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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Jun 03. 2023

나는 다섯, 사실은 서른다섯

여전히 나를 '아기'라 부르는 너에게

내 나이 올해로 다섯. 며칠 전에 너는 성대한 파티를 해주겠다며 나를 식탁 위로 올렸지. 평소엔 내가 먹지도 않는 온갖 간식들을 늘어놓고, 명절 때나 한 번씩 꺼내 입을까 말까 한 한복까지 차려 입히고 말야. 그중 제일은 ‘오늘은 내 생일’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힌 굴욕 목걸이. 한사코 싫다는 내게 기어이 그 목걸이를 끼게 하고는 사진을 찍어댔지. 그럴 땐 똥이라도 씹은 표정을 지어주는 게 제일이야. 네가 원하는 사진을 순순히 얻게 해줄 순 없지.



너는 자꾸 잊겠지만, 나는 사실 서른다섯이라고! 내가 속한 세계는 네 세계보다 시침이 훨씬 빨라. 시간이 일곱 배나 빠르게 돌아가지. 네가 하루를 보내는 동안 나는 일주일을 꼬박 사는 셈이야. 그러니 네가 나랑 5년을 지냈다고 해서 나도 같은 5년을 보낸 게 아니라고. 난 너랑 무려 35년을 살았어. 네가 태어나서 이제껏 살아 온 시간만큼.

 

그래도 여전히 나를 ‘애기’라 부르는 널 위해 나는 능숙하게 연기를 하지. “아이 귀여워” 하면 귀엽게 배도 한 번 뒤집어 까주고, 까마득한 아기 시절 목소리로 너를 불러보기도 하고. 너는 언제까지나 나를 아기처럼 보듬고 싶어하니까. 품어주고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니까. 사실은 자기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는 집사 주제에. 그런 네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리면서 나는 기꺼이 너의 딸, 너의 아기가 되지.



그러니까 얼마 전, 새벽 다섯 시에 봤던 내 모습은 깡그리 잊어줘. 나라고 귀여운 고양이 노릇이 늘 달가운 것만은 아니니까. 내가 자고 있는 줄 아는 이른 새벽에 나는 사실 늘 깨어 있어. 두 집사 애들이 잘 자고 있나 확인한 다음, 거실의 공허를 가로지르지. 동 트는 베란다를 보면서 마음껏 상념에 잠기곤 해. 평소 내 본분은 먹고 자고 싸고 노는 게 전부인 상팔자 고양이니까. 내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내야 나를 돌보는 네가 뿌듯하니까. 나이가 차면서 같이 차오르는 상념 따윈 곱게 접어놓게 되지. 그러니까 그날 그새벽에 너를 발견한 내 눈빛을 넌 한 번도 못 봤을 거야. 앞으로도 영영 못 봤으면 해. 네가 문밖을 나서고 나면 내가 문밖의 너를 하나도 모르듯이, 새벽의 나 역시 너는 전혀 모르길 바라. 그러니까 우리, 서로의 시간은 서로 알아서 지켜주자고. 그러면 나는 늘 사랑스러운 네 고양이일 거야.


누가 시키지도 않은 내 엄마가 된 이후로 너는 언제나 씩씩한 척을 해. 내가 갑자기 다리를 절뚝거리거나 토를 하면 이리오라고, 괜찮다고 나를 먼저 안심시키지. 그러면서 언제든지 병원에 연락할 생각으로 휴대폰을 꼭 쥐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지? 엉겁결에 내 아빠가 된 네 남편에게 애가 아플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못 알아듣는 줄 알지? 내가 아플 때마다 너를 신경 쓰느라 내 몸 아픈 것도 자주 잊어버린다는 건 더 모르겠지. 너는 내 엄마가 되자마자 자식의 죽음을 겪을 뻔했어. 나는 ‘내가 죽을 뻔했다’는 것보다 ‘네 자식이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익숙해. 초록 토를 하던 네 자식을 옆에 두고 혹시나 죽진 않을까 불안해하던 밤을 기억해. 그 밤을 지나 넌 좀 더 성숙해졌고 능숙한 집사가 됐다고 믿겠지만, 그 밤을 지나 능숙하고 성숙해진 건 네가 아닌 나는 아니었을까.



요즘 네 시선이 나에게 오래 머물지 못하는 걸 알아. 호기롭게 웃으면서 쳐다봤다가도 넌 이내 아련해지고 말지. 그럴 때면 눈치채. ‘저거 또 최악을 생각하고 있구나’ 하지. 직접 거둔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일 거야. 고양이 알러지에 시달리면서도 나와 함께하기로 결심한 네가, 꼬딱지만 한 오피스텔에서 나와 따로 자겠다고 네트망을 엮어 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초라한 방어막으로 너와 나를 지키려던 네가 이번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서른다섯의 네가 품은 또 다른 아이. 어느 날 그 아이에게서 너와 같은 알러지 증상을 발견하는 상상. 온갖 노력을 해도 아이는 나아지지 않고, 너는 나와 그 아이 모두를 똑같이 너무 사랑하고… 너무 갔네, 너무 갔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이 사람아.


나는 너처럼 긴 미래를 살지 않아. 그렇게 긴 미래까지 염두에 두고 살면 고양이의 생을 제대로 살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지. 아까 말했다시피 내 시곗바늘은 네 것보다 훨씬 빠르니까. 당장 눈앞의 행복을 감각하기에도 벅차. 내 꼬리를 네 팔에 턱 올리고 너와 낮잠을 즐기는 한낮의 여유 같은 것. 여러 생각 없이 그 시간을 온전히 느껴. 그러고 보니 나를 느낌이로 부르기로 한 건 너였잖아. 그렇게 온전히 느끼라고 그렇게 부른 거 아니었어? 나는 지금 없는 걸 걱정하지 않아. 그러니 너도 되도록 걱정하지 말아. 내가 네 곁에서 나이 들고(너는 매번 ‘자란다’고 표현하지만), 네 안에서 또 다른 너의 아기가 자라는 이 순간을 우리 같이 느껴보자고. 더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지마. 아무것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웃지도 말고.  


한국에서 태어나면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는다지? 나도 엄연히 망원동에서 태어난 몸이니까 네가 아무리 바득바득 우겨도 내 나이는 사실 여섯. 사람으로 치면 너보다 많은 마흔둘. 목마른 아이가 물을 찾듯 네가 힘들 때마다 조언을 구하곤 하는 세상 선배들의 나이. 그런데도 너에게 나는 다섯 살 아이.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언제나 다섯 살이었으면 하는 품 안의 아기. 나도 나이를 먹을수록 나보다 어려지는 네게 언제까지나 귀여울 거야. 네가 캣닢가루를 바닥에 뿌려댈 때마다 그 위에서 뒹굴어줄게. 네가 사랑하는 내 핑크 뱃살도 아주 가끔은 만지게 해줄게. 시간이 가면서 자꾸 어른이 돼가더라도 너한테는 들키지 않을게. 너를 속여 먹는 건 나한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다만, 내년 생일엔 굴욕 목걸이만은 제발 자제해주길. 생일 맞아 돈 뜯으러 나온 동네 양아치의 표정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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