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디지털 노마드?!

정신차려, 이 친구야

by TOMO

태국 여행을 떠나기로 하다. 나 말고 내 동생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등장인물들에 대해 잠깐 소개를 할 필요가 있겠다. 일단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판교에서 일하는 개발자이며 여행에 환장한 구제불가능한 중생이다. 필자의 친동생도 개발자로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사용하는 언어는 C++, Java로 서로 다르지만 둘 모두 서버 개발자이므로 가끔씩 만나서 IT 관련 스터디를 하거나 직장생활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곤 한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 어느 날 갑자기 동생한테 연락이 왔다.

"행님, 내 귤 한 박스 샀는데 집에 가서 좀 가져 갈래?"

과일 섭취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에게 이게 웬 횡재랴. 퇴근하면 판교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같이 아우네 집 근처 카페에 가서 같이 공부를 하기로 했다.

카페에서 맥북을 꺼내 공부를 하려던 찰나, 동생이 휴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아 내 휴가 5일 정도 남았는데 어떻게 쓸 지 모르겠네. 일본은 최근에 갔고, 한국에 있자니 휴가쓰기 아깝고."

"맞나. 그럼 동남아나 가라. 11월에서 2월이 동남아 여행 적기니까."

"내는 베트남이랑 말레이시아밖에 안 가봤는데 어디를 가야되노."

자랑은 아니지만 인도네시아 외 모든 동남아시아 국가를 다 가봤기 때문에 그 중 어떤 나라가 제일 좋았는지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태국 가 봐라. 내 한 달동안 태국 여행한 적 있는데 동남아 중에 제일 좋다고 확신할 수 있다."

동생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 방콕, 아유타야, 롭부리 등 내가 2010년에 태국을 여행하면서 방문했던 도시들 위주로 일정을 짜주면서 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한창 떠들었다. 사진을 곁들인 설득에 동생은 남은 휴가를 몽땅 태국에 쏟아붓기로 결정했다. 동생이 태국 여행 다녀오면 또 그 주제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지만 다음 날 동생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한다.

"내 이번 여행의 주제는 '디지털 노마드'로 정할라고."


디지털 노마드?!

어학사전에서 '디지털 노마드'의 정의를 살펴보자.

"첨단 디지털 장비를 갖추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하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

동생이 전하는 말을 듣고 10초 동안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본 후 든 생각은 '이런 정신나간 놈 같으니'였다. 외국 여행 가면서 코틀린 학회에 참석하는 괴짜 개발자를 본 적이 있긴 한데, 피를 나눈 혈육이 이 축에 낀다고 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아니, 태국을 여행한다는 인간이 저런 헛소리나 하고 있다니. 안 되겠다. 다시 만나서 설득을 해야겠다. 내가 태국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곁들여가면서 과외할 때처럼 차근차근 설명을 해줘야겠다.

Think-Lone-Backpack-616890352-artoleshko-copy.jpg 요샌 디지털 노마드가 주제인 여행도 있긴 하다


방콕 (Bangkok)

한국에서 태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기점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곳은 방콕과 치앙마이다. 대한항공에서 치앙마이로 가는 직항편을 운행하기는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고 선택할 수 있는 시간폭도 좁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방콕을 선택하곤 한다. 방콕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답게 시 어디서든 고층빌딩으로 뒤덮인 스카이라인을 감상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의 수도 서울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방콕만이 가진 독특함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23. Wat Phra Kaew & Grand Palace (74).JPG 왓 프라 깨우 (Wat Phra Kaew)

내가 방콕에서 손꼽은 3가지 매력은 왓 프라 깨우 (Wat Phra Kaew), 짜투짝 시장 (Chatuchak Weekend Market), 짜오프라야 강 (Chao Phraya River)이다. 왓 프라 깨우에서 태국 사람들의 수준높은 예술 작품을 만나고 방콕의 역사에 대해 알면서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방콕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은 짜투짝 시장인데, 주말 오전 7시에서 오후 6시까지 열리는 엄청나게 큰 시장이다. 짜투짝 시장의 매력에 반해 이후 일정을 다 잊고 시장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 기억이 난다. 짜오프라야 강은 방콕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존재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비용 대비 효율이 적은 수상 교통은 외면받기 마련인데, 방콕 시민들은 여전히 짜오프라야 강을 따라 운행하는 배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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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투짝 시장 (Chatuchak Weekend Market)

방콕의 매력에 대해 여기까지 설명하니 이틀이면 다 볼 수 있는 일정일 것 같다며 남는 시간에 또 디지털 노마드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안 된다. 이 놈아. 그런 건 한국에서나 하라고. 디지털 노마드를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더 찾아봐야겠다. 방콕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으니 방콕 근교에 내가 다녀온 도시 두 군데를 더 설명하기로 했다.

