간만 흘러가는 기분이야. 


그래서 일부러라도 나를 낯선 곳에 둬보려고 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곳에서 아는 척, 젠 체하지 않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 몸과 마음이 조금은 말랑해지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전엔 볼 수 없던 사실 너머를 볼 수도 있고, 좀 더 여유롭게 허허 웃으면서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덜 팍팍한 사람으로 살 수 있고, 무엇보다도 나란 인간을 좀 더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긴 여행 끝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렇게 다녀봤는데 결국 별 거 없더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내가 버릇처럼 말하는 “인생 별 거 있어?”를 실천하면서 살 수 있을 테니까. 


아무 언질도 없이 가버린 게 너무한 것 같지?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들 거야. 그렇다면 기억을 되짚어보거라, 아들아. 네가 열 살이 되던 첫 날의 아침에 내가 뭘 가르쳤는지. 영어학원 갈 준비로 분주하던 겨울방학의 아침, 갑자기 내가 널 불렀지? 오늘은 영어 대신 딴 걸 배우자면서 대쯤 후라이팬이랑 뒤집개를 네 양손에 쥐여줬어. 그다음 너를 인덕션 앞에 데려다놓고 몸소 시범을 보였지. 

“자, 불을 올린 다음에는 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계란은 그 다음에 깨는 거야. 투명하던 계란이 점점 하얗고 노래질 때쯤 계란 아래로 뒤집개를 이렇게 쿡쿡. 그런 다음 한 번에 뒤집어.” 

그날 우리는 스무 개가 넘는 계란후라이를 만들고, 마지막 계란후라이는 밥 위에 올려 간장계란밥을 먹었지. 기억 나? 그게 다 오늘을 위한 엄마의 큰 그림이었단다. 독립의 첫 걸음은 요리에서부터. 요리의 첫 걸음은 계란후라이에서부터. 


이젠 내가 모르는 요리도 어디서 찾아서 잘 해 먹으니까 네가 끼니 거를까 걱정되진 않아. 청소랑 빨래, 설거지는 네가 나보다 한 수 위고. 생활비는 매달 1일에 네 통장으로 입금될 거야. 나는 한 번에 주자고 했는데, 걱정 많은 네 아빠가 절대 그렇게는 못 두고 보지. 넉넉하지는 않아도 사는 데 지장 없을 만큼은 들어올 거야. 


여기까지 읽고 안심하면서 그만 읽고 자려고 폼 잡고 있지? 그럴 줄 알고 한 마디만 더 할게. 마지막은 엄마의 자기변명이란다. 사실 쓰면서도 ‘이게 맞나’ 싶어. 오랫 동안 꿈꿔 왔던 일이긴 한데, 네 입장에선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싶어서. 내가 아는 너라면 참견쟁이 둘이 사라진 집에서 쾌재를 부르고 있겠지만, 난 그래도 엄마잖니. 아주 가끔은 네가 내 품에 안겨 천사처럼 자던 아기로 보일 때가 있단 말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읽어줘. 


네 엄마로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해주고 싶은 마음을 참는 거였어. 나도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가진 걸 다 털어서라도 좋은 걸 사주고 싶고, 그럴 수만 있으면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고, 힘든 건 뭐라도 대신해주고 싶더라고. 네가 힘들어 보일 때마다 그건 아니라고, 이게 좋겠다고 어른인 양 일러주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어. 


네가 태어나서 처음 세상의 음식을 맛보던 때가 기억 나. 요거트 맛에 온몸을 부들거리고, 아랫니 두 개로 쌀과자를 씹으면서 세상 쓴 맛 다 겪어본 표정을 짓던 거. 요거트는 시고 과자는 딱딱하다고 내가 말해줄 수도 있겠지만, 결국 맛이란 건 주관적인 거잖아. 나한테 신 요거트가 너한텐 달콤할 수도 있고, 요거트가 너한테 어떤 맛인지는 네가 직접 맛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나는 너를 가까이에서 오래 봐 왔지만 너를 몰라. 나는 절대로 네가 될 수 없어. 


나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를 오백 번쯤 되뇌면서 기다렸어. 제일 친한 친구와 이유없이 멀어졌다던 날도 이 말 저 말 하는 대신 훌쩍이는 네 앞에 물 한 잔을 내어줬지. 네 울음이 잦아드는 걸 보고는 다 울었는지 묻고 너를 네 방에 데려다주고는 내 방에서 혼자 울었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에 슬퍼서. 네가 얼른 괜찮아지기를 바라면서.


네가 어른이 되면 해주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 옛날 사람 같다고 치를 떨겠지만 좋은 가게에 가서 수트도 한 벌 맞춰주고 싶고, 운전도 가르쳐주고 싶고, 내가 스무살이 되던 해에 우리아빠가 그랬듯 너를 데리고 막걸릿집에 가서 술도 처음으로 가르쳐주고 싶고. 어른이 돼서 처음하는 건 뭐든 같이 해주고 싶단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한테도 이런 마음이 있어. 방목형 육아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어느 상황에서든 “인생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거야”를 단골 레퍼토리로 돌려 쓰는 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엄마라고! 변명처럼 들린다면 미안하다… 변명이 맞단다.


그런데 온갖 주고 싶은 걸 뒤로 하고 난 ‘아무것도 해주지 않음’을 주기로 했어. 참 일관적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가 좋아하는 게임에 빠져 있는 것도 좋지만, 게임이 지겨워지면 종종 밖에도 나가봐. 안 해본 운동도 해보고, 친구들이 재밌다는 영화도 따라 보고. 일어났는데 마음이 전이랑 좀 다른 날은 가방을 싸서 아무데나 여행도 가봐. 가서 모르는 사람들한테 말도 좀 걸어보고, 집 말고 다른 데서 먹고 자기도 해보고. 고작 생각 나는 게 이것 뿐이냐고 묻는다면, 내 상상력이 아직은 이 정도라고 대답할 수밖에. “그래서 상상력을 넓히러 가는 거야!”라고 또 한 번 변명할 수밖에.


우리 사이에 편지는 낯부끄러우니, 편지는 이걸로 그만 하자. 앞으로 서로의 생사는 카톡으로 전하는 걸로!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마, 아들. 곧 돌아갈 네 아빠도 잘 부탁한다. 고집쟁이 영감탱이를 혼자 감당하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어디엔가 자리 잡으면 주소를 보낼 테니 오고 싶으면 놀러 와. 귀찮으면 그냥 있고. 우리 다시 만나면 서로 겪어본 세상이 어땠는지 얘기해보자. “이건 달 줄 알았는데 엄청 시더라”, “이건 떫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끝으로, 돈 떨어지면 언제든 연락해. 너무 자주는 말고. 

어른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부디 나보다 훨씬 나은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2042년 1월 1일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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