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터득골 책방에서 발견했던 책
때는 크리스마스 연휴였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연인도 없는 상황에서 긴 휴가를 집에서 보내기 아쉬웠던지 나는 아는 동생에게 연락해 강원도에 가자고 말했다. 나랑 별반 다를 것 없는 처지였던 동생도 흔쾌히 승낙했다. (내가 불쌍해서 같이 여행을 떠난 게 아니라 믿는다.) 우리는 갑작스럽게 3박 4일의 일정으로 강원도 원주・고성・춘천, 그리고 경기도 가평을 둘러보는 여행을 떠났다.
오래전 일본 규슈의 3대 도자기 마을인 가라쓰・아리타・이마리에 들린 적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도공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만든 일본의 도자기는 현재 전 세계에서 제일가는 품질과 아름다음을 인정받고 있다. 귀국하고 난 뒤 그 원조격인 대한민국의 도자기는 어떤지 궁금해졌다. 알아보니 대한민국의 3대 도자기 마을은 경기도 이천・여주・광주이며, 지금도 제법 많은 도요 (陶窯)가 남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도자기를 보러 많이 찾는 곳은 이천이다. 이천에 들러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보고, 실제 물레를 돌려가며 나만의 도자기를 만들어보는 것이 내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연애도 하지 않던 나에게 도자기를 만들어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짧은 연애 기간에 만난 사람들은 교회 다니랴 친구 만나랴 여행을 딱히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혼자 가서라도 도자기를 만들어 볼까 생각을 했었지만 상경한 지 5년 동안 차 타고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이천은 언제나 먼 곳으로 여겨졌다. 이번 여행을 시작하기 전 갑자기 이천이 생각난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이천에서 물레체험을 한 뒤 향한 곳은 강원도 원주였다. 원주는 강원도에 속해있긴 하지만 영동고속도로를 타면 경기도까지는 금방이라 강원도에서 가장 발전이 빠른 도시다. 원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치악산・뮤지엄 산・소금강 출렁다리다. 하지만 나는 이미 원주 여행을 하면서 모두 들린 곳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다시 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같이 간 동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신 들린 곳은 '터득골 책방'이었다.
'터득골 책방'은 대중교통으로 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며 자동차를 타더라도 좁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타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외진 곳에 서점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서점 안에 들어서니 손님은 단지 우리만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쥐어주고 조용히 책을 읽던 가족, 성별은 다르지만 우리처럼 두 명이서 여행 와 책을 읽고 있던 젊은 여자 손님 둘. '터득골책방'은 도시의 혼잡함에서 벗어나 조용히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천국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런 독립서점에 가면 예의로나마 책을 한 권씩 사곤 한다. 서점 입구에 포스터로 붙어있던 <작은 그릇 안에 담긴 우주>라는 책이 '터득골 책방'에서 출간한 책이라는 것을 보고 곧바로 이 책을 구입해 읽기로 결심했다. 대형 출판사가 아닌 조그만 책방에서 책을 출간하다니 놀랍지 않은가. 게다가 도자기를 빚고 온 다음에 40년 동안 도자기를 만든 '보원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니! 우리가 마실 커피 두 잔을 시키고 곧바로 책값을 계산하려는 찰나, 책방 주인님이 이 책을 골랐다는 데 놀라운 표정을 지으신다. 출간한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책을 사려고 하니 많이 기특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책은 선물로 주신다고 말하며 다른 책을 대신 사라는 것이 아닌가! 부랴부랴 다른 책을 찾다 보니 얇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눈에 뜨였고, 그 책이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거리를 바꾸는 작은 가게>였다.
<거리를 바꾸는 작은 가게>는 일본 교토의 유명한 서점인 게이분샤 이치조지점의 전 점장이었던 호리베 아쓰시가 쓴 책이다. 그는 게이분샤의 직원에서부터 시작해 점장이라는 자리까지 오르면서 게이분샤의 변화를 지켜보고 주도한 사람이다. 게이분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10곳 중 한 곳에 뽑힐 정도로 유명세를 자랑한다. 서점이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잡화점 또는 빵집과 결합된 공간을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또한 갤러리를 열고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는 등 책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를 만드려는 시도를 해왔다. 서점의 본래 목적인 책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다. 서가의 구성도 기본적인 원칙만 지킨다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반영했다. 그 결과 게이분샤 이치조지점이 있는 사쿄구는 교토의 번화가와 멀리 떨어진 북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아름다운 거리가 되었다.
아쓰시는 게이분샤 이치조지 점과 함께 사쿄 구의 거리를 바꾼 작은 가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책방 주인답게 자신들만의 가치를 지키는 개성 있는 서점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오래된 선술집과 골동품을 파는 찻집을 비롯해 자전거를 빌릴 수 있으며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문화 공간도 소개하고 있다. 게이분샤와 함께 사쿄 구의 거리를 함께 만들어가는 이 가게들의 공통점은 유행이나 이득만을 좇을 때 생길 수밖에 없는 획일성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가게가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닌, 손님들에게 무언가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각자 자신만의 가치를 지키고 살아가는 가게들이 모여 교토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개성있는 가게들을 보러 사쿄 구까지 온다. 이 가게들의 본질은 '각자'의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똑같은 가게에서 똑같은 물건을 사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책과 영화를 즐길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무미건조해질까?"
이 책을 구할 수 있었던 '터득골 북샵' 또한 원주를 바꾸는 작은 가게라는 점에서 게이분샤 이치조지점과 비슷하다. 강원도 원주 산골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이 조그마한 책방 때문이다. '터득골 북샵' 외에도 원주를 변화시키고 있는 서점을 확인하고 싶다면 책방 구석에 구비되어 있는 지도를 보면 된다. 지도를 보면 '터득골 북샵'뿐 아니라 10개가 넘는 독립서점이 원주 곳곳에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능에 충실하며 엄청난 양의 서적을 보유한 대형서점을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책방 주인이 엄선해서 선택한 책들을 보며 주인이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파악하는 것도 나름 재미가 쏠쏠하다. '책의 내용'이 아닌 서점의 매력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책방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배달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책의 내용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도 우유처럼 배달해 달라고 할 것이다."
지금 지도를 펼쳐 우리 동네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지도 못한 가게가 골목길에 숨어 당신을 맞아줄지 모른다. '사고파는 행위'의 본질이 우리의 편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