19. Chao Phraya Express (23).JPG 저녁 노을이 지는 짜오프라야 강


아유타야 (Ayuthaya)

아유타야는 1350년부터 1767년까지 태국의 수도였던 도시다. 미얀마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되면서 태국은 수도를 방콕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아유타야는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태국의 수도였던 곳답게 벽돌로 세워진 오래된 불교 사원을 만날 수 있고, 정방형으로 세워진 계획도시를 거닐며 과거에 번성했던 아유타야 왕국을 떠올릴 수 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인 가치가 높은 곳이다.

24. Wat Phra Si Sanphet (51).JPG 아유타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왓 프라 시 산펫 (Wat Phra Si Sanphet)

필자는 아유타야에서 이틀을 보냈는데, 폐허가 된 사원 곳곳을 거닐기도 하고 코끼리를 타고 아유타야 역사공원 한 바퀴를 둘러보기도 했다. 태국 여행을 떠났을 때가 우기가 막 끝난 11월 초라 몇몇 사원들은 물에 잠겨 출입이 불가능했다. 꼭 보고 싶은 사원이 있었는데 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모두 물에 잠겨 포기할까 생각하던 찰나 갑자기 배 한 척이 등장했다. 매년 우기가 되면 도로가 물에 잠겨 마을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배가 임시로 운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배에 오르자 태국 현지인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태국어를 연발하면서 나에게 말을 건다. 당시 내가 알고 있던 태국어는 "콥쿤 캅 (안녕하세요)", "사왓디 캅 (감사합니다)", "까오리 (한국)"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나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며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배에서 내리자 사원의 위치에 대해 손짓 발짓으로 알려주는 그들의 행동이 어찌나 고맙던지! 아유타야의 사원과 더불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현지인들의 이러한 친절 때문이었다.

51. Wat Maheyong (19).JPG 아유타야에서 만난 태국 현지인들

동생은 아유타야에 대해 듣고 일정에 추가시켜야겠다며 구글링을 한다. 이미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한 아유타야기 때문에 한국어로 진행하는 투어 상품도 있는 듯 했다. 그는 3만원을 내면 방콕에서 오전에 출발해 저녁에 도착하는 투어를 보더니 일주일 중 또 하루를 뺀다. 빌어먹을 디지털 노마드를 막으려면 아직도 4일이나 남았네.

14. Elephant Taxi Kraal (26).jpg 코끼리를 타고 돌아다닌 아유타야


롭부리 (Lopburi)

롭부리도 아유타야처럼 태국의 수도였던 도시다. 그 기간이 17세기 30년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짧다는 것이 문제지만. 롭부리의 중심가엔 앙코르와트와 비슷한 크메르 제국의 힌두교 사원인 프랑 삼 욧 (Prang Sam Yot)이 있다. 캄보디아의 것과 비교하면 규모도 작고 초라하지만, 롭부리의 사원이 특이한 건 사원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라는 것이다.

Thailand_007.jpg 프랑 삼 욧 (Prang Sam Yot). 자세히 들여다 보면 수많은 원숭이들이 사원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원숭이들이 점령하고 있는 곳은 프랑 삼 욧뿐만이 아니다. 롭부리 시내 곳곳에서도 쉽게 원숭이를 만날 수 있으며, 롭부리 시민들도 시가 '원숭이들의 도시'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롭부리에 처음 들렀을 때 야생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원숭이가 너무나 신기해 가까이서 들여다 본 적이 있다. 한 손에는 여행책을 들고,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원숭이를 이 각도 저 각도로 찍기 시작했다. 원숭이는 무심한 듯 나를 쳐다보며 하품을 지을 정도로 나에게 무관심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손에 든 책을 보더니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나는 원숭이의 의도를 전혀 모른 채 '사람들이 전혀 무섭지 않은가 보구나'라고 웃으며 원숭이를 맞이했다. 내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노무 원숭이들은 사람들이 친근한 게 아니라 만만했던 것이다! 원숭이는 내 손에 든 책자를 뺏기 위해 책을 세게 내리쳤다! 다행히 책은 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나는 너무나 황당했던 나머지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롭부리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원숭이는 위험한 동물이라는 것을.

Thailand_008.jpg 불상들도 원숭이들에게 점령된 지 오래다

원숭이들의 황당무계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프랑 삼 욧에서 크메르 제국의 흔적을 천천히 둘러보려고 했지만, 원숭이들이 사원 곳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그래도 사원을 원숭이들이 점령했다는 것만으로 신기한 광경이라고 나를 위로하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안정을 취한 것도 잠시, 사원의 정문을 촬영하려고 사진기를 든 순간 갑자기 이상한 것이 눈에 띈다. 원숭이들이 내 눈 앞에서 짝짓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나를 놀래키는 건 변함이 없구만. 그들의 이상야릇한 행동도 어이없게 사진으로 담았지만 19금이므로 올리지는 않는다.

Thailand_006.jpg 나에게서 책을 빼앗으려 시도한 나쁜 원숭이!

롭부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동생은 롭부리를 일정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롭부리를 예찬하기는 커녕 한참을 욕만 한 것 같았다. 나한테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이지, 롭부리는 가 볼만한 곳이라고 설득을 해도 이미 나는 신뢰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무면허로 스쿠터를 타다

롭부리를 생각하니 태국에서 일어난 또 다른 일이 기억에 떠올랐다. 바로 무면허로 스쿠터 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태국의 몇몇 사람들은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면허를 가지고 있던 말던 일단 스쿠터를 대여해준다. 태국 여행 초기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나, 히피들의 성지인 빠이 (Pai)에 도착하니 누군가 스쿠터 강습을 해준다고 하자 귀가 솔깃해졌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3시간 정도 스쿠터 타는 법을 배우고 나니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이 사실을 여행의 반이 지난 시점에 알았을까할 정도로 스쿠터는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

Thailand_014.jpg 매홍손 (Mae Hong Son)

스쿠터를 타고 처음으로 자빠진 곳은 태국 북부 매홍손 (Mae Hong Son)이었다. 매홍손은 태국 북부 지방의 대도시 중 하나로,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소수 민족이 거주하는 마을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힘든 곳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스쿠터를 빌려 한 나절동안 독특한 마을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운전자가 가장 위험할 때가 차를 몰기 시작한 지 3개월 후라고 했던가. 나에게 그 시기가 찾아 온 건 스쿠터를 배운 지 3일이 지났을 때였다. 사고가 발생한 건 내리막길에서 커브를 돌 때였다. 스쿠터 운전에 대한 자신감이 절정에 달한 그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른 건 카트라이더에나 가능할 법한 드리프트였다. 생각을 행동에 옮기자 스쿠터는 쭈욱 미끄러져 갓길에서 넘어지고야 말았다. 놀라운 낙법실력(?)으로 손바닥과 무릎만 까졌지만 스쿠터 곳곳에 흠집이 났고 수리비를 배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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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마이 (Phimai)의 크메르 유적

이런 사건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못 차린 나는 나콘 라차시마 (Nakhon Ratchasima)에서 다시 스쿠터를 빌렸다. 유적 덕후인 내 레이더에 포착된 건 크메르 유적이 남아있는 피마이 (Phimai)라는 도시였고,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스쿠터를 이용하는 것이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첫 번째 사고가 터진 후 일주일이 지난 뒤라 더욱 조심하며 운전을 했지만 문제는 태국 북동부 지역이 개발이 가장 낙후된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대도시인 나콘 라차시마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다양한 크기의 구덩이들이 아스팔트 도로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게다가 몇몇 구간은 모래로 뒤덮여 헛바퀴를 돌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을 하다가 구덩이를 발견한 후 브레이크를 밟을 수 밖에 없었고, 스쿠터는 헛바퀴를 돌며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손바닥과 무릎만 까지긴 했지만, 다친 곳에 또 상처를 입게 되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해외에서 병원까지 방문할 처지라니. 당시 내 기분이 얼마나 참담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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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스쿠터를 몰면서 본 풍경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동생에게 해봤자 태국에 대한 거부감만 생길 것이 아닌가. 내가 자빠진 두 곳은 어차피 동생이 들릴 도시들도 아니니 굳이 내 흑역사를 꺼낼 필요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부모님한테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이야기해봤자 나한테 득될 일도 없는 듯 하고. 어차피 설득하는 건 물건너 갔으니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디지털 노마드를 하든지 말든지 너 알아서 하라고.

Picture 492.jpg 태국 북부지방 여행 중!

어쨌든 목표는 달성했다

동생이 태국에 떠난 지 둘째날, 즉 여행 일정을 시작한 첫째날에 엄청난 양의 사진을 보내기 시작했다. 방콕의 사원, 짜투짝 시장, 짜오프라야 강 수상택시 등 태국의 아름다운 사진들이 수도없이 쏟아졌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여행지는 베트남이라던 그는 태국이 너무 좋다면서 행님이 왜 한 달동안 태국을 여행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태국은 일주일로는 부족할 것 같다며 디지털 노마드를 포기하는 걸 선언했다. 내 말을 끝까지 안 듣더니 결국은 '백문이 불여일견'인건가! 어쨌든 태국 여행 잘 하고 오기를. 그리고 다시는 외국가서 '디지털 노마드'하겠다는 소리 하지 말기를. 그건 한국의 수많은 이쁜 카페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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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방콕 여행 첫 날 보내준 사진들


출처

1) https://www.worldtravelguide.net/features/feature/the-10-best-cities-for-digital-nom